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갖고 싶은 것. (61/170)

82화. 갖고 싶은 것.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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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세상이 뒤집힌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16550934348293.png‘전개는 달라질 수 있어.’

이미 나 역시 알테어의 삶을 많이 바꿔놓았다. 원작 소설대로라면 알테어는 아직도 가난한 영지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는 중이어야 하니까.

16550934348293.png‘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부분에서의 변화였다. 나의 의도대로 이야기가 움직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알테어와 비오스케스 공작의 관계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 내 자신감의 근원은 소설의 전개를 알고 있고, 그로 인해 타인보다 정보의 우위에 있다는 점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뿌리가 흔들리니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넋을 놓기 전에 알테어가 나를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소개했다.

16550934348304.png“이쪽은 제 아내 나디아입니다.”

1655093434831.jpg“오오. 이 아름다운 숙녀가 소문 속 남작의 부인이었군.”

비오스케스 공작이 반갑게 내 손을 잡아 위아래로 흔들었다.

16550934348293.png“나디아 에일스포드입니다, 공작님.”

1655093434831.jpg“분명 자네가 선대 바인 후작의 딸이었지. 기억하고 있다네.”

나는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휘청거리며 겨우 인사했다. 숙녀에게 인사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비오스케스 공작은 원래 예의나 법도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무래도 검을 휘두르는 기사이다 보니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16550934348293.png‘그런 점을 생각하면 알테어와 통하는 면이 있긴 해.’

그럼에도 소설에서 알테어와 비오스케스 공작이 적이 되었던 이유는 공작의 충직함에 있었다. 공작은 누구보다 굳건한 황제의 지지자였다. 단순히 황제의 장인이어서가 아니라, 황제를 지키는 것이 귀족 된 자의 의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념에 따라 황제를 지지하는 우직한 기사와 모든 것을 뒤엎고 황위를 차지하려는 반역자 무리는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16550934348293.png‘그런데 알테어의 사교계 첫 인맥이 비오스케스 공작이라니.’

이건 알테어가 황제파가 되겠다는 뜻? 그럼 앞으로의 전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걸로 알테어가 악당이 되는 전개는 가능성이 사라진 걸까?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나를 괴롭혔다. 그때, 대연회장이 다시 고요해질 만한 일이 벌어졌다.

1655093434831.jpg“황제 폐하 드십니다! 황후 폐하 드십니다!”

황제와 황후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덕분에 에일스포드 남작과 비오스케스 공작의 색다른 인맥에 놀라고 있던 사람들의 관심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옮겨갔다. 중요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라 황제와 황후는 화려한 정복을 입은 상태였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에 달린 수많은 장식이 조명에 반짝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귀족들은 두 사람이 지나가는 내내 고개를 숙여 주군을 향한 경의를 표현했다. 황제가 자리에 앉아 ‘다들 고개를 들라!’고 명령하기 전까지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것이 황제의 권위였다. 황제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서 귀족들을 둘러보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1655093434831.jpg“실버 쥬빌리를 맞이하여 이처럼 연회를 열게 되었으니 신이 내리신 축복이라 한없이 기쁘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풍요와 평안을 즐기길 바라겠네.”

짧은 환영사가 끝나자 1황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 앞에 섰다.

1655093434831.jpg“폐하의 영광스러운 날을 축하드리고자 하는 마음에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1655093434831.jpg“귀한 마음이니 기쁘게 받겠다.”

황제의 대답에 황자들을 비롯한 귀족들은 미리 약속된 순서에 따라 선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1황자는 검을, 2황자는 그림을 선물했다. 다음 순서는 3황자 오르카였다. 그는 소설에서처럼 요양을 핑계로 다양한 지역을 다니며 얻은 신기한 문물을 선물하며 자신의 식견이 얼마나 넓은지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황제와 황후는 물론이고 얼마나 귀한 선물들이 등장할까 기대하며 구경하던 귀족들이 오르카 황자가 소개하는 신문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알테어도 오르카가 늘어놓는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1655093434831.jpg“3황자께서 마냥 요양만 다니신 게 아닌가 봐요.”

