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안 돼?2022.02.13.
당황스러운 마음은 잠시 뿐이었다. 알테어가 이런 음악에 맞춰서 신나게 춤을 추는 건 상상이 안 된다.
‘당연히 안 추려고 할 거야!’
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심정으로 알테어를 바라보았다가 빠르게 경악했다. 알테어가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던 것이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후다닥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춤 출 거예요?”
“이 녀석들, 원하는 걸 보기 전까지는 절대 안 놔주거든.”
알테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다들 우리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대하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포기하고 적당히 어울려 주면 빨리 벗어날 수 있어.”
다년간의 경험이 느껴지는 듯한 빠른 판단이었다. 알테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 터.
‘그, 그래! 빨리 해치우자!’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건 처음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남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파티는 대체로 불참했고,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파티에서는 구석에 콕 틀어박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으니까. 춤은 레이디의 기본 소양이라 배운 적이 있지만, 그런 춤은 이 자리에 안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니 믿을 구석은 역시 알테어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테어는 매년 사람들 앞에서 춤을 췄던 모양이니…….’
적당히 분위기에 어울리는 춤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거다. 믿을 사람이 있다고, 혼자서 헤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마침 알테어가 손을 내밀어 나는 기꺼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주위에는 이미 흥겨운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알테어는 능숙하게 음악에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잡한 검술도 간단하게 해 내는 사람이라 그런지 춤을 추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뭘 하든 어설픈 나는 그의 움직임을 겨우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뭔가…….’
재미있어! 음악이 흥겨운 덕분일까? 아니면 축제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유쾌한 기운 덕분인가? 이유는 뭐라도 좋았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데 집중하느라 평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온갖 걱정거리들은 저만치 멀어졌다. 나는 신나서 미소 지으며 열심히 알테어의 스텝을 따라 하려고 애썼다. 어설펐지만 아예 못 따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해 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져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알테어의 얼굴에는 드물게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녀석 봐라?’ 하는 느낌의 미소였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비웃다니…… 너무해요.”
부루퉁하게 항의하자 알테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인은 항상 열심히 하지. 알아.”
“그런데 왜 비웃어요?”
“열심히 하는 사람을 비웃은 적은 없어. 단 한 번도.”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가 싶어 뚱하게 알테어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날 바라보는 알테어의 두 눈에 진지함이 가득해서, 차마 거짓말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묘한 열기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순간 몸이 굳었다. 익숙하지 않은 빠른 박자에 맞춰 발을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라도 집중을 놓친 건 치명적이었다.
“앗!”
발이 꼬여 어떻게 대처할 새도 없이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내 몸이 바닥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다. 알테어가 날 단단히 붙잡은 덕분이었다. 알테어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더니 자연스레 그의 품에 폭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그걸 모두 지켜보고 있었는지 주위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미, 민망해!’
모두의 앞에서 실수한 게 부끄러워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동시에 몸이 붕 떠올랐다. 알테어가 나를 안아 올린 것이다.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가 된 탓에 주위의 감탄이 더욱 커졌다. 내가 더욱 민망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태연한 건 알테어뿐이었다.
“이정도 맞춰줬으면 됐지?”
알테어는 나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데 어딜 가시려고요?”
뒤에서 그런 항의가 들려왔지만 알테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항의마저도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알테어의 걸음은 축제가 한창인 호숫가 중심을 벗어나 조용하고 어두운 풀숲에 이르러 멈췄다. 그의 품에서 내려와 멀리 밝은 축제의 광경을 바라보니 내가 조금 전까지 저 안에 있었다는 것도 실감이 안 될 정도였다. 음악 소리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모두 멀리 있었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알테어를 무시무시한 악역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영지를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의 계획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책임감과 함께 뿌듯한 마음이 밀려왔다.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다들 즐거운가 봐요.”
동의를 구하기 위해 알테어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입술에 따뜻한 것이 맞닿았다. 그가 입을 맞춰온 것이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니 입맞춤이 깊어졌다. 거대한 알테어의 무게에 밀려 휘청거리자 그가 허리와 뒤통수를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덕분에 나는 도망칠 수도 없이 온전히 그의 품에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알테어의 기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흐…….”
터져 나온 신음에 알테어가 겨우 나를 놓아주었다.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니 알테어가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서로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입맞춤의 여운에 알테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어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나를 꼭 껴안았다. 알테어의 품은 언제나 따뜻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의 품 안에서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서로를 가득 채운 미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축제…… 더 즐기고 싶어?”
알테어가 느리게 내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의견을 묻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내게는 묘하게 그가 칭얼대는 것처럼 들렸다.
“축제는 이제 막 시작됐잖아요. 영주님이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예요?”
