71화. 드레스는 안 돼요.2022.02.06.
빚……? 나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눈을 껌뻑였다. 빙긋 웃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오르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없는 소리를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테어가 오르카 황자에게 빚을 졌다고?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이제 누군가에게 빚을 질 정도로 에일스포드의 사정이 궁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지금은 오히려 다른 영지의 사정이 급하면 우리가 돈을 융통해줄 수 있는 위치였다.
“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얼떨떨하게 입을 열자 대답을 기대하는 듯 오르카 황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얼마면 돼요?”
“얼마?”
“얼마면 빚을 갚을 수 있는지…….”
“돈으로 갚으려고요?”
“그럼요?”
겉도는 대화에 나와 오르카 황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도 상대의 이야기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마주한 오르카 황자의 주홍색 눈동자가 선명히 각인됐다.
‘눈동자 색 예쁘네.’
순수한 감상이었다. 오르카 황자는 늘 ^^ 이런 모양으로 눈웃음을 짓고 다녀서 이렇게 눈동자를 볼 일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웃지 않아서 눈동자가 드러나면 사람이 조금 차갑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타입이라 조금 신기했다.
‘알테어는 웃어도 안 웃어도 늘 무서운 악당 얼굴인데.’
사실은 알테어보다 더한 악역이면서 말이다.
‘그 부분은 알테어가 억울할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던 오르카 황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평소처럼 꿍꿍이 있어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유쾌해서 터져 나온 웃음 같았다. 이 수상쩍은 황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잔뜩 경계하며 바라보자 그가 겨우 웃음을 수습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항상 생각했던 것 이상이라니까.”
‘항상’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런 소리는 오랫동안 교류한 가까운 사이에나 쓸 수 있는 말 아닌가?
“남작이 받아 간 건 돈이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돌려받아야 할 것도 돈이 아니죠.”
“그럼…….”
“음. 내가 남작의 곤란함을 해소해줬습니다. 그러니 남작도 나의 곤란함을 해소해주는 걸로 보답해야겠지요. 약간의…… 이자도 더해준다면 더욱 좋고.”
“영주님은 은혜를 잊지 않으실 거예요.”
“그럼요. 그럴 사람이라는 걸 알지요.”
이것 역시 오랫동안 교류한 가까운 사이에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오르카 황자와 에일스포드의 인연은 지난 동부 회합이 처음인데.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눈치 빠른 오르카 황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눈칫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하하.”
‘눈칫밥은 무슨…….’
소설을 50번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르카 황자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요양을 핑계로 제국 전역을 떠돌아다닌 건 사실이고, 귀족들이 힘없는 황자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가 어디서 눈칫밥을 먹을 성격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이 눈칫밥을 줘도 꿈쩍도 안 할 성격이면서.’
오히려 그런 인간들을 눈여겨보았다가 교묘한 방식으로 몰락시키는 게 오르카 황자의 특기였다. 시큰둥한 기분으로 대충 ‘그런가요……’ 하고 장단을 맞춰주니 오르카 황자가 눈만 웃는 상태로 허리를 굽혀 나와의 거리를 바짝 좁혀왔다.
“그런데…….”
급격히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자 오르카 황자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봐도 남작 부인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저, 저처럼 알기 쉬운 사람은 없을 텐데요…….”
얼굴이며 행동에 소심한 성격이 다 드러나는데, 뭘 모르겠단 거지.
“그렇다면 부인은 스스로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난……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겠는데, 앞으로 뭘 할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거든. 의외성이 있어요. 그 의외성이 묘하게 중요한 구석을 찔러서…….”
“전하.”
날 바라보며 꺼내던 이야기가 점점 혼잣말처럼 바뀌자 파벨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왔다.
“외람되지만 너무 거리가 가까워 사용인들의 오해를 살까 두렵습니다. 지금 성 안에는 에일스포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 부인을 난처하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그럼 곤란하지.”
일개 집사의 지적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오르카 황자는 순순히 허리를 세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멀어지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가까이 붙어 있는 건 아직도 너무 긴장된다.
“남작 부인.”
“네?”
“내 팬이라고 했던 이야기, 유효합니까?”
‘팬’이라는 말에 파벨이 기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런 적이 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대충 상황을 모면하고자 꺼낸 말이 여기서 다시 등장할 줄이야…….’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지만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 물론이죠. 전 전하의 열렬한 팬이랍니다!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나마 웃으려 애쓰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 모습에 오르카 황자의 얼굴이 묘해졌다.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오물거려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그 입 모양이 꼭……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날 바라보는 시선은 감히 제게 거짓말을 한 괘씸한 여자를 추궁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단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서…….
“수도에서 다시 만나면.”
가만히 오르카 황자의 표정을 읽어내려 노력하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남작에게 달아둔 빚에 대한 보답을 받을 생각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부인도 그 ‘보답’에 휘말리게 될 거라…… 그걸 미리 말해두고 싶었습니다.”
딱히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닌지 오르카 황자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평화롭고 고요한 전원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좋은 영지입니다. 곧 축제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구경은 못 하겠네요.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고.”
