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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사자가 아니라 쥐새끼. (56/170)

77화. 사자가 아니라 쥐새끼.2022.02.27.

165509333079.png“어떻게 여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오르카 황자라는 걸 밝혀도 되는 건가 싶어 얼버무리며 인사를 건넸더니 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33307907.jpg“난 수도에 도착한 지 꽤 됐습니다. 지금 번화가를 돌아다니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165509333079.png“네. 수도에 도착하신 건 알고 있었어요. 급히 저희 영지를 떠나기도 하셨고, 또 수도 검문을 통과할 때 전하께서 미리 경비대에 언질 주셨던 것도 들었습니다. 덕분에 편히 통과했어요.”

16550933307907.jpg“아. 경비대장이 도움을 주던가요?”

오르카가 활짝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쩐지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다는, 감히 악당 황자와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다행히 이성이 제대로 일을 한 덕분에 의식의 흐름에 따라 칭찬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165509333079.png“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16550933307907.jpg“에일스포드에서는 내가 신세를 졌으니 보답한 거죠. 게다가 남작 부인은 내 유일한 팬이니 더 신경 써야지요.”

165509333079.png“어, 그, 네에…… 영광입니다…….”

아무래도 ‘오르카 황자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미지는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대화가 더 이어진다면 ‘열렬한 팬’으로서 오르카 황자를 찬양해야 할까? 역시 그게 자연스럽겠지? 그렇다면 뭘 찬양하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감사하게도 점원이 얼른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16550933307939.jpg“오셨습니까, 전하.”

점원도 제대로 인사를 하는 걸 보니 황자라는 정체를 숨기고 놀러 나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16550933307939.jpg“수리 맡기신 시계를 찾으러 오신 거지요?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점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뒷공간으로 들어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은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어느새 하얀 장갑까지 낀 점원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든 상자만큼이나 고급스러운 회중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16550933307939.jpg“마석을 교체했으니 이제 문제없을 겁니다.”

점원이 가리키는 부분에 아주 작은 마석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는 것이 누가 보아도 에너지가 가득 찬 모양새였다.

165509333079.png‘하지만 그리 좋은 마석은 아닌 것 같아.’

물론 황자의 시계에 박아 넣은 마석이니 아예 하급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상품인 에일스포드의 마석만 계속 보아온 내 눈에는 차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고스란히 느낀 건지 오르카 황자가 시계를 받아 품 안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33307907.jpg“에일스포드 산 마석처럼 좋은 물건은 드뭅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수도에 유통되기도 전이니, 이 정도의 마석을 구해 넣은 것만으로도 수리공은 힘을 낸 거지요.”

165509333079.png“저는 아무 말도…….”

점원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16550933307939.jpg“저희가 구할 수 있는 최상급 마석이었는데요. 에일스포드 산 마석이라는 건 이보다 더 상등품이란 말씀이십니까?”

16550933307907.jpg“그래. 내가 직접 보았지. 동부 제국령에서 새로운 마석 광산이 발견됐다는 소리는 자네도 들었을 텐데?”

16550933307939.jpg“예. 소문이야 무성했지요. 아! 그럼 설마…….”

오르카 황자의 확답에 그렇지 않아도 크게 뜨였던 점원의 눈이 더 커졌다. 그는 점원의 그런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게 발언권을 넘겼다.

16550933307907.jpg“관심 있다면 이쪽의 귀부인과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겠군. 마석 광산의 주인인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시거든.”

16550933307939.jpg“마석 광산의 주인!”

펄쩍 뛰는 점원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16550933307939.jpg“어휴, 제가 귀한 손님을 몰라 뵙고 실례할 뻔했습니다. 이런 허름한 시계를 보여드렸다니……!”

원래도 정중했던 점원은 더욱 예의 바르게 굽신대며 처음 내게 보여주었던 회중시계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165509333079.png‘저것들도 충분히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물론 오르카 황자가 수리를 맡겼던 시계와 비교하면 모자란 부분이 많아 보였지만……. 점원이 서둘러 금고를 열어 내어온 시계들은 오르카 황자의 것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전체적으로 검은색으로 마감된 회중시계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165509333079.png‘알테어의 머리가 검은색이라서 그런가?’

조금 유치한 이유이긴 하지만, 금색이나 은색보다는 어두운 무광의 검은색 시계가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옮겨놓은 듯한 상판과 내부의 장치가 바쁘게 돌아가는 모양이 고스란히 보이는 부분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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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3307939.jpg“이걸로 하시겠습니까?”

