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타고 있어요. (51/170)

72화. 타고 있어요.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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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갖춰지지 않은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처음이라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마리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도 드물게 쭈뼛대며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안나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16550932420819.png“준비 다 됐어요! 지금 나가요!”

그러더니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아랫사람이 감히 할 행동은 아니었던 터라, 마리가 안나를 말리려는 듯 놀란 얼굴로 떠밀리는 내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나 씩씩하게 나를 재촉하는 안나의 걸음이 더 빨랐다. 다른 대처를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려 나는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카인을 앞세운 기사 몇몇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평소와는 다른 동부 전통의상 차림이어서, 느낌이 아주 새로웠다. 의상 덕분에 축제 분위기에 물든 것인지 히죽대며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격한 그들의 표정 변화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16550932420824.png‘여, 역시 이상한 건가?!’

16550932420824.png“아무래도 옷을 다시 갈아입고…….”

더 많은 사람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이기 전에 얼른 안나가 ‘마님 드레스’라고 부르는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 싶어서 몸을 돌리려는데, 카인이 재빨리 내게 손을 내밀었다.

16550932420833.png“벌써 축제가 시작됐습니다. 더 지체하면 좋은 구경을 다 놓치십니다.”

16550932420824.png“하지만…… 옷이…….”

16550932420833.png“자, 자! 마님 가신다~!”

카인이 너스레를 떨며 머뭇거리는 나를 에스코트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리를 돌아보았지만,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그녀도 빙긋 웃으며 손을 놓고 있었다. 내 편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다.

16550932420824.png‘축제니까 사람들도 엄청 많이 모였겠지……?’

그런 자리에 자신 없는 모습으로 나서야 한다니.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침울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런 침울함도 오래가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떠들썩한 소리가 선명해져 귀를 잡아끈 탓이었다. 축제나 파티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수도에 있을 때도 그랬다. 바인 후작가에서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떠들썩하게 저택을 채웠었지. 그러나 지금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때 들었던 음악과는 완전히 달랐다. 바인 후작가에서 들었던 음악이 잔잔한 클래식이었다면, 지금 흘러나오는 건 흥겨운 민요다. 어찌나 소리가 흥겨운지 가락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들썩댈 것만 같았다. 잔뜩 쪼그라들었던 내가 조금이나마 긴장을 푼 걸 알아챘는지 카인이 빙긋 웃었다.

16550932420833.png“오랜만에 풍요로운 축제라 다들 신이 났습니다. 최근 몇 해는 영지 사정이 어려워서…… 축제라고 해도 다들 근심에 차 있었지만, 이번엔 다르지요.”

카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호수에 다다랐다. 길을 꺾어 호숫가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음악 소리와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와 불을 피운 채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많은 조각배가 나를 맞이했다.

16550932420824.png“와아…….”

처음 보는 광경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입구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바라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93245158.jpg“마님?”

1655093245158.jpg“마님이 오셨어!”

누군가 외친 소리는 금세 호숫가 전체로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서 ‘마님이다!’라든가 ‘마님이 오셨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소심함이 한껏 발휘되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치마 아래로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16550932420824.png‘그, 그래도 엄청난 발전이야…….’

예전 같았으면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 시점에 그대로 졸도하거나 도망쳤을 게 분명하다.

16550932420824.png‘게다가 이 사람들의 눈빛에 담긴 건 적의가 아니라 호의인걸.’

다행히 못 봐줄 정도로 동부 전통의상이 안 어울리는 건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오오오!’ 하는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1655093245158.jpg“마님! 저희 집에서 만든 담근 맥주예요! 한번 드셔보세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내 얼굴보다 훨씬 큰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옆에 있던 카인이 재빨리 내 귓가에 속삭였다.

16550932420833.png“저쪽에 있는 벨록의 어머니입니다.”

16550932420824.png“아!”

벨록이라면 동부 귀족 회합을 떠나기 전 내가 티타임에 초대한 적이 있는 그 기사였다.

16550932420833.png“에일스포드 기사들은 토박이인 경우가 많아서요. 대부분 가족이 영지 내에 살고 있습니다.”