1655093434831.jpg“그러게요. 오늘 뵈니 어릴 때와 달리 체격도 좋아지셨고.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듯하네요.”

1655093434831.jpg“말씀하시는 자태도 보통은 아닌 듯하고…… 이리 훌륭하게 장성하셨을 줄이야.”

수군대는 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르카 황자에 대한 평가가 수직상승하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람이 생각보다 훌륭한 모습을 보이니 효과가 더욱 큰 것 같았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몇 사람만 수군대도 우르르 동조하는 자가 나타나 파급력이 대단했다. 오르카 황자가 이 무대를 복귀의 시작점으로 잡은 이유가 있었던 거다. 오르카 다음 순서는 비오스케스 공작이었다. 그는 직접 사냥한 거대한 사자의 가죽을 바쳤고, 그 뒤로 시종의 호명에 공작들이 차례로 선물을 올렸다. 작위에 따라 다음은 후작의 순서였다. 숙부는 이제 제 차례가 왔음을 알았는지 부산스럽게 앞으로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저택을 나서기 전부터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노라 떠들어대던 것까지 생각하면 준비한 물건에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종이 호명한 건 숙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후작도 아니었다.

1655093434831.jpg“에일스포드 남작은 앞으로 나와 선물을 올리십시오!”

1655093434831.jpg“에일스포드 남작?”

남작이라면 끄트머리에, 그것도 이제 갓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남작이라면 끄트머리의 끄트머리에 이름이 불리는 것이 보통인데, 시종이 그런 관례를 무시하고 알테어를 먼저 호명한 것이다. 물론 이 호명 순서는 황제가 지정하게 되어 있으므로 꼭 작위 순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었으나, 대체로 큰 틀을 벗어나진 않았다. 매우 파격적인 상황이었다. 다들 놀란 가운데 스스로 순서를 지정한 황제만이 태연했다. 알테어는 잠깐 놀라는 것 같았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고 황제의 앞에 나섰다. 나도 재빨리 그의 옆으로 따라붙어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우리가 사전에 전달한 상자를 시종이 황제 앞으로 가져왔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상자를 열었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찬란한 왕관의 자태에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16550934378816.jpg“와아!”

화려하고 아름다운 걸 늘 접하는 귀족들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왕관인 듯했다.

16550934348304.png“폐하의 치세가 골든 쥬빌리, 다이아몬드 쥬빌리, 플래티넘 쥬빌리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며 왕관을 만들었습니다.”

1655093434831.jpg“호오.”

멋진 자태에 뜻까지 훌륭하니 황제의 얼굴에도 흡족한 기색이 스쳤다.

16550934348293.png‘노림수가 제대로 먹힌 모양이야.’

하지만 황제의 앞에 섰다는 긴장감, 모두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부담감에 잔뜩 쫄아 있느라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황제가 빨리 물러나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선물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는지 황제는 다른 귀족들을 대하던 것과 달리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1655093434831.jpg“근래에 에일스포드 남작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하여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그대의 이름을 위에 올렸어. 이런 훌륭한 신사를 이제야 알게 되어 얼마나 아쉬운지.”

16550934348304.png“과찬이십니다.”

1655093434831.jpg“앞으로는 자주 보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동부 영지를 거점으로 삼고 있어 수도에 연고가 없으니 방문하기 쉽지 않을 터…….”

황제가 잠시 고민하는 듯 말끝을 흐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1655093434831.jpg“수도의 발트롱 저택을 남작에게 하사하겠다.”

발트롱 저택은 황제가 소유한 수도의 별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대저택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테어에게 그 대단한 저택을 하사한다는 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강한 신호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오르카 황자를 살폈다. 알테어를 노리는 게 분명해 보였던 오르카 황자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오르카 황자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살짝 미소 지은 얼굴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알테어는…….

