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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내가 전부 사겠어. (58/170)

79화. 내가 전부 사겠어.2022.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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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카 황자는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거리로 나를 안내했다. 걸음이 익숙한 걸 보니 그가 자주 방문하는 상점인 것 같았다.

16550933737645.png‘수도의 좋은 상점은 모두 번화가에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약간의 의심을 안고 오르카의 뒤를 따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어둡고 고요한 분위기가 꼭 비밀스러우면서도 위험한 공간으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16550933737645.png‘게다가 길잡이가 악당 오르카 황자고…….’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온 건 아닐까 싶어 뒤늦은 후회를 하는 그 순간. 간판도 없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펼쳐지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16550933737645.png“와아…….”

조금 전까지 어두운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쏟아지며 거대한 화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가 상점인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화원은 마치 거대한 유리 온실을 도시 속에 옮겨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유명하고 수입이 좋은 상점이라도 이렇게 거대한 공간을 번화가에 차지하긴 어려웠을 터. 어째서 굽이굽이 골목을 돌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감탄하며 꽃을 구경하고 있으니 오르카 황자가 입을 열었다.

16550933737659.jpg“저택을 장식할 꽃을 고르는 건 수도 귀부인들의 우아한 취미지요. 레이디에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하려는 신사들도 좋은 손님이고.”

확실히 그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생전에 어머니께서도 직접 저택을 장식할 꽃을 사러 자주 외출하곤 하셨다. 특히 저택에서 가벼운 티타임이나 만찬 파티를 여는 날이면 더욱 신경 써서 생화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16550933737645.png‘물론 나는 손님들이 오면 후다닥 방에 틀어박혔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생전의 어머니처럼 우아한 차림의 귀부인들이 많이 보였다.

16550933737659.jpg“수도의 내로라하는 가문의 저택에는 모두 이 화원에서 온 꽃이 장식되어 있답니다. 황궁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이 화원은…… 여러모로 귀한 손님들을 단골로 두고 있는 곳이죠.”

말하자면, 이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면 금세 수도의 내로라하는 가문에 이름을 알릴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오르카 황자를 바라보았다.

16550933737645.png‘꽃을 소문의 시작점으로 잡다니.’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다. 단순히 재력을 선보이면 금세 수도에 소문이 돌 테니 비싼 예술품을 사 모으는 게 좋겠다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16550933737645.png‘이게 바로 소설을 씹어 먹은 악당의 계략……!’

무척이나 우아하고 세련된 계략이라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16550933737659.jpg“자, 받으세요.”

오르카 황자는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분홍색 장미꽃 한 송이를 자연스럽게 내게 건네며 빙긋 웃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거절할 타이밍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눈을 껌뻑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33737659.jpg“계산은 제대로 할 겁니다.”

16550933737645.png“아뇨. 그걸 걱정한 게 아니라…….”

16550933737659.jpg“그럼 문제없군요.”

오르카 황자가 씩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16550933737659.jpg“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리시안서스로 저택을 장식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특히 노란색의 골드 리시안서스는 아주 귀해서 금보다 비싸다고 하지요. 한 송이가 100골드니까…… 상당한 가격입니다.”

평범한 꽃은 1골드에 수십 송이를 살 수 있는데, 한 송이에 100골드라니. 놀라운 마음과 함께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6550933737645.png‘바인 후작저에도 곳곳에 리시안서스가 장식되어 있었어.’

숙부나 멜리사가 어울리지 않게 우아한 꽃을 장식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요즘 수도의 유행이었던 모양이다.

16550933737645.png‘하지만 노란색 리시안서스는 없었어.’

재빨리 화원을 둘러보았지만, 내부를 가득 채운 수많은 꽃 사이에서 노란색 리시안서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직원으로 보이는 자가 눈치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16550933763153.jpg“특별히 원하는 꽃이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은 내가 아닌 오르카 황자를 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신사가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예의이지만, 오르카는 황자이니 예외였다. 오히려 그는 내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었다.

16550933737645.png‘아무래도 오르카 황자를 못 알아본 것 같아.’

번화가에서도 그랬다.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오르카 황자는 익숙하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소처럼 웃는 낯으로 대화에 나섰다.

