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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사교계 데뷔! (59/170)

80화. 사교계 데뷔!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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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일스포드 남작이 아내에게 선물하려고 골드 리시안서스를 죄다 사들였다!’ 다음 날이 되자 수도 전체에 그런 소식이 퍼져 나갔다. 백지수표를 받은 화원의 상인이 제게 거금을 내놓은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곳곳에 수소문하며 다닌 덕분인 듯했다. 지금까지는 소문에 밝은 사람들만 마석 광산이 발견되어 단번에 부자가 된 시골 남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소문에 어두운 사람까지 모두 ‘에일스포드 남작’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았다.

16550933979599.png‘오르카 황자의 생각이 맞았던 거지.’

많은 귀족을 거래처로 둔 화원의 상인 덕분에 이처럼 빠르게 이름을 알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귀한 골드 리시안서스를 고작 아내에게 선물하겠단 이유로 모두 쓸어 담은 알테어의 행동도 소문이 빨리 퍼지는 데 일조했다. 아무리 재산이 넘쳐나도 그런 식으로 시원하게 돈을 쓰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원래 흔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야 소문이 크게 퍼지는 법이다. 그에 대한 반사작용인지 바인 후작가에는 매일 같이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신사들은 알테어에게, 숙녀들은 내게 초대장을 보내 친분을 쌓길 원했다. 숙부나 멜리사를 통해서도 은근슬쩍 이야기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다는 귀족들에게서 온 초대도 있었지만 알테어와 상의 끝에 모두 거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알테어는 이번 시즌을 계기로 수도 사교계에 데뷔하게 된다. 보통 수도의 중앙 귀족들이 성년이 되자마자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을 생각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데뷔였다.

16550933979599.png‘뭐든 처음은 중요해.’

사교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건 황제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작은 모임에 자주 참석해서 이미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큰 행사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편이 더 효과가 크니까 말이다. 물론 시끄러운 파티에 참석해 식은땀이나 주르륵 흘리며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은 나의 소심함과 복잡한 걸 싫어하는 알테어의 성향도 한몫했다.

16550933979599.png‘휴. 알테어가 사교적인 타입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사교적인 남편을 따라 온갖 파티에 참석하는 삶은 도무지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16550933979599.png‘뭐…… 알테어는 지나치게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소심한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사교계에서의 명성과 영향력을 고민하는 처지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채워야 할 부분이 생기면, 조금이라도 그쪽에 능력 있는 사람이 그 영역을 메우기 마련인데, 알테어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무심하다 보니 ‘사교계 관리’ 항목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된 셈이다. 반쯤 등을 떠밀려 하게 된 일인데, 아내의 역할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내게 주어진 상황을 조금씩 헤쳐나가다 보니 나의 소심한 면모에도 서서히 면역이 생기는 것 같았다. 화원에서 억지를 부리는 후작을 막아선 것도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했을 일이다.

16550933979599.png‘속으로만 어쩌면 좋으냐고 발을 동동 굴렀겠지.’

그런데 이제는 나도 모르게 그런 상황에 끼어들 정도다.

16550933979599.png‘그건 아마 든든한 아군이 생겨서가 아닐까?’

물론 그 아군이 생각지도 못한 일로 날 놀라게 할 때도 무척이나 많지만 말이다. 나는 방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노란색 리시안서스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유리 온실에서 봤을 때도 많은 줄은 알았지만 새삼 놀라웠다. 커다란 방이 리시안서스로 가득 차다 못해 복도까지 점령한 걸 보니 ‘혹시 이건 벌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문도 제대로 닫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입을 떡 벌린 채로 이 사태의 원흉을 바라보았다. 알테어는 방을 가득 채운 꽃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16550933979599.png“이걸 전부 여기에 둘 순 없을 것 같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 머리맡의 협탁에 둔 화병을 가리켰다.

16550933979599.png“난 저 꽃이면 충분하거든요.”

화병에는 알테어가 그날 유리 온실에서 직접 꺾어준 골드 리시안서스 한 다발이 꽂혀 있었다.

16550933979633.png“그날 리시안서스를 전부 사려고 했었잖아. 원래 쓰려던 곳에 쓰면 돼.”

16550933979599.png“그땐 황제 폐하께 진상할 생각이었어요. 원래 꽃을 사려던 후작이 그랬던 것처럼요.”

