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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전부 가져갈게. (54/170)

75화. 전부 가져갈게.2022.02.20.

숙부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 태연하게 나와 알테어를 방으로 안내했다.

16550932971163.jpg“여기가 나디아의 방이었다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방은 채광이 완벽해서 한낮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생화로 장식된 덕분에 좋은 향기가 가득했고 내부를 채운 가구며 소품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쓰던 방이 아니지만, 이곳이 어떤 방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16550932971168.png‘……여긴 멜리사 방인데.’

알테어 앞에서 날 소중한 조카라며 떠들고 다닌 모양이니 진짜 내가 쓰던 방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저택 내에서 내 또래 숙녀의 취향대로 잘 꾸며진 방은 멜리사의 방 하나뿐일 테니 숙부가 궁여지책을 낸 모양이었다.

16550932971168.png‘뭐, 멜리사가 내 방을 빼앗아 가기 전까진 내가 쓰긴 했으니까…….’

‘나디아의 방이었다’는 숙부의 말은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졸지에 방을 빼앗긴 멜리사는 뚱한 얼굴로 연신 숙부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지만, 숙부는 그런 멜리사의 항의를 싹 무시했다.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한 뒤 멜리사를 달랠 작정인 듯했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번듯한 방을 둘러보던 알테어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32971175.png“신기하군요. 나디아는 에일스포드로 시집간 지 오래되었는데, 이 방은 조금 전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사람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 방에는 한기가 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방은 따뜻한 온기와 사람 냄새가 묻어나 있으니 누가 봐도 오래 비워둔 방이 아니다. 하지만 뻔한 상황에서도 숙부는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16550932971163.jpg“언제든 나디아가 다시 쓸 수 있도록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었다네. 실버 쥬빌리를 맞아 수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며칠은 더욱 열심히 정리했지. 모두 마음 쓴 덕분이라네.”

16550932971175.png“그렇습니까.”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걸으며 방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본이 되는 침실은 물론이고 방과 연결되는 욕실, 드레스룸, 정원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테라스까지 딸린 커다란 방은 단순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이런 양식의 방을 처음 보았을 안나는 입을 떡 벌린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 바빴다. 선이 굵고 투박한 멋이 살아 있는 에일스포드와 달리 바인 저택은 어딜 둘러봐도 섬세하고 화려하니 보는 맛이 있었을 거다. 게다가 멜리사가 사 모은 옷이며 장신구, 화장품들이 화장대와 드레스룸에 잔뜩 널려 있어서 입을 떡 벌린 안나의 턱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에 비해 무덤덤한 얼굴로 방을 모두 살핀 알테어가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는 숙부를 향해 물었다.

16550932971175.png“이게 전부 아내가 쓰던 것들입니까?”

멜리사의 취향에 맞춘 옷과 장신구들은 매우 화려했다. 당연하게도 값비싼 사치품들이었다. 내가 평소에 쓰는 물건들과 완전히 결이 다르다는 걸 당연히 알아차린 알테어가 숙부를 떠보자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32971163.jpg“그렇다네.”

16550932971175.png“아내가 에일스포드에 왔을 때 짐이 매우 단출하기에 소박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 수도에서는 그리 지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16550932971163.jpg“그야…… 수도에서는 풍족하게 지냈지. 하지만 에일스포드는 사정이 많이 다르지 않나. 거긴 매일 파티가 열리지도 않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을 날도 많지 않다고 들어서 이 아이가 간소하게 간 게지.”

웃는 얼굴로 대꾸했지만 결국 ‘에일스포드는 깡촌인데 이런 귀한 것들이 필요하기나 하냐?’는 공격이었다. 과연 수도 귀족답게 혀에 칼을 심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알테어가 기분이 상했을 것 같아서 걱정스럽게 고개를 돌렸으나,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알테어는 건수를 제대로 잡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평소에는 잘 짓지도 않는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16550932971175.png“예전에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내 덕분에 에일스포드의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이런 귀한 것들이 자주 필요할 것 같으니, 여기 온 김에 전부 챙겨 가겠습니다.”

16550932971163.jpg“……뭐?”

16550932971175.png“다 가져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있는 걸 전부 다.”