16550933737659.jpg“골드 리시안서스를 찾고 있지.”

16550933763153.jpg“골드 리시안서스는…….”

싹싹하게 고개를 숙이던 직원이 재빨리 오르카와 나의 차림을 살폈다. 금보다 귀한 꽃이라더니, 우리가 자금 여력이 되는 걸까 가늠해 보려는 것 같았다.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들의 당연한 습성이었다. 다행히 그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16550933763153.jpg“그 꽃은 특별 온실에 있습니다. 사장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셔야 하고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남자의 안내에 따라 화원의 조금 더 깊은 곳으로 향하자 꽃으로 장식한 아치가 나타났다. 그 너머에 노란 리시안서스로 가득 찬 작은 유리 온실이 보였다.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이미 유리 온실 안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 모양인지 양쪽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온실의 문을 열고 등장하니 두 사람은 새로운 방문객에는 관심도 없이 저들끼리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다.

16550933763153.jpg“난 일리안 후작이다! 고작 이 꽃을 못 가져간단 말이냐?”

16550933763153.jpg“대가를 치르시면 당연히 괜찮지요.”

16550933763153.jpg“그러니 어음을 준다고 했잖아.”

16550933763153.jpg“후작님. 아무리 일리안 후작께서 발행하신 거라도 3년 후를 지급 기한으로 하는 어음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16550933763153.jpg“어허! 이건 실버 쥬빌리 때 폐하께 바칠 꽃이야! 자네도 그런 영광된 일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지 않았나?”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일리안 후작이 실버 쥬빌리를 맞아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노란 리시안서스를 사려는데, 터무니없는 지급 기한이 적힌 어음을 주려고 한 모양이었다. 지체 높은 귀족들이 힘없는 상인들을 털어먹을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돈의 가치는 갈수록 상승하는데, 어음에 따른 대금 지급은 액면가로만 하게 되니 늦게 돈을 받는 자의 손해였다. 그러니 상인의 처지에서는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16550933763153.jpg“물론 그런 영광된 일에 함께할 수 있다면 기쁠 겁니다. 하지만 대금은 정당하게 지급하셔야…….”

16550933763153.jpg“뭐? 내가 정당하지 않게 억지를 쓴다는 건가?!”

꼬투리를 잡은 후작이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16550933737645.png‘누가 봐도 억지를 쓰는 중인 거 맞잖아…….’

하지만 사장은 귀한 후작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였다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쫓아내기라도 했을 텐데. 후작은 귀족 중에서도 매우 지체 높은 귀족에 속했다. 상인은 이를 바드득 갈면서도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16550933763153.jpg“후작님. 저도 아주 곤란합니다. 후작님을 믿고 각지에서 비싼 골드 리시안서스를 모아왔는데, 대금을 지급하지 않으시면 전 파산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게 골드 리시안서스를 판 다른 화원들도 돈을 못 받으면 줄줄이 파산이고요.”

16550933763153.jpg“흥. 누가 안 준다고 했나? 3년 후에 준다고 하잖아!”

상인은 후작의 생떼에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넋이 나간 듯했다.

16550933737645.png‘너, 너무 하잖아!’

이렇게 억지를 쓰다니!

16550933737645.png“그만 하세요!”

어처구니없는 후작의 행동에 발끈해서 나서자마자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 시선을 받자마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16550933737645.png‘후작이 너무 얄미워서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어…….’

소심한 나까지 발끈하게 만들었으니 후작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나섰으니 소심함을 핑계로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50번쯤 하고 태연한 척 턱을 치켜들었다.

16550933737645.png“후작께서 사려던 골드 리시안서스, 내가 사지요.”

16550933763153.jpg“……예?”

16550933763153.jpg“……뭐?”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상인과 후작이 동시에 얼이 빠져 눈을 껌뻑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쪽은 상황이 좀 더 절박한 상인이었다.

16550933763153.jpg“후작께서 이 온실에 있는 골드 리시안서스를 모두 주문하셨습니다. 시세보다 더 쳐주시겠다는 말에 전 제국 각지에서 웃돈을 주고 물량을 구했고요. 이걸…… 전부 가능하시겠습니까?”