내 눈길이 한곳에 오래 머무른다는 걸 알아챈 점원이 요령 좋게 물었다. 옆에서 오르카 황자도 몇 마디를 거들었다.

16550933307907.jpg“좋은 시계입니다. 장인이 섬세하게 신경 쓴 부분이 느껴지는군요.”

황자까지 추천할 정도라면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165509333079.png“이걸로 하지.”

16550933307939.jpg“좋은 결정이십니다.”

점원이 웃으며 가격표를 보여주었다. 예상했던 가격대라 큰 무리는 없었다.

165509333079.png“대금은 바인 후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에일스포드 남작 앞으로 달아줘.”

16550933307939.jpg“바인 후작가…… 아아 부인께서 바인 가문 분이셨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일부러 ‘바인 후작가’라는 말을 강조했더니 역시나 점원이 그 점에 반응했다. 수도에서 바인 후작가의 명성은 견고하니,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이용할 생각이었다.

16550933307939.jpg“지금 바로 가져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댁으로 보내드릴까요?”

165509333079.png“선물이니 직접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

16550933307939.jpg“예. 그럼 얼른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흥정도 없이 바로 구입을 결정한 덕분인지 점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뒷공간으로 사라졌다. 뭔가 하나를 해낸 기분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옆에 서 있던 오르카 황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상당히 미묘했다.

16550933307907.jpg“일부러 바인 후작의 이름을 언급한 겁니까?”

165509333079.png‘윽. 후작가의 명성을 쉽게 이용하려는 게 너무 티 났나……?’

나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흘리며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165509333079.png“지금 후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16550933307907.jpg“하하. 그렇죠. 상당히 피곤하시겠군요. 부인의 사촌이 만만찮은 사람이던데요.”

165509333079.png“아.”

그러고 보니 오르카 황자가 멜리사와 함께 수도로 갔었지. 무슨 사건이 있었던 건가 싶어 오르카 황자를 바라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33307907.jpg“레이디를 험담하는 건 신사의 덕목이 아닌지라.”

결국 험담할 만한 짓을 하긴 했다는 소리다.

165509333079.png‘어쩜 이렇게 우아하게 상대를 비난하지.’

이런 화술은 배울 만했다.

16550933307939.jpg“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부인.”

내가 감탄하는 사이 점원이 정성껏 포장된 시계를 건네주었다. 선물도 샀으니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오르카 황자와 느긋하게 대화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고.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으로서 마구 돈을 쓰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르카 황자가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16550933307907.jpg“자, 다음은 어디로 갈 겁니까?”

마치 우리가 처음부터 일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물음이었다. *** 나디아가 쇼핑을 해야 한다며 바인 저택을 나선 뒤, 알테어는 홀로 바인 저택을 산책하고 있었다. 물론 산책을 빙자한 탐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기사답지 않게 가벼운 태도로 길게 하품하고 있는 카인이 함께였다. 알테어 혼자만 복도를 걸어 다녔다면 다들 놀라서 하얗게 질렸을 텐데, 카인의 허술한 행색 덕분에 두 사람이 저택을 돌아다녀도 사용인들은 크게 경계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허술하게 보이는 모습과 달리 카인이 작게 속닥대는 이야기는 날카로웠다.

16550933407757.png“저택 내에 특별히 이상한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목숨을 노릴 생각으로 저택에 초대한 건 아닌 모양입니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알테어는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16550933407762.png“내 목숨을 노리진 않을 거다. 내가 죽으면 후작이 탐내는 재산은 얼굴도 모르는 후계자에게 넘어가 버리니까. 만약 노린다면…….”

나디아 쪽이겠지. 알테어는 굳이 불길한 말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인도 분명히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의문도 가진 채였다.

16550933407757.png“마님께서 세상을 떠나면 에일스포드와 바인의 관계도 완전히 끝이잖습니까. 그럼 에일스포드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무슨 소용이지요? 차라리 마님을 잘 구슬려서 친정에 재산을 빼돌리게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바인 후작이 나디아를 어떤 식으로 대해왔는지 잘 모르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테어는 블란을 통해 바인 후작가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다. 나디아와 후작의 관계가 어떤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나디아의 체면과 관련된 문제이니 여럿에게 떠들 문제는 아니었다. 알테어는 카인에게 길게 설명하는 대신 후작이 진짜 생각하고 있을 만한 계획을 슬쩍 흘려주었다.