실버 쥬빌리를 계기로 오르카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이미 그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 계획한 일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어쩐지 창밖을 바라보는 오르카의 얼굴은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원치 않는 길을 억지로 등 떠밀려 걷는 사람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을 때는 평소처럼 화사한 미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부서진 바퀴가 멀쩡해지면 난 수도로 떠납니다. 떠나는 날에 배웅해주실 겁니까?”
“……그럼요. 손님이 떠나시는데 당연히 배웅해야지요.”
“좋네요. 그럼 수도에서 다시 만납시다.”
인사가 이상했다. 수도에서 다시 만나기 전에, 그가 수도로 떠나는 날 마주치게 될 텐데. 그 말의 의미는 생각보다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 오르카 황자 일행은 이른 새벽, 짧은 편지만을 남긴 채 급히 에일스포드 성을 떠났다. 파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급히 떠나는 기색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정이 틀어져 다급하게 길을 재촉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떠날 것을 계획했었다는 뜻이다.
‘이럴 거면서 오르카 황자는 왜 배웅 인사 타령을 했던 거지?’
정말이지 알기 힘든 인물이었다. 어쨌든 오르카 일행이 떠난 덕에 손님을 대접하느라 잔뜩 얼어 있던 에일스포드 사람들은 조금 여유를 되찾았다. 덤으로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던 멜리사까지 사라졌으니 더욱 개운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사람들이 싹 사라지니 잠시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곧 수도에서 다시 그들과, 아니, 그들을 포함한 더 많은 사람과 마주하게 될 테니 말 그대로 ‘잠시나마’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제 영지는 손님 대접이 아니라 다가올 축제 준비로 바빠졌다. 전통적으로 에일스포드의 축제는 남자들이 나서서 준비했다는 파벨의 말이 진짜였는지 영지가 분주한 와중에도 내가 나설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정말로 손 놓고 있어도 되느냐고 묻자 에일스포드 토박이인 안나는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라며 오히려 어리둥절해했다. 수도에서는 완전히 반대였다. 축제를 준비하는 건 안주인의 몫이라 여자들이 나서서 행사를 준비했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건국제 행사도 황제가 아닌 황후의 주도로 이뤄지고, 여러 귀부인들이 힘을 보태는 식이었다. 경험이 많은 마리도 이런 상황이 신기한 눈치였다. 생각지 못하게 여유를 얻었으니 우리는 수도로 떠날 준비를 미리 마쳐놓기로 했다. 수도에서 열리는 실버 쥬빌리에 늦지 않으려면 에일스포드의 수확 기원제가 끝나자마자 길을 떠나야 했다. 이미 동부 귀족 회합에 참석할 때 여정을 준비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리는 물론이고 안나도 능숙하게 상황에 대응하고 있었다. 처음 에일스포드 성에 왔을 때 기본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던 안나를 마주쳤던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크나큰 발전이었다.
‘걱정이 있다면 바인 후작가지.’
숙부가 무슨 속셈으로 나와 알테어를 저택에 초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돈을 더 뜯어내려는 걸까? 역시 그렇겠지?’
에일스포드 남작이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수도까지 퍼졌을 테니 욕심 많은 숙부가 탐을 내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벌써 심장이 쿵쿵 뛰고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나디아 ‘바인’이던 시절에는 맥없이 모든 걸 내어줬지만, 이제 나는 나디아 ‘에일스포드’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황제에게 바칠 선물도 중요해.’
이미 세공품에 들어갈 최상급의 마석은 준비해두었다. 마석을 박아 넣을 세공품은 왕관으로 정했다. 마침 즉위 25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이니 의미가 맞았다. 단순히 마석을 박아 넣는 것이 아니라, 왕관을 쓰면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와 황제의 위엄이 더욱 살아나는 것으로 세공할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왕관을 썼을 때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식을 세공하는 것이 어떻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건 아주 복잡한 세공인 데다, 과시하길 좋아하는 황제의 성격과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황제는 대놓고 눈에 보이는 걸 좋아해.’
그러니 왕관이 번쩍대면 아주 좋아할 거다. 마석 홍보용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시각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 임팩트가 클 테니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모든 것이 진행되어 수확 기원제 날이 다가왔다. 당일이 되자 에일스포드 성은 오히려 고요해졌다. 모든 사용인들과 최소한의 방어 인력을 제외한 기사들이 수확 기원제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제가 수확 기원제의 분위기에 맞게 꾸며드릴게요!”
평소에는 마리가 치장을 주도했지만 오늘은 안나가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잔뜩 신이 나서 의상을 고르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까지 해주었다. 치장을 마치고 거울을 보니…….
‘모, 목동?!’
어설픈 양치기 소녀가 서 있었다.
‘마치 알프스 소녀 같은 모습…….’
수도에서 축제가 열리면 귀부인들은 다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는데, 여기에선 이런 복장으로 괜찮은 걸까?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녀도 나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그 옆에 선 마리도 똑같은 차림으로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동부 전통 의상이에요! 오늘은 다들 이런 옷을 입어요. 종일 음주와 가무를 즐겨야 하니까, ‘마님 드레스’ 같은 건 안 돼요!”
“응?”
‘음주와 가무를 즐겨?’
그건 처음 듣는 소리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문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축제 시작입니다! 모시러 왔어요!”
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