상인이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온실을 가득 채운 꽃의 수량과 내가 지닌 예산을 가늠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은 돈을 허공에 날리려고 나온 거다. 이걸 명성과 맞바꾸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니 정당한 교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원한 나의 반응에 상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후작은 그 반대였고 말이다.

16550933763153.jpg“내가 예약한 꽃을 가로채려고 하다니. 어느 가문의 누구…….”

후작이 눈을 부라리며 날 노려보다가 옆에 선 오르카 황자를 발견하고 입을 떡 벌렸다. 후작쯤 되니 아무리 인지도 낮은 황자라도 알아볼 수밖에는 없겠지.

16550933763153.jpg“어, 그, 어어…….”

당황해서 버벅대던 후작이 뒤로 물러나며 헛기침했다.

16550933763153.jpg“갑자기 배가…… 급한 일이…… 다음에 이야기하세!”

후작이 상인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갑작스러운 후작의 태도 변화에 상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16550933763153.jpg“도대체 어떤 가문분이시기에 후작께서 저러십니까? 이렇게 젊은 고위 귀족 부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는데…… 어떤 가문의 부부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덩달아 깍듯해진 상인이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부라는 터무니없는 오해에 나는 놀라서 손을 내저었지만, 스스로 부정하기도 전에 뒤에서 거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16550933839555.png“부부는 이쪽.”

익숙한 향기와 목소리였다.

16550933839555.png“저쪽은 남남.”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존재의 등장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알테어가 평소처럼 차가운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16550933737645.png“어, 어떻게 여기 있어요?”

16550933839555.png“……지나가다가.”

16550933737645.png“네? 여길 지나가다가 왔다고요?”

16550933737645.png‘어째 평소보다 뚱한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놀라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나를 살피던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16550933839555.png“그 꽃은…….”

오르카 황자에게 얼떨결에 받은 장미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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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꽃에 대해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알테어가 내 손에서 장미를 빼앗듯 가져가더니 상인을 향해 말했다.

16550933839555.png“내 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골드 리시안서스는 내가 전부 사겠다.”

16550933763153.jpg“어어…….”

상인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어차피 ‘에일스포드’의 명성을 얻기 위한 일이라 내가 사든 알테어가 사든 큰 차이는 없었다.

16550933737645.png‘애초에 알테어가 꽃을 가로채는 것도 이상해.’

하지만 알테어라면 늘 행동에 이유가 있으니까. 허락의 의미로 상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니 복잡한 상황이 해결되어 기쁜지 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16550933763153.jpg“아이구. 그러믄요. 전부 다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대금은 어떻게…….”

16550933839555.png“수도의 중앙은행에 찾아가면 바로 내어줄 거다.”

알테어는 품에서 수표책을 꺼내 그 자리에서 가볍게 서명하여 상인에게 내밀었다. 금액 부분은 비어 있었다.

16550933763153.jpg“배, 백지수표!”

16550933839555.png“앞으로의 거래도 생각한다면 금액은…….”

16550933763153.jpg“무, 물론 합리적인 대금을 청구할 겁니다!”

상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표에 서명된 이름을 읽어 내려갔다.

16550933763153.jpg“알테어 에일스포드 남작…….”

유명하지 않은 이름에 고작 남작이라는 작위를 확인하고 상인의 얼굴에 약간의 불안이 스쳤지만 알테어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16550933839555.png“불안하다면 대금을 확인한 뒤에 꽃을 가져가겠다.”

16550933763153.jpg“관대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대금을 확인하면 바로 꽃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작님께서도 폐하께 꽃을 바치려고 하십니까?”

16550933839555.png“아니. 내 아내에게.”

16550933763153.jpg“……예? 이 많은 골드 리시안서스를 전부 다요?”

16550933839555.png“그래. 전부.”

알테어는 대수롭지 않게 온실 안의 골드 리시안서스를 한 다발 꺾었다.

16550933839555.png“오늘은 이 한 다발만 먼저 가져가지.”

꽃다발은 바로 내 품에 안겼다.

16550933737645.png“어어…….”

갑작스러운 선물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오르카를 향해 분홍 장미를 흔들어 보였다.

16550933839555.png“이건 제가 잘 받겠습니다. 제가 분홍색을 좋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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