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게으른 소망. (57/170)

78화. 게으른 소망.202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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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바인 후작은 언제 이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웃는 낯으로 돌아와 친근하게 알테어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테어의 키가 한참이나 더 커서 팔을 쭉 뻗는 바람에 자세가 상당히 어정쩡했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1655093355044.jpg“물론이지. 돌아가셨지만 장인, 장모이니 자네도 인사를 올려야지. 내가 바로 안내하겠네.”

후작은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 당장 앞장서서 알테어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뒤를 따르던 사용인에게 눈짓해서 지시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묘지로 갈 테니 그사이에 정돈해 두라는 신호였다.

1655093355044.jpg‘저놈이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작은 제 시선을 받은 사용인이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며 뒤이어 알테어에게도 밑밥을 깔았다.

1655093355044.jpg“묘지에 가서 확인하면 자네도 알겠지만, 다소 정돈이 안 되어 있는 상태라네. 너무 놀라지는 않았으면 해.”

16550933550452.png“가족묘는 가문의 묘지기가 관리할 텐데요. 왜 정돈이 안 되어 있죠?”

1655093355044.jpg“그게 말일세.”

후작이 말하기도 낯부끄럽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며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더니 알테어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1655093355044.jpg“돌아가신 형님, 그러니까, 선대 후작께서 가문을 거의 말아먹을 뻔하셨거든. 그걸 이 가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다들 대우가 박해진 게지. 피를 나눈 형님이니 차마 말하기 힘들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나.”

방치되어 관리되지 않은 묘지에 대한 핑계를 선대로 돌리려는 것이다.

1655093355044.jpg“이제 자네도 가족이 되었으니 감출 것도 없겠지. 돌아가신 형님 부부가 가당찮은 사업에 투자하고 정신없이 도박에 몰두하는 바람에…… 내가 작위를 물려받고 겨우 상황을 바로잡은 걸세.”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지만, 사실 후작은 난처하고 난감해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남자 구워삶는 재주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던 나디아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저택에 도착한 이후 남작이 계속 나디아를 싸고돌고 있었다. 거기다 남작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난처한 부분을 찌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소심해서 남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붙일 거라 생각했던 나디아인데. 설마 그녀가 이곳에서 받은 취급을 남작에게 줄줄 털어놓았다면……. 후작이 세운 원대한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터였다. 그는 나디아를 몹쓸 계집애로 만들고, 남작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그의 재산을 꿀꺽해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후작이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알테어의 반응은 매우 가벼웠다.

16550933550452.png“예. 나디아도 그런 일이 있었다며 말해주더군요.”

1655093355044.jpg“그, 그래? 나디아가 말을 했단 말이야?”

1655093355044.jpg‘이놈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길 들은 거야?’

‘설마!’ 하는 마음에 후작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내려앉았으나, 다행히도 알테어의 시선에 그를 향한 적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16550933550452.png“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조카를 버리지 않고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나디아와 혼인할 수도 있었던 거겠지요.”

1655093355044.jpg“으, 으응…… 그렇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적의는커녕 호의마저 느껴지는 태도에 후작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어지는 알테어의 이야기에 눈을 번쩍 떴다.

16550933550452.png“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결혼을 올릴 때 제대로 된 혼납금을 못 드린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디아에겐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 제가 얻은 과수원을 후작께 넘길까 생각 중입니다.”

1655093355044.jpg“과수원? 설마 그, 황제께 진상하는 과일을 재배하는…….”

16550933550452.png“아. 알고 계시는군요.”

모를 리가 없다.

1655093355044.jpg‘거기가 얼마나 알짜인데!’

후작은 자애로운 숙부의 얼굴로 웃고 있던 것도 잊고 탐욕으로 눈을 빛냈다가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1655093355044.jpg“커흠!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래야 자네의 마음이 편하다면야…….”

씰룩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는 후작을 보며 카인은 어이없다는 듯 알테어를 힐끗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이상한 후작에게 귀한 땅을 넘긴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50933570882.png‘뭐…… 언제는 제대로 이해했나.’

알테어의 지시는 항상 불친절해서 일이 돌아가는 사정도 모른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렇게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일이 마무리되어있곤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카인은 묵묵히 알테어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16550933550452.png“받아 주신다면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와서 절차에 관해 이야기 나눠 보지요.”

1655093355044.jpg“그래, 그래! 어서 참배부터 하자고!”

미적대며 걸음을 뭉개던 후작의 발이 빨라졌다. 육중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는 후작의 뒤를 따르는 알테어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리는 걸 보며 카인이 질린다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16550933570882.png‘아무튼 우리 영주님은 음험해.’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거지만. 서둘러서, 그러나 결코 다급해 보이지 않는 걸음으로 알테어를 따르는 카인의 입가에도 어느새 제 주군과 비슷한 미소가 슬쩍 걸려 있었다. ***

16550933591021.png‘뭐가 이렇게…….’

나는 눈을 껌뻑이며 옆에서 걷고 있는 오르카 황자를 힐끗댔다. 그의 행동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처음부터 약속하고 만난 일행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지나치게 당당한 그 태도 때문인지 나를 수행하던 마리와 안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 채 난처하게 수군대고 있었고, 오르카 황자를 수행하는 사람도…….

16550933591021.png‘어라?’

