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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아내가 없으면 무서워서요. (53/170)

74화. 아내가 없으면 무서워서요.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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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2788705.jpg“마님, 곧 도착합니다.”

마리가 속삭이는 소리에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몸이 떨리는 건 마차가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지나치게 좋은 마차는 큰 흔들림 없이 길을 달리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슬쩍 커튼을 걷어 창밖을 바라보니 에일스포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수도였다. 황성이 있는 수도는 제국 모든 것의 정점이다. 부유하고, 화려하고, 활기차고……. 어딜 바라보아도 반짝거리는 멋진 도시였다. 그중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건 역시 황성이지만, 명망 높은 수도 귀족들의 저택도 아주 화려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친정, 바인 후작가의 저택도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달리던 마차가 멈추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니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쉽게 통과되었지만 까다로운 기준을 맞추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사람도 보였다. 거절당한 이들은 금세 목소리를 높여 항의하고, 병사들은 고지식하게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며 팽팽하게 대치하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덕분에 검문을 기다리는 줄은 한없이 느리게 줄어들었다. 황제의 실버 쥬빌리를 기념하여 큰 행사가 열린다는 소문에 전국 각지에서 구경꾼과 장사꾼들이 죄 모여든 것 같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에 온 귀족들도 여럿 있는지 긴 줄 사이사이에는 화려한 마차도 섞여 있었다.

16550932788709.png‘물론 우리처럼 화려한 마차는 없지만…….’

그 화려함이 눈길을 잡아끌었는지 성문 앞에서 검문을 지휘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성큼성큼 우리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16550932788709.png‘아무래도 경비대장인 것 같은데.’

그는 말을 타고 일행을 이끄는 알테어의 무시무시한 얼굴에 놀란 건지 잠시 어깨를 움찔하더니, 곧 헛기침하며 고개를 숙였다.

16550932788719.jpg“경비대장입니다. 혹 어떤 집안에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비범한 마차를 타고 나타났으니 지체 높은 가문의 행렬이라 생각하고 편의를 봐 주려는 듯했다.

16550932788727.png“에일스포드 남작이다.”

16550932788719.jpg“에일스포드 남작이라면…….”

알테어의 대답에 경비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16550932788709.png‘시골 남작가는 경비대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편의를 봐 줄 대상은 아니지.’

경비대장이 우리 앞에 보이는, 그저 그런 귀족들의 마차는 무시하고 우리에게만 말을 건 것을 보면 그가 봐 주려는 ‘편의’가 얼마나 차별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알테어가 콧대 높은 경비대장의 태도에 기분이 상할까 싶어 조심스럽게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어쨌든 나는 바인 후작가의 핏줄이고, 수도에서는 그 이름이 제법 힘이 있으니 부드럽게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경비대장이 활짝 웃으며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16550932788719.jpg“에일스포드 남작님이시군요!”

그 인사에는 묘하게 반가움마저 느껴졌다. 나는 물론이고 당사자인 알테어도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데, 경비대장이 알아서 이야기를 술술 쏟아냈다.

16550932788719.jpg“얼마 전 성문을 통과하신 3황자 전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전하의 지기이니 잘 모시라고요.”

16550932788727.png“……지기?”

알테어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지만, 경비대장은 굽신거리느라 그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16550932788719.jpg“예! 어찌나 강조하시는지…… 남작님은 언제 오시나 제가 매일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경비대장이 파리처럼 분주하게 손을 비비적댔다. 저러다 지문이 전부 닳아서 없어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16550932788709.png‘저 정도면 3황자가 정말로 이야기를 잘해 둔 모양인데.’

‘도대체 왜?’라는 생각과 함께 경계심이 바짝 세워졌다.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호의를 베풀었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16550932788719.jpg“귀한 분이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실 수는 없으시니…… 행선지만 말씀해 주시면 얼른 길을 터 드리겠습니다.”

16550932788727.png“아내의 친정으로 간다. 바인 후작저로.”