16550932420824.png“그, 그렇군요…….”

나는 얼른 벨록 경의 어머니가 주는 맥주잔을 받아 들었다. 어찌나 잔이 크고 무거운지 받아드는 것만으로도 몸이 휘청할 정도였다. 비틀대는 내 모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3245158.jpg“역시 수도 여인들은 다르다니까. 우리 마님이 이렇게 연약하시니 우리가 잘 챙겨드려야지!”

1655093245158.jpg“아, 우리 마님을 왜 네가 챙겨? 우리 영주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1655093245158.jpg“영주님도 잘하시고, 우리도 잘하면 더 좋지 뭘 그래?”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날 두고 떠들썩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평범한 대화였지만, 나를 지칭할 때마다 ‘우리’ 마님이라고 부르는 게 굉장히 낯간지러워서…….

16550932420824.png‘뭔가 부끄럽다…….’

나는 뺨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벨록 경의 어머니가 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떤 술이 좋은 술인지는 잘 모르지만, 따뜻하고 친근한 분위기 덕분인지 맛이 아주 좋았다.

16550932420824.png“맛있네요.”

작은 소리로 맥주를 칭찬하자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방금까지 떠들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16550932420824.png‘뭐, 뭔가 잘못 말했나……?’

맛있다고 말한 것밖에 없는데……. 머리를 굴려 실수를 찾아내려 애쓰는 사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손에는 먹을 걸 들고 있었다.

1655093245158.jpg“이건 저희 집에서 만든 주스입니다!”

1655093245158.jpg“제가 가져온 소시지도 한번 드셔보세요!”

1655093245158.jpg“이 과일도 아주 달콤해요!”

모두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먹을 걸 받아들었더니 어느새 품 안이 가득 찼다.

1655093245158.jpg“참! ‘그것’도 마침 다 됐을 텐데!”

1655093245158.jpg“어서 가자. 우리 마님이 제일 먼저 드셔야지!”

1655093245158.jpg“영주님은 어쩌고?”

1655093245158.jpg“에이, 영주님은 매년 드셨잖아. 이제 양보 좀 하라고 해!”

영지민들이 낄낄대며 나를 조금 더 안쪽으로 안내했다. 무시무시하게만 보이는 알테어가 영지민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편안하게 언급된다는 것도 놀라웠다.

16550932420824.png‘확실히 알테어는 자기 사람들에겐 관대한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그 사실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알테어의 새로운 면모를 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몇 걸음 가지 않아 나는 영지민들이 말한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6550932420824.png‘어……엄청나게…… 커……!’

그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멧돼지가 불 위에서 구워지고 있었다.

16550932420824.png‘이렇게 큰 멧돼지 통구이는 처음이야…….’

생각해 보면 에일스포드에 온 첫날에도 통으로 구운 닭이 식탁에 올랐었지. 동부 사람들은 식재료의 원형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16550932420824.png‘그래도 이렇게 큰 멧돼지를 통으로 굽다니.’

속이 다 익기는 하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통구이를 바라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멧돼지의 눈알과 시선이 마주쳤다.

16550932420824.png‘히익!’

기괴한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사람들은 저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평범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마리만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하얗게 질려 멧돼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수도 사람들은 재료를 작게 손질해서 한입에 먹기 좋게 요리하는 편이라, 아무래도 이런 자연(?)의 모습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거다.

1655093245158.jpg“영주님! 다 익었으면 어서 나눠주세요!”

경악한 상태로 애써 멧돼지의 눈을 피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주님이라니. 설마 저쪽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이…….

16550932420824.png“알테어?”

나는 얼굴에 재를 묻힌 채 뚱한 얼굴로 멧돼지를 굽고 있는 알테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영주도 빠짐없이 축제 준비에 차출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요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16550932420824.png‘게다가 옷도…….’

제대로 동부 전통의상을 차려입었다. 늘 딱딱한 정장이나 심플한 훈련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알프스 소년의 모습을 한 알테어를 보니…….

16550932420824.png“푸흡.”