당연한 듯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어졌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오르카 황자를 수행하는 부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중을 드는 하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흔한 호위 하나 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게 이상했다. 눈에 띄게 두리번거리는 내 행동을 눈치챈 오르카 황자가 불쑥 물었다.

1655093355044.jpg“뭘 찾습니까?”

16550933591021.png“전하의 호위나 수행원이 안 보여서요.”

1655093355044.jpg“아. 호위나 수행원이 필요한가요?”

16550933591021.png“필요하다기보다는…….”

그냥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오르카가 웃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1655093355044.jpg“보세요. 내게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밖으로 나설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바탕 난리가 나는 형님들과는 다르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황족의 특권이라고나 할까요.”

알려지지 않은 황족.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는 황족.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웃었지만 묘하게 자기 비하가 들어간 말처럼 느껴졌다.

16550933591021.png‘하지만 난…….’

16550933591021.png“정말로 부럽네요.”

황족의 권리는 적당히 누리면서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니!

16550933591021.png‘물론 야심가인 오르카 황자의 성에는 안 차겠지만.’

오르카 황자는 내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는 웃느라 휘어진 눈에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1655093355044.jpg“부러운가요?”

16550933591021.png“네. 그런 거 아세요? ‘엄청난 부자지만 사람들이 아무도 날 몰랐으면 좋겠어!’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많거든요.”

당연히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16550933591021.png“권리가 주는 안락함을 누리면서, 권리에 따르는 관심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1655093355044.jpg“글쎄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오르카 황자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33591021.png‘그럴 만하지.’

16550933591021.png“전하께선 뭐든 열심히 하시니까요. 그런 적당한 상태는 이해하기 힘드시겠죠.”

원래 악당들은 다들 부지런하지 않은가. 부지런하게 음모를 꾸미면서 큰 꿈을 실현하려는 사람 입장에선 ‘엄청난 부자지만 사람들이 아무도 날 몰랐으면 좋겠어!’ 같은 게으른 소망을 이해하기 힘들 거다.

16550933591021.png‘게다가 오르카가 어디 보통 악당이야?’

스케일 크게 제국 전체를 뒤집어 버리는 열정적인 악당이다. 스스로 납득하고 오르카를 바라보니 그는 더욱 묘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실수한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1655093355044.jpg“내내 요양이나 다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열심히 한다는 말은…… 그리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16550933591021.png‘헉.’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가 뒤에서 얼마나 바쁘게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오르카 황자가 너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긴장이 풀어져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16550933591021.png“패……팬의 입장에서는 뭐든 열심히 하시는 것처럼 보여요! 멀리 요양을 다니시는 것도 건강을 회복하려는 멋진 노력이 아니겠어요? 하하핫…….”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열렬한 팬 행세를 하자 오르카 황자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그의 얼굴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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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355044.jpg“이렇게 든든한 팬을 둬서 행운이로군요. 보답으로 오늘 제대로 에스코트하지요. 남작 부인이 뭘 하려는 건지는 알 것 같으니. 에일스포드의 이름을 수도에 각인시키려는 거겠죠?”

오르카 황자가 정확히 나의 목적을 언급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지만…….

1655093355044.jpg“그럴 거면 수도에서 가장 입이 가벼운 상인을 찾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 곳 돌아다닐 필요 없어요. 소문내기엔 그게 제격이죠.”

16550933591021.png‘여, 여러 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소심한 내게는 너무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 알테어는 후작과 대화를 마친 뒤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16550933550452.png‘원하는 건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후작을 방심하게 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며 그를 띄워주느라 기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체력에는 자신 있는 알테어지만 이런 감정적 소모는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방에 돌아가면 나디아가 있을 거다. 편한 사람을 만나 꾸며진 얼굴을 벗어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숨통이 조금 트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알테어의 기대와 달리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텅 빈 방을 바라보다, 이른 오전부터 나디아가 ‘번화가에 다녀올게요! 쇼핑하러요!’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섰던 걸 떠올렸다.

16550933550452.png‘하지만 벌써 시간이…….’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16550933550452.png‘너무 늦는군.’

불만인지 걱정인지 스스로도 알아채기 힘든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니 창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다리에 쪽지를 매달고 있는 걸 보니 전령새였다. 창문을 열어 다리에 달린 쪽지를 풀어내자 겉면에 에일스포드의 기사들이 쓰는 비밀 문양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카인이 나디아에게 붙였다는 기사들이 전령새를 보낸 모양이었다.

16550933550452.png‘쇼핑하러 간 사람을 따라갔는데 전령새까지 보낼 일이 있다고?’

기사들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전령새까지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알테어는 걱정으로 머릿속이 훅 물드는 것을 느끼며 다소 급한 손길로 돌돌 말린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와그작 구겨버렸다. [오르카 황자. 마님에게 접근. 함께 이동. 수상한 가게. 진입. 따라가기 힘듦.] 짧은 단어로 나열된 정보 끝에 수상한 가게로 짐작되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16550933550452.png‘나디아가 그 수상한 놈이랑 함께…….’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 알테어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 쪽지를 마구 구기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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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문으로 걸어 나간 게 아니라 창문에서 뛰어내려 땅으로 툭 떨어지는 알테어의 모습에 기겁한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알테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목적지까지 향하는 가장 빠른 루트를 그리고 있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쪽지에 적힌 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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