내 생각을 듣고 알테어가 곤란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황제에게 진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그도 잘 알기 때문일 터였다. 에일스포드 남작이 아내에게 골드 리시안서스를 모두 선물했다는 걸 수도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데, 그걸 다시 갖다 바치는 건 황제를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6550933979599.png‘황제는 한 번 입은 옷도 절대로 다시 입지 않는 사람이야.’

누군가의 선물이었던 걸 다시 선물로 받으면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여겨 오히려 분노를 품을 게 분명했다.

16550933979599.png“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인데, 초대해 준 귀족들에게 거절하는 답장을 쓰면서 리시안서스 꽃다발을 같이 보내려고요.”

16550933979633.png“귀족들에게?”

16550933979599.png“네. 우린 수도에 막 발을 들인 사교계 신입이니 거절도 잘해야죠. 만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에 남편이 선물한 귀한 꽃을 나눠준다고 하면 다들 기뻐할 거예요.”

평범한 꽃을 받았어도 마음이 풀릴 텐데, 그게 귀한 골드 리시안서스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16550933979599.png“물론 알테어가 허락해 준다면요.”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재빨리 말을 덧붙이자 알테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33979633.png“이미 네게 준 거니까, 어디에 쓰든 난 괜찮아.”

16550933979599.png“좋아요. 허락까지 받았으니 마리와 안나를 불러서 꽃을 나눠야겠네요.”

두 사람은 저택으로 들어오는 골드 리시안서스를 보고 웅성대는 사용인들이 꽃에 접근할 수 없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사용인들의 눈빛에 나와 함께 그들의 구박을 잔뜩 받았던 마리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개운한 얼굴이었다.

16550933979599.png‘내가 미안해할까 봐 말은 안 해도 나랑 같이 구박당하던 시절에 아주 힘들었을 거야.’

이런 걸로 마리의 힘들었던 시절을 보상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골드 리시안서스의 습격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소란스러운 복도를 바라보고 있으니 의문이 번뜩 떠올랐다.

16550933979599.png“참, 그런데 그날 화원에는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그날 너무 정신없이 일이 흘러가서 알테어에게 상황을 제대로 묻지 못했다.

16550933979599.png“우연히 지나가다 거기서 만났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런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고요.”

내 경고에 무어라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알테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아마 ‘우연히 지나가다가’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려고 했던 모양이다.

16550933979633.png“수도의 치안이 어느 정도로 안전한지 확신할 수 없어서 호위를 붙였어. 그들이 말하길, 네가 수상한 곳으로 들어갔다기에…….”

누가 날 따라오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다. 평범한 내가 고도로 훈련받은 기사들의 움직임을 못 알아채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16550933979599.png“수도의 치안은 확실해요. 아무래도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곳이니까요.”

16550933979633.png“난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건 믿지 않는 주의라.”

알테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33979633.png“그러는 넌 어쩌다 황자와 동행하게 된 거지?”

16550933979599.png“아 그건 시계를…….”

자연스럽게 이유를 말하려다가 알테어에게 주려고 산 회중시계를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선물을 건네는 게 뭔가 어색해서 조금씩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내가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알테어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뭔가 나쁜 일이라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알테어의 오해가 더 길어지기 전에 얼른 선물을 건네줘야 할 것 같았다.

16550933979599.png‘어쨌든 알테어가 나한테 꽃을 선물했으니까, 그 보답이라고 하면 되겠지?’

마침 꽃 선물이 쉬지 않고 들어오는 중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알테어가 내게 꽃을 선물하지 않았다면, 무슨 핑계로 시계를 줘야 하나 고민만 하다 결국 서랍 속에 넣어두기만 했을 것이다.

16550933979599.png“주, 줄 게 있어요!”

나는 어색함에 삐걱대며 꽃병을 놓아둔 협탁의 작은 서랍을 열었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디자인의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어 얼른 집어 들고 다시 알테어 앞으로 오니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살피고 있었다.

16550933979599.png“이거요! 알테어 주려고 산 거예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알테어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건지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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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3979599.png“왜, 왜 안 받아요…….”

민망함에 항의하자 겨우 정신을 차린 알테어가 상자를 받아주었다.

16550933979633.png“……날 주려고 산 거라고?”

16550933979599.png“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혹시 별로면 교환해도 돼요!”

16550933979633.png“교환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알테어가 짧게 거절하고 상자를 열었다. 그 손길이 다소 허둥대는 것처럼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새 선물의 정체를 확인한 알테어가 눈을 크게 떴다.

16550933979633.png“회중시계로군.”

16550933979599.png“네! 수도의 신사들은 다들 멋진 회중시계를 가지고 다니거든요. 알테어도 이제 사교계에 나가게 될 테니까 하나쯤은 좋은 걸로 지니면 좋을 것 같았어요.”

