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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55/170)

76화.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2022.02.23.

마리는 요령 좋게 인사하고 자리를 피했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 알테어의 목욕 시중을 들어야 했지만, 그는 원체 거슬리는 걸 싫어해서 뭐든 혼자 하는 걸 선호했다. 타인의 시중을 받으며 느긋하게 기다리느니 내 손으로 다 하고 만다는 성미였다.

16550933162163.jpg“낯선 곳에 와서 무섭다더니…….”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욕실로 들어가더니 말을 타고 오느라 뒤집어쓴 먼지를 씻어내고 가운까지 찾아 걸치는 건 또 뭐람. 숙부 앞에서 뻔뻔하게 헛소리했던 걸 떠올리니 황당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16550933162168.jpg“뭐가 그렇게 재밌어?”

알테어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물었다. 정말로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지. 계속 모르쇠 하려는 작정인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가늘게 뜨니 알테어가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16550933162163.jpg‘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알테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딱히 뭘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 의도를 알아챈 건지 그가 자연스럽게 내게 수건을 건네며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건네받은 수건으로 알테어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하자, 내가 움직이기 쉽도록 그가 허리를 굽혀 자세를 낮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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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3162163.jpg“내가 쓰던 방이 아닌 걸 알았죠?”

16550933162168.jpg“모르는 게 이상하지.”

16550933162163.jpg“멜리사 방이에요.”

16550933162168.jpg“그것도 알았어. 들어오자마자 그 여자가 쓰는 향수 냄새가 났으니까.”

그랬던가? 내가 전혀 몰랐던 걸 보면 아마 후각이 예민한 알테어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16550933162163.jpg“한때 제가 쓰던 적도 있긴 했는데…….”

이미 멜리사의 취향대로 바뀌어 버린 방에서는 내가 사용하던 시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렇게 달라진 건 이 방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숙부가 바인 후작가를 장악한 후 저택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능력한 선대의 흔적을 지워야 후작가가 앞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따른 결과였다.

16550933162163.jpg“참. 장신구는 처분해서 돈으로 바꾸려고요.”

16550933162168.jpg“그 건은 내게 굳이 알릴 필요 없어. 어차피 네 것이잖아.”

16550933162163.jpg“하지만 알테어 덕분에 얻게 된 건데…….”

16550933162168.jpg“그런 식으로 계산하려면 난 네게 마석 광산을 줘야 해.”

16550933162163.jpg“그, 그거랑은 다르죠!”

16550933162168.jpg“뭐가 달라? 그것도 네 덕분에 얻게 된 건데.”

알테어가 제 머리를 말려주던 내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16550933162168.jpg“날 아내의 친정 재산에 손대는 쪼잔한 놈으로 만들 셈은 아니겠지. 여기서 얻은 건 전부 네 거야.”

이건 흔히 말하는 아내의 친정 재산이라고 하긴 힘든 경우다. 하지만 알테어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해주니 ‘그래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16550933162163.jpg‘흔히 말하는 발 뻗어도 되는 자리라는 거지.’

알테어가 정말 개의치 않을 것을 알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거다.

16550933162163.jpg“……고마워요.”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다시 손에 들어와 더욱 기뻤다. 고맙고 벅차오르는 기분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를 정도였다. 알테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16550933162168.jpg“겨우 이걸로 이런 반응이면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

16550933162163.jpg“앞으로요?”

16550933162168.jpg“뭐……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두루뭉술하게 흘려 넘기려는 알테어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지난 사건이 떠올랐다. 알테어가 발하일을 처리하기 위해 나 몰래 계획을 세웠던 날의 기억이었다.

16550933162163.jpg“또 나만 모르는 계획이 있는 거죠?”

16550933162168.jpg“…….”

‘또’라는 말을 강조하며 묻자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내가 말하고 싶은 지난 계획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16550933162168.jpg“……아직 확실하지 않아.”

알테어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곤혹스러운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6550933162168.jpg“내 의심만으로 일을 키우기엔 무리가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줬으면 해.”

가감 없이 상황을 전하려 노력하는 알테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16550933162163.jpg‘게다가 알테어의 기분도 알 것 같아.’

나 역시 알테어에게 알리지 않고 그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직 확실한 정황을 알게 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가 마음 쓰며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알테어도 나처럼 그런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된다.

16550933162163.jpg“응. 기다릴게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알테어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알테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팔을 뻗어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서 어깨를 움찔하자 그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16550933162168.jpg“언제까지 화들짝 놀랄 셈이야?”

16550933162163.jpg“도무지 안 익숙해지는 걸 어떡해요…….”

아무리 가까워졌어도 알테어와 마주하는 건 언제나 떨렸다. 예전처럼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건 아니었지만, 그를 바라볼 때면 가슴이 쿵쿵 뛰고 긴장이 되어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질까 하는 상상도 해 보았지만, 마리나 안나를 대할 때처럼 그를 편하게 대하는 건…… 정말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상상을 하느라 알테어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더니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덕분에 그를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돌리려는데, 그보다 먼저 알테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어-’ 하고 당황하는 사이 알테어의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하듯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16550933162168.jpg“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 이래도 좋다는 거 아냐?”

16550933162163.jpg“전 알테어가 제 얼굴을 빤히 봐도 안 그러는데요…….”

16550933162168.jpg“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면 앞으론 너도 그렇게 해.”

알테어가 뻔뻔하게 제안했다. 언뜻 듣기에는 매우 공평한 해결책 같았지만, 미묘하게 내가 손해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16550933162163.jpg‘하지만 뭐 어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항상 공평할 필요도, 손해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16550933162163.jpg‘그래도 마냥 손해만 보는 건 싫으니까, 언젠가는 나도!’