16550933407762.png“바인 후작에겐 딸이 하나 더 있어.”

16550933407757.png“엑.”

카인이 작게 속삭이고 있던 것도 잊고 크게 괴상한 소리를 냈다.

16550933407757.png“그 이상한 여자요? 설마…… 마님을 처리하고 그 여자를 밀어 넣을 생각이라고요?”

16550933407762.png“아마도.”

16550933407757.png“에엑. 조카사위를 사위로 만든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16550933407762.png“귀족들은 가문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해.”

카인은 기사이지만, 알테어는 귀족이다. 귀족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재산과 작위를 엉뚱한 놈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머리를 굴리는 게 아주 중요했다. 따지고 보면, 알테어 역시 그런 사태를 막으려고 급히 결혼한 것 아닌가?

16550933407762.png“그러니 나디아 주변의 경계를 늦추지 마라. 외출할 때도 잊지 않고 호위는 붙였겠지?”

16550933407757.png“예. 신신당부하셨잖습니까. 셋이나 붙여놨습니다.”

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0933407757.png“이렇게 걱정하실 거면 바인 후작의 초대를 거절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깔끔한데요.”

16550933407762.png“사자를 잡으려면 사자 우리로 들어가야지.”

바인 후작가는 녹록한 가문이 아니었다. 제대로 꼬리를 잡으려면 내부에 침투하는 게 필요했다.

16550933407757.png“그 말대로라면 바인 후작이 사자고, 바인 후작저가 사자 우리라는 건데……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카인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알테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자 카인이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바인 후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6550933407757.png“바인 후작은 쥐새끼면 족하고, 바인 후작저는 쥐굴이면 되겠네요. 보십시오. 지금도 저희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리에 쥐새끼처럼 쪼르르 달려온 거 아닙니까.”

카인의 속삭임이 끝나기 무섭게 바인 후작이 목소리를 높여 반가운 척 알테어에게 다가왔다.

16550933307907.jpg“아이고,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여독은 좀 풀렸는가?”

16550933407762.png“예. 신경 써 주신 덕분에.”

16550933307907.jpg“그럼 오늘은 제대로 된 만찬을 대접해야겠군. 바인의 정찬은 아주 훌륭하거든.”

16550933407762.png“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16550933307907.jpg“초대라니. 그리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네. 참, 자네의 소문을 듣고 인사를 하고 싶다는 사람도 아주 많다네. 이곳에 인맥이 별로 없을 테니 내가 소개해 주고 싶은데…….”

알테어를 배려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겠다는 의도였다.

16550933407762.png“감사합니다.”

알테어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바인 후작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미소는 아주 잠시뿐이었다.

16550933407762.png“하지만 미리 서신으로 잡아 둔 약속이 많아서요. 따로 시간을 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16550933307907.jpg“서신……? 자네는 수도 귀족을 잘 모르지 않나. 시작점이 아주 중요해. 한 번 잘못 엮이면 그 뒤가 아주 힘들어져. 도대체 누구와 약속을 했단 말인가?”

16550933407762.png“비오스케스 공작과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16550933307907.jpg“비, 비오스케스?!”

비오스케스 공작이라면 황제의 장인이다. 아무리 바인 후작이라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진짜 수도 귀족인 것이다. 알테어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33407762.png“혹시 후작께서 보시기에 그분이 인맥의 시작점으로 부적합한가요. 조언하신다면 기꺼이 듣겠습니다.”

16550933307907.jpg“그, 그럴 리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말게.”

혹시라도 공작을 험담했다는 소문이 퍼질까 걱정됐는지 후작이 재빨리 부정했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카인이 입 모양으로 ‘쥐새끼’라고 말하며 혀를 찼고, 알테어도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물론 적의를 곧장 드러낼 타이밍은 아니었다.

16550933407762.png“사실 후작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따로 있습니다.”

16550933307907.jpg“오. 그게 뭔가?”

쪼그라들었던 후작이 ‘부탁’이라는 말에 반색하자 알테어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16550933407762.png“선대 후작 부부의 묘에 꽃을 놓아드리고 싶습니다. 아내의 부모님께 인사는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대 후작 부부의 묘’라는 말에 반색하던 후작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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