알테어의 선언에 숙부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떡 벌렸고, 멜리사도 그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이 방에 널린 귀한 옷과 장신구, 화장품의 주인인 멜리사였다.

16550932994175.png“아, 아버지……!”

멜리사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숙부의 옆구리를 마구 찔러댔지만, 능청스럽게 상황을 잘 모면하던 능구렁이 후작은 말문이 턱 막혀버린 건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숙부 스스로 이곳이 ‘나디아의 방’이라고 했고, 이 방에 있는 게 전부 내 물건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했으니, 주인이 그걸 가져가겠다는데 막을 명분이 없지 않은가?

16550932971163.jpg“그…… 이건 후작가의 재산이기도 하고…….”

16550932971175.png“설마…… 아까우십니까?”

알테어가 어떻게든 상황을 막아보려는 숙부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16550932971175.png“뭐. 그럴 리가 없겠죠. 바인 후작께서 조카의 사, 소, 한 소지품이 아까워서 가져가는 걸 막다니…… 다른 귀족들이 전부 비웃을 겁니다.”

이건 바인 후작의 평판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며 사실은 ‘못 가져가게 막으면 귀족들에게 네 쪼잔함을 전부 소문내겠다!’는 협박을 하는 거다. 수도의 능구렁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능청스러운 숙부가 그런 속뜻을 못 알아차릴 리는 없다.

16550932971163.jpg“그럴 리가 있겠나. 자기 물건을 가져가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지.”

16550932994175.png“아버지!”

바인 후작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멜리사는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알테어가 그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안나와 마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16550932971175.png“여기에 있는 장신구를 전부 챙겨둬라. 귀한 물건이니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겠지.”

16550932971163.jpg“네. 알겠습니다.”

상황을 알아챈 마리가 빠르게 대답하고 장신구를 챙기기 시작했고, 멀뚱멀뚱 눈을 껌뻑이던 안나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뒤 얼른 마리를 도왔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16550932971168.png‘진짜 악당다운 강탈인데…….’

그 악당이 내 편이니 매우 든든했다. 미묘한 심정으로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의 눈빛이 마치 ‘나 잘했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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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리사는 상황을 돌이키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는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쿵쿵대며 몸을 돌려 사라졌고, 숙부는 처음의 여유로운 미소를 잃은 채 이를 바드득 갈았다. 숙부의 매서운 눈빛이 나를 향해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처럼 마냥 그가 무섭지는 않았다.

16550932971168.png‘그건 아마 든든한 아군이 있어서가 아닐까?’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

16550932994175.png“아버지! 정말로 그걸 전부 내어주실 거예요? 제 방은 또 어쩌고요?”

멜리사가 후작의 방에 찾아와 울상을 지었다. 기분 좋게 알테어를 기다리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갑자기 방을 내어주게 된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열심히 모은 귀한 옷이며 장신구들도 전부 나디아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그중에는 원래 나디아의 것도 섞여 있었지만, 그 사실은 멜리사의 안중에 없었다. 이미 제 손에 들어왔으면 제 것이다. 옛 주인의 권리 따위 알 게 뭔가?

16550932994175.png“저는 싫어요! 걔한테 절대 못 줘요!”

멜리사는 평소처럼 징징대며 바인 후작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기꺼이 제 편을 들어 나디아가 손에 쥔 것을 빼앗아 줬을 후작이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16550932971163.jpg“조용히 좀 하거라.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너까지 두통을 더할 거냐?”

16550932994175.png“그, 그렇지만…….”

멜리사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주저앉듯 의자에 풀썩 자리를 잡았다. 훌쩍대는 딸의 모습에 바인 후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32971163.jpg“조금만 참아라. 어차피 저 기세도 오래 못 가. 전부 가져가라고 해. 어차피 그 녀석의 것도 우리 것이 될 테니까.”

16550932994175.png“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신만만한 바인 후작의 태도에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빼앗긴 거면 빼앗긴 거지. 결국 우리 것이 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껌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모습에 바인 후작이 쯧쯧 혀를 찼다.

16550932971163.jpg“이 녀석아, 잘 생각해 봐라. 에일스포드 남작이 뭐 때문에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는지.”

16550932994175.png“그거야…… 후계자가 필요하다면서요.”