뭔가 알테어가 부글부글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면 심술 맞은 걸까? 그런 내 속셈을 어떻게 알아챈 건지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16550933162168.jpg“이상한 생각 중이지?”

16550933162163.jpg“아, 아닌데요?”

16550933162168.jpg“아니긴. 얼굴에서 다 티가 난다고.”

정말인가 싶어 얼굴을 만지작대니 어째서인지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16550933162168.jpg“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해. 황제를 알현하는 것 외에 정해진 일정은 없으니까, 수도 생활을 즐기면 돼.”

16550933162163.jpg“수도 생활……이요.”

16550933162168.jpg“그래. 오랜만에 왔으니까 쇼핑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싶지 않나?”

신나게 쇼핑하는 나. 즐겁게 친구와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나. 정말이지 어색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16550933162163.jpg‘그, 그러고 보니 알테어는 내가 극단적으로 소심하게 처박혀 살았다는 걸 모르지.’

에일스포드로 시집을 간 이후에는 어떻게든 쓸모를 증명해 알테어의 눈에 들기 위해서 이래저래 활발히 움직였으니, 그는 여기에서의 내 모습을 상상도 못 할 거다.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대자 알테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33162168.jpg“왜? 다른 계획이 있었어?”

16550933162163.jpg“아니에요! 해야죠, 쇼, 쇼핑! 친구도 만나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테어의 눈에 방 안에만 처박혀서 소심하게만 지냈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도움이 되는 아내’ 이미지를 얻었는데, 예전 모습을 들키는 순간 그런 이미지도 물거품이 될 테지.

16550933162163.jpg‘하지만 친구가 없는데.’

친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다.

16550933162163.jpg‘그렇다면 당장 가능한 건…….’

쇼핑! 나는 빠르게 결론 내리고 알테어에게 선언했다.

16550933162163.jpg“내일 쇼핑하러 가겠어요!”

  *** 그리하여 다음 날.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수도 제일의 번화가의 엄청난 활기가 온몸을 덮쳐 소심함에 몸이 양초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옆에서 들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대는 안나를 보고 있자니 그런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치마 아래로 덜덜 떨리는 다리를 겨우 수습해 길을 걷기 시작했다.

16550933162163.jpg‘예습은 철저히 했어.’

지도를 몇 번이나 보며 주요 상점의 위치를 파악해 뒀으니 완전히 초보처럼 보이지는 않을 거다.

16550933162163.jpg‘게다가 이건 단순한 쇼핑이 아냐. 수도의 유행을 파악하는 중요한 임무라고.’

마석을 활용한 다양한 세공품을 만들기로 계획했으니 시장 조사는 필수다.

16550933162163.jpg‘그리고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의 이름으로 잔뜩 물건을 살 거야.’

소문은 거리의 장사꾼들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수도에서 명성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을 공략하는 것이니 상점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잔뜩 산다면 빠르게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다.

16550933162163.jpg‘물론 이것도 자금 여력이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방법이지.’

다행히 에일스포드는 자금이 충분했다.

16550933162163.jpg‘어디부터 가야 할까.’

실용적이지 않은 물건을 사들일수록 유명세는 더욱 빠르게 퍼지니까…….

16550933162163.jpg‘그런 면에서는 예술품이 제격이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거리를 살피며 미술상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목적한 곳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가게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계를 파는 가게였다. 나는 홀린 듯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독으로 세워두는 거대한 시계부터 휴대할 수 있는 작은 회중시계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내 눈길을 잡아끈 건 회중시계였다.

16550933162163.jpg‘이런 시계는 남자들의 사치품이지.’

화려하게 꾸밀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귀부인들과 달리 신사들은 과시할 수 있는 소품이 한정적이라 회중시계에 힘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자리에서 괜히 시간을 확인한다며 회중시계를 꺼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식이었다. 알테어도 곧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궁 파티에 참석하게 될 테니, 많은 귀족 신사들 사이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멋진 시계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내가 유심히 회중시계를 바라보고 있으니 점원이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 손님이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졌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16550933230902.jpg“회중시계를 찾으십니까? 이쪽으로 오시면 더 많은 물건이 있습니다.”

능숙한 점원은 빠르게 판단을 끝내고 활짝 웃으며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렇게 환영받는 걸 보니 그럴듯한 옷차림이며 시녀를 대동한 것을 보고 제법 돈이 있는 손님이라 판단한 듯했다.

16550933230902.jpg“연인에게 선물하실 건가요?”

16550933162163.jpg“아…… 남편에게 선물할까 하는데.”

틀린 말도 아닌데 ‘남편’이라는 말을 내뱉는 게 괜히 민망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16550933230902.jpg“아이고, 귀부인이셨군요. 너무 어려 보이셔서 결혼하신 줄 몰랐습니다.”

점원은 넉살 좋게 웃으며 손님이 좋아할 만한 달콤한 말과 함께 회중시계 몇 개를 꺼내왔다.

16550933230902.jpg“요즘 신사분들께서 많이 찾으시는 시계들입니다.”

확실히 바깥쪽에 진열되어 있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섬세해 보였지만, 딱 이거다 싶은 물건은 없었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열심히 시계에 대해 설명하던 점원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16550933230902.jpg“혹시 남편분께서 어떤 스타일이실까요? 알려주시면 제가 잘 어울릴 만한 거로 추천해드리겠습니다.”

16550933162163.jpg“어…… 내 남편은…….”

나는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알테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며 스타일을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알테어 에일스포드는 단 몇 마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쉽게 말을 고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명쾌한 답을 내려 주었다.

16550933244716.jpg“남작은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지만, 섬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치밀한 사람이기도 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오르카 황자가 빙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16550933244716.jpg“내 말이 틀리지 않았겠지요, 남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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