“다들 술과 춤에 푹 빠져서 그런 건 신경도 안 써.”
“그리고 전 아직 조각배도 못 띄웠단 말이에요.”
“나중에 띄우면 돼.”
알테어가 차분하게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내 등 뒤의 끈을 풀어냈다. 나는 스르르 상의가 느슨해지는 감각에 놀라서 알테어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안 돼?”
알테어가 나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어찌나 그 얼굴이 평온한지, 하마터면 내가 큰일도 아닌 걸 문제 삼고 있는 거라고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당연히 안 되죠! 저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는데!”
“하지만…… 다들 이쪽엔 관심도 없는데?”
알테어가 끈을 풀어내려 헐렁해진 상의 덕분에 드러난 쇄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도대체 무슨 용기가 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를 저지하는 게 우선이었다.
“여, 여기서는 절대 안 돼요!”
“그래. ‘여기서’는 안 된다는 거구나.”
알테어는 그게 무슨 문제이겠냐는 듯 평온하게 대꾸하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럼 어디면 괜찮지?”
“그, 그야 우리 침실이라든가…… 어디든 막혀 있는 곳에서…….”
순순히 대답하다 보니 어째 알테어의 기세에 말려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키기엔 늦은 것 같았다. 알테어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멀어지며 씩 웃었다.
“그래. 거기라면 괜찮다는 거지.”
***
“카인 경이 맥주가 가득 담긴 통을 엎어서 한바탕 소란이었죠.”
“그래도 불을 붙인 조각배가 호수를 가득 채운 건 정말 장관이었어요.”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안나와 마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리는 내 머리를 빗어주며, 안나는 어수선한 방을 정리하며 어젯밤 축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나게 조잘대었지만, 나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축제의 극 초반만 즐긴 뒤에 알테어와 둘이 자리를 벗어나서 그, 그런…….’
길었던 어젯밤을 떠올리니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각배를 띄우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건 내년 축제에서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신기했다.
‘내년이라니.’
내가 자연스럽게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니. 에일스포드에 시집와서 남편이 악역 알테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만 해도 미래를 쉽게 그릴 수 없었다. 벌벌 떨면서 당장 오늘을, 또 내일을 어떻게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만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당연하게 내년을 그리고 있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등 뒤에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 선 안나가 내 브래지어를 들고 서 있었다. 어제 입었던 속옷이었다.
‘으, 으아아아!’
어젯밤을 얌전히 침대 위에서만 보낸 게 아니었던 탓에 속옷이 거기에도 널려 있었던 거다. 급속도로 벌게지는 내 얼굴을 보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건지 안나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그, 뭐…… 여기에 있을 수도 있지요…… 네에…….”
허둥대는 안나와 달리 마리는 침착했다.
“오후에 방문객이 예정되어 있으니 구석구석 살펴야겠네요. 또 어디에서 이런 게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
과연 프로 시녀다운 대처였다. 마리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우리는 다행히 오후의 방문객을 맞이하기 전, 의외의 장소에서 속옷을 몇 개 더 발견해 제대로 치울 수 있었다. 속옷이 등장할 때마다 민망해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던 건…… 잊어버리도록 하자. 오후의 방문객은 파벨이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축제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수도로 떠나야 합니다.”
주된 목적은 황제의 실버 쥬빌리를 축하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지만, 수도에서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았다.
‘황제에게 줄 선물은 이미 제작되었고.’
홍보용으로 쓸 마석도 준비했다. 축제를 마무리하고 떠나느라 일정이 빠듯해서 속도를 내야 했기 때문에 인원은 최소한으로 잡았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어쩔 수 없이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처는…….
“바인 후작께서 서신도 보내셨습니다. 이미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으니 편하게 방문해달라고요.”
바인 후작. 익숙한 이름에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파벨은 무덤덤했고, 마리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으며, 사정을 모르는 안나만 신이 나서 들뜬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친정으로 가시는 거군요! 바인 후작가는 엄청나게 부유한 명문가라고 들었는데, 분명 저택도 멋지겠지요?”
“으응…… 멋진 저택이지.”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그 멋진 저택의 주인은…….’
나는 한없이 늘어지려는 어깨에 힘을 주려고 애썼다. 이제 나는 나디아 ‘에일스포드’가 아닌가? 예전처럼 맥없이 숙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내가 우습게 보이면 알테어도, 에일스포드도 전부 우습게 보이는 거야.’
나는 축제에서 환하게 나를 환영해 주던 에일스포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늘 나를 지켜주는 마리와 안나의 모습도,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는 파벨의 모습도 눈에 담았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니까 더 단단해져야지.
‘절대 주눅 들지 않을 거야. 쉽게 고개 숙이지도 않을 거고. 맥없이 굴복하지도 않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치맛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