16550934348304.png“저에게는 과분한 선물입니다. 제겐 이미 수도에 연고가 있으니 마음 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1655093434831.jpg“수도에 연고가 있다?”

16550934348304.png“예. 제 아내가 선대 바인 후작의 딸이었습니다.”

1655093434831.jpg“선대 바인 후작이라면…….”

황제의 찌를 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최대한 의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았으나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3434831.jpg“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갖고 싶은 게 따로 있는 거로군.”

16550934348304.png“송구합니다.”

1655093434831.jpg“내 자네를 비오스케스 공작처럼 천생 기사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야.”

비꼬는 말처럼 들리지만 호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황제와 알테어는 알쏭달쏭한 말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모두 이해한다는 듯 태연했지만, 나를 비롯한 귀족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알테어가 발트롱 저택까지 거절하며 받고 싶은 게 뭘까? 황제는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는 걸까?

1655093434831.jpg“이만 물러나도 좋네.”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는 와중에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황제에게 인사하고 알테어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뒤를 이어 후작들의 이름이 불리기 시작했다. 숙부는 후작 중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불렸다. 나는 숙부가 장황하게 선물을 자랑하는 걸 보며 알테어에게 속삭였다.

16550934348293.png“어떻게 된 일이에요?”

알테어는 대답 대신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가 궁금하냐는 눈빛이었다.

16550934348293.png“비오스케스 공작님과는 언제 친분을 쌓은 거예요? 폐하의 선물은 왜 거절했죠? 앞으로 정치에 발을 들일 생각인가요?”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에 알테어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16550934348304.png“내가 정치에 발을 들이길 바라?”

16550934348293.png“그럴 리가요!”

알테어가 황위 싸움에 엮여 들어 어떤 악당이 됐는지 뻔히 아는데! 내가 그걸 막으려고 에일스포드를 부자로 만들고, 오르카 황자를 열심히 방어하며 거리를 두게 애쓴 건데! 혹시 내가 적극적으로 에일스포드 남작에 관한 소문을 낸 의도를 오해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귀족들을 힐끗댔다.

16550934348293.png“전 사람들이 알테어를, 에일스포드를 무시하지 않길 바랐을 뿐이에요. 수도에서는 명예 없는 귀족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아니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16550934348293.png“그리고 에일스포드와 마석 광산에 관한 소문을 퍼트려서 장사도 잘하고 싶었고…… 아무튼 알테어가 이런 일에 엮이는 걸 바라지 않아요.”

16550934348304.png“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반드시 발을 들여야 한다면?”

황제와의 대화에서도 나왔던 말이다. 알테어가 원하는 것.

16550934348293.png“어떤 걸 원하는데요?”

16550934348304.png“…….”

질문에 질문으로 대신 답했더니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묘한 표정이 나를 바라보아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16550934348304.png“……난 그저 바로잡고 싶을 뿐이야. 뒤틀린 걸 바로잡는다. 그게 이치잖아?”

나를 향한 대답이었지만 스스로를 향해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의도가 모호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길고 긴 선물 증정식이 끝난 모양인지 황제가 가볍게 박수 쳐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1655093434831.jpg“좋은 날에는 맛있는 술과 흥겨운 음악이 빠질 수 없지. 모두 마음껏 즐기도록 하게!”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음악대가 연주를 시작했다. 우아한 클래식 선율에 맞춰 황제와 황후가 가장 먼저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귀족들도 여기저기서 춤을 신청하고 받아들이며 연회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16550934348304.png‘에일스포드와 느낌은 아주 다르지만, 결국 축제에는 술과 춤이라는 거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에 키득대자 눈앞에 커다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번쩍 고개를 드니 알테어가 무뚝뚝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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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34348304.png“이런 자리에서 춤을 안 추는 여인은 조롱당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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