에일스포드 남작은 추남에다 고자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런 자가 후계자를 얻겠다고 부인을 들이는 게 우스워서 크게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16550932971163.jpg“그래. 남작은 후계자가 절실히 필요해. 예전에는 지킬 게 작위뿐이었지만, 이제는 부유함도 갖췄으니 후계자가 없으면 엉뚱한 놈에게 제가 일군 것이 전부 넘어간단 말이다.”

16550932994175.png“그거야 그렇겠죠. 근데 그게 왜요?”

16550932971163.jpg“왜냐니. 당연히 나디아 그 계집애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던 바인 후작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멜리사가 어서 말해 달라며 눈을 껌뻑이자, 잠시 고민하던 바인 후작이 말을 고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0932971163.jpg“나디아 그 계집애는 남작이 원하는 걸 줄 수 없다. 그러니 네가 남작이 원하는 걸 주면 돼. 그럼 모두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그 말이야.”

16550932994175.png“……그게 무슨 말인데요? 지금 저랑 수수께끼 놀이라도 하시는 거예요?”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후작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0932971163.jpg“어휴. 내가 너한테 무슨 설명을 하겠느냐. 그냥 너는 이것만 확실히 알면 된다. 이 혼처는 나디아 그 계집애에게 과분한 자리였어. 내가 미처 그걸 몰랐지.”

후작이 입맛을 다시며 제 딸을 바라보았다.

16550932971163.jpg“걱정 마라. 나디아 그 계집애가 가진 건 전부 네 것이니까. 내가 이 말을 어긴 적이 있더냐?”

멜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제 아버지는 항상 약속을 지켰다. 그녀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레이디라는 칭호도, 부유하고 명성 높은 가문도,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도. 아버지는 모두 제 손에 쥐여 줬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신뢰로 가득 찬 딸의 눈빛에 후작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16550932971163.jpg“여긴 우리의 홈그라운드야.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그놈, 에일스포드 남작도 내 손바닥 안이다.”

  ***

16550932971163.jpg“정말 통쾌했어요!”

마리가 드물게 키득거리며 내게 장신구로 가득 찬 보석함을 보여주었다. 멜리사가 어찌나 많은 장신구를 사 모았는지, 이것과 비슷한 크기의 보석함이 몇 개나 더 가득 찼다. 모두 아름다웠지만 이걸 즐겁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16550932971168.png“마리. 원래 내 것이었던 장신구만 골라서 분류하고, 나머지는 수도를 떠나기 전에 처분하자.”

16550932971163.jpg“처분하면 본래의 값은 못 받습니다.”

16550932971168.png“응. 그래도 멜리사가 쓰던 걸 가져가긴 싫어.”

단호하게 대답하자 마리가 그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32971163.jpg“예. 딜리온에게 연락할까요?”

딜리온이라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사정이 궁핍했을 때 내 장신구를 처분해 줬던 화가다.

16550932971168.png“음…… 이번에도 날 도와줄지 모르겠네.”

16550932971163.jpg“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16550932971168.png“전에 알테어가 반지 때문에 조금 오해해서…… 딜리온에게 검을 들이대면서 추궁했던 거 같아.”

알테어와는 제대로 대화했지만, 이후에 그가 딜리온을 찾아가 협박하며 추궁한 걸 사과하진 않았을 거 같았다.

16550932971163.jpg“그런 거라면 제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6550932971168.png“응. 마리의 이야기라면 딜리온도 들어주겠지.”

마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긋 웃더니 곧 주위를 살피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16550932971163.jpg“여기에 머무르시는 동안에는 음식을 조심하셔야 해요.”

16550932971168.png“음식?”

16550932971163.jpg“네. 먹고 마시는 건 뭐든요.”

16550932971168.png“왜?”

16550932971163.jpg“마님의 건강이 걱정이라고 영주님이 난리를 치셔서, 의사 선생님이 약을 지어주셨거든요. 이게 까다로운 약이라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한대요.”

16550932971168.png“그렇구나…….”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조합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니까, 약을 먹는 동안 음식을 조심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마리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마리의 얼굴에서 힌트를 찾아내기도 전에 욕실의 문이 열리고, 목욕을 막 마친 상태로 가운만 입은 알테어가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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