16550932788719.jpg“아! 바인 후작가!”

그렇지 않아도 굽신대던 경비대장의 태도가 더욱 공손해졌다. 남작은 황자의 지기에, 남작 부인의 친정은 바인 후작가. 평범한 경비대장으로서는 큰 권력을 마주한 셈이었다.

16550932788709.png‘물론 우리가 양쪽의 권력에 기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비대장은 그것까지는 모를 테니까 말이다. 나와 알테어도 굳이 그 점을 바로잡아 줄 생각은 없었다. 알아서 편의를 봐 준다는데 괜히 거절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16550932788709.png‘긴 여정에 다들 지쳐 있으니 말이야.’

안나는 진즉에 마차 안에서 넋을 놓고 있었고, 힘든 기색을 잘 감추는 마리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다들 빨리 거처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싶을 테다.

16550932788719.jpg“이쪽으로 오시지요. 정문이 아니라 서문을 이용하시면 바인 후작저와 가깝습니다.”

경비대장의 안내에 따라 옆으로 빠지니 훨씬 공기가 한적해졌다. 대기열에 서 있던 몇몇 귀족들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서문을 통해 수도로 들어서자 에일스포드와는 확연히 다른 대도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보았던 풍경이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에일스포드 토박이들의 눈에는 별천지처럼 보였을 거다.

16550932818004.png“와아!”

피곤함에 넋이 나가 있던 안나는 어느새 마차 창문에 바짝 붙어 수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평범한 집과 거리를 보면서도 뭐가 그리 신기한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감탄은 바인 후작가의 입구에 마차가 멈춰 드디어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되었을 즈음 극에 달했다.

16550932818004.png“세상에! 여기가 바인 후작가라고요? 마님의 친정이요?”

안나가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도우며 조심스럽게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저택 구경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에일스포드가 투박하고 거대한 성이라면, 바인 후작가는 섬세하고 화려한 대저택이었다. 오래 관리하지 못해 외간이 많이 상한 에일스포드 성과 달리, 바인 후작가의 저택은 단 한 번도 방치된 적이 없어 매우 반짝거렸다. 겉보기만으로도 이렇게 차이가 나니 정원이나 내관은 더욱 격차가 있을 것이다. 마석 유통 계약을 맺은 돈으로 에일스포드 성을 열심히 정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 역사를 거쳐 세심하게 관리되어 온 바인 저택과는 비교하기가 힘들었다.

16550932818004.png“왜 이런 곳을 떠나서 에일스포드에 오신 거예요!”

안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삭였다. 자기였다면 절대로 이런 멋진 저택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나? 흥분해서 콧김을 씩씩 내뿜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형제자매가 없지만, 만약 막내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그에 비해 마리는 언니 같았고 말이다. 내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알테어도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리며 저택을 살피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선 알테어는 생각과 기분을 알 수 없이 무덤덤해 보였다. 다른 에일스포드 사람들과 달리 이 거대한 저택에 전혀 압도되지 않은 듯했다.

16550932788709.png‘역시 알테어야.’

대범한 남편의 모습에 괜히 내가 뿌듯해져서 미소를 짓고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16550932788705.jpg“아이고, 내 조카가 왔구나!”

숙부의 등장이었다.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나의 숙부, 아바르 바인은 여전했다. 갈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40대 후반의 남성은 누가 봐도 두툼한 체격이었다. 원래도 풍채가 좋은 편이었는데, 후작이 된 후로 호의호식하다 보니 더욱 몸집이 커졌다. 그의 옆에는 늘 화려한 멜리사도 함께였다.

16550932788705.jpg“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좋구나, 나디아!”

숙부가 덥석 내 두 손을 붙잡으며 밝게 인사했다. 누가 봐도 조카를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16550932788709.png‘물론 속마음은 그러지 않으실 테지만.’