누가 봐도 어색한 옷차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안 어울리다니! 어른이 어린애 옷을 뺏어 입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16550932533174.png“……이게 전통이라고.”

알테어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대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쩐지 제 꼴을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얼른 그를 위로해주었다.

16550932420824.png“괜찮아요. 나도 안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데요, 뭐.”

16550932533174.png“누가 그래?”

16550932420824.png“네?”

16550932533174.png“안 어울린다고 누가 그랬는데? 내가 보기엔 아주 예…….”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이야기하던 알테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주위를 노려보았다. 덩달아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흐뭇한 눈으로 나와 알테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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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2420833.png“왜 멈추십니까? 계속 말씀하십시오.”

카인이 히죽대며 팔꿈치로 알테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단번에 알테어의 얼굴이 구겨졌다.

16550932533174.png“닥쳐.”

16550932420833.png“왜요? 그냥 예쁘면 예쁘다고 하시면 되지 그게 뭐 어렵다고 저한테 성질을…… 악!”

알테어가 바드득 이를 갈며 카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16550932420824.png“괘, 괜찮아요?”

16550932533174.png“저거 엄살이야.”

놀라서 카인의 상태를 살피려 하자 알테어가 단호하게 관심을 차단하며 요리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등 뒤에서 ‘엄살 아니거든요!’ 하는 카인의 항변이 들려왔지만, 알테어는 완벽하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능숙하게 통구이를 잘라내 내게 내밀었다.

16550932533174.png“먹어 봐.”

칼에 꽂힌 고기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알테어가 권한 걸 거절할 수도 없었다. 눈앞에 멧돼지의 두 눈이 아른거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가 내민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16550932420824.png‘어?’

마, 맛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뿌듯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16550932533174.png“보기엔 이래도 맛이 괜찮지?”

나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이 촉촉하고 야들야들해서 성의 요리사가 요리한 고기보다 훨씬 맛있었다. 감탄한 얼굴로 알테어를 올려다보니 그가 슬쩍 웃으며 내 이마를 가볍게 툭 쳤다.

16550932533174.png“그런데 그건 다 뭐야?”

16550932420824.png“아. 이거요.”

품에 안은 음식들을 말하는 거다.

16550932420824.png“다들 자기 집에서 만든 거라면서 나눠줬어요.”

16550932533174.png“모두 벼르고 있었을 거야. 다들 너한테 뭐든 보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

16550932420824.png“보답이요?”

16550932533174.png“네가 남작 부인이 된 후로 영지가 이렇게 풍요로워졌잖아.”

16550932420824.png“그거야 영지에 마석 광산이 있었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하나같이 호의에 찬 시선이다. 언젠가 발견될 걸 내가 조금 앞당긴 것뿐인데, 이렇게 감사를 받아도 되는 걸까. 우물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자 알테어가 다시 한번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16550932533174.png“네 덕분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거니까 확실해.”

이상했다. 알테어의 말에는 정말 그렇게 믿게 하는 힘이 있어서, 정말로 내가 모든 걸 해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알테어를 바라보니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굳건함이 신뢰를 주는 걸까?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건 알테어 쪽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속이 간질간질해져 어깨를 움츠리니 옆에서 ‘크흠!’ 하고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카인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히죽대고 있었다.

16550932420833.png“통구이가 타고 있습니다, 영주님.”

카인의 말대로였다. 먹음직스러웠던 고기 한쪽이 점점 까매지는 게 눈에 보였다. 카인은 알테어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을 슬쩍 빼내어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16550932420833.png“배식은 제가 하겠습니다. 영주님과 마님께서는…….”

그러고는 주위에 눈짓을 보냈다. 미리 합의된 바가 있었는지 안나와 마리가 씩 웃으며 내가 품에 안고 있던 음식들을 가져갔고, 카인과 함께 왔던 기사들이 나와 알테어를 악단 앞으로 이끌었다.

16550932420833.png“자! 마님과 영주님께서 춤을 추신답니다!”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카인의 목소리에 나는 사색이 되었다.

16550932420824.png‘추, 추, 추,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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