16550933979633.png“…….”

알테어는 말없이 시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더욱 초조해져서 이게 얼마나 좋은 선물인지를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를 덧붙였다.

16550933979599.png“이건 상인이 평소에는 진열도 안 하는 귀한 시계였어요. 뒤에서 슬쩍 꺼내오더라니까요? 게다가 이건 검은색이잖아요. 보자마자 딱 알테어 거라고 생각했어요. 검은색은 알테어니까요.”

16550933979633.png“검은색은 나라니. 그게 무슨 논리야.”

알테어가 구구절절한 내 이야기를 들으며 픽 웃음을 흘렸다.

16550933979633.png“뭐…… 분홍색은 너라고 생각하는 나와 비슷한 건가.”

16550933979599.png“검은색 머리도, 분홍색 머리도…… 전부 흔하진 않으니까요.”

머리색으로 상대가 각인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누군가 입은 검은색 옷만 보아도 자연스럽게 알테어를 떠올리곤 했으니 말이다.

16550933979599.png‘그럼 알테어도 분홍색을 볼 때마다 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낯간지러웠다.

16550933979633.png“그거 알아?”

어느새 살짝 달아오른 뺨을 애써 진정시키려는데 알테어가 물었다.

16550933979633.png“네가 나한테 뭘 주는 건 처음이야.”

16550933979599.png“어어…… 그랬어요?”

16550933979633.png“그래. 샌드위치도 기사 놈들한테만 만들어 줬잖아. 티타임 초대장도 그렇고.”

샌드위치라니? 티타임 초대장이라니?

16550933979599.png‘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게다가 알테어가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16550933979599.png“아, 앞으로 많이 줄게요!”

나만 알테어에게 이것저것 받고 있었다니! 미안함에 서둘러 사과하자 잠시 침묵하던 알테어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0933979633.png“아니. 생각해보니 넌 이미 내게 많은 걸 주고 있었던 거 같군.”

16550933979599.png‘내가? 뭘?’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뻑이는 날 보며 알테어가 가볍게 내 머리를 헤집었다. 처음에는 왜 이러는 건가, 내 머리가 헤집기 좋아 보이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테어가 이러는 이유를 안다. 그는 뭔가 민망하고 쑥스러울 때 괜히 내 머리를 헤집곤 했다.

16550933979599.png‘알테어는 지금 쑥스러운 거구나.’

어떤 일에든 동요하지 않는 알테어를 쑥스럽게 만들었다는 게 왠지 기뻐서 활짝 미소를 지으니, 내 머리를 헤집던 그의 손이 굳어버렸다. 갑자기 왜 그런가 싶어 알테어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16550933979599.png‘복도에 사람들이 있는데!’

놀라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과 동시에 알테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돌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복도를 바라보니 바인 가의 사용인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16550933979599.png‘으아아…… 민망해!’

16550933979599.png“꼬, 꽃을 나눠야 해요. 서, 서둘러야지!”

나는 민망함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누가 봐도 어색할 것 같은 태도였겠지만 말이다. 돌아서며 슬쩍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는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6550933979633.png“……요즘 들어 더 자제가 안 되네.”

귓가에 꽂히는 작은 중얼거림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 나는 마리와 안나를 향한 발걸음을 더욱 부지런히 놀렸다. *** 준비가 길었던 실버 쥬빌리 행사가 시작됐다. 수도 전체가 실버 쥬빌리로 들떠 있었지만, 가장 분위기가 들뜬 곳은 역시 황궁이었다. 그러나 황궁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별궁, 오르카 황자의 처소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르카는 시녀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거대한 거울 앞에 섰다. 번듯한 옷차림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16550934128914.jpg“전하. 슬슬 대연회장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종이 달려와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대연회장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사람은 주인공인 황제다. 그의 등장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손님들은 모두 그 전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16550934128919.jpg“그래. 가자.”

오르카는 순순히 시종의 재촉에 따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가 황제를 만나길 고대하고 있겠지만, 오르카의 목적은 달랐다.

16550934128919.jpg‘오늘이 그 딱딱한 남작의 중앙 사교계 데뷔로군.’

에일스포드 남작이 갓 성인이 된 소년, 소녀들처럼 긴장해 바들바들 떨고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첫 등장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그건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도 마찬가지다.

16550934128919.jpg‘남작의 견제가 보통이 아니던데……’

오르카는 화원에 불쑥 나타났던 알테어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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