16550932788709.png“저, 저도 오랜만에 뵈어서 좋아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자 숙부의 관심은 빠르게 내 옆의 알테어로 넘어갔다. 처음부터 내가 아니라 이쪽이 더 신경 쓰였을 거다. 주변의 눈을 의식해서 내게 먼저 인사한 것뿐일 테지.

16550932788705.jpg“조카사위를 이렇게 만나는군!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숙부가 이번에는 알테어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호탕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등 뒤를 힐끗대는 것이, 우리가 타고 온 마차며 말을 품평하고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마차를 본 숙부의 눈동자가 순간 욕심으로 반짝이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건 아주 찰나여서, 웬만한 사람은 눈치채기 힘든 변화였다.

16550932846795.png“오시길 기다렸어요, 남작님!”

내게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던 멜리사는 아예 알테어 쪽으로 몸을 틀어 그에게 반짝이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마리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댔지만,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는 애였다면 이렇게 대놓고 무례하게 굴진 않았을 거다. 그나마 외부인의 눈치를 보는 건 숙부 쪽이었다. 그가 헛기침하며 멜리사의 앞을 가로막아 알테어에게 말했다.

16550932788705.jpg“이리 세워둘 게 아니라 어서 방으로 안내해야겠지. 온다는 소식에 저택에서 제일 좋은 방을 준비해 두었다네. 그 뒤에는 만찬도 즐겨야 하고. 응?”

16550932788727.png“호의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아내가 결혼 전에 쓰던 방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16550932788705.jpg“으, 으응? 저희라니…… 설마 나디아와 같은 방을 쓰겠다고?”

16550932788727.png“예. 동부에서는 부부가 침실을 같이 씁니다.”

알테어의 말에 숙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932788705.jpg“게, 게다가 나디아가 결혼 전에 쓰던 방이라니…….”

16550932788727.png“예. 아무래도 아내는 그게 편할 테니까요. 익숙한 공간을 두고 굳이 다른 방을 쓸 필요가 없지요. 저도 그거면 충분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래 시집간 딸들이 친정에 오면 원래 자기가 쓰던 방을 쓰곤 하니까.

16550932788709.png‘하지만 내 방은…….’

평범한 귀족 영애의 방이 아니었다.

16550932788709.png‘숙부가 작위를 물려받은 후 원래 쓰던 방에서 쫓겨났었지.’

당연히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좋은 방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녀들이 쓰는 방과 가까워서 어둡고 눅눅했다. 가구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었다.

16550932788705.jpg“그, 동부에서 부부가 침실을 함께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여긴 조금 달라서 방을 따로 쓴다네. 나디아는 예전에 쓰던 방을 쓰고, 자네는 내가 준비한 방을…….”

숙부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으며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알테어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16550932788727.png“저도 낯선 곳에 온 터라 혼자 방을 쓰기가 무서워서요.”

16550932788705.jpg“호, 혼자 방을 쓰는 게 무섭다고?”

16550932788727.png“예. 너무 무서워서, 꼭 아내와 같은 방을 쓰고 싶습니다. 의지가 될 것 같군요.”

알테어가 정말이지 하나도 안 무서워하는 얼굴로 무섭다는 말을 반복했다. 큰 키에 체격 좋은 남자가 어린애처럼 혼자 자는 게 무섭다는 말을 하는데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황당해서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16550932788727.png“혼자 자다가 악몽을 꾸면 누가 절 달래주겠습니까. 아내뿐이지요.”

16550932788709.png‘악몽은 무슨…….’

남의 꿈에 쳐들어가서 악몽에 시달리게 만드는 거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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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숙부를 보니 틀어진 계획을 어떻게 수습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눈치였다. 결국 그가 백기를 들었다.

16550932788705.jpg“알겠네. 자네가 무섭다니…… 그리해야지.”

16550932846795.png“아버지.”

긍정의 말에 놀라 멜리사가 숙부의 팔을 잡아당겼다. 눈치 없는 그 애도 ‘그 방’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숙부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16550932788705.jpg“가자, 나디아. 네 방으로 안내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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