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미친개와 조련사.2022.03.23.
평온하게만 살아온 귀족들에게 이런 유혈사태는 충격적이었다. 알테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피가 뚝뚝 흐르는 제 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도발한 상대에겐 이보다 더한 협박이 없었다. 사실 알테어 정도의 실력자라면 유리잔을 깨뜨리며 자기 손을 다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오러로 단단하게 보호하면 유리는커녕 강철도 쉽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피가 흐른다는 건 알테어가 일부러 이런 사태를 유도했다는 뜻이었다.
‘이런 인간들은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렇다고 주먹으로 상대의 코를 뭉개 버릴 수는 없으니 이렇게나마 경고를 한 거다. 다행히 경고는 잘 먹혀 든 것 같았다.
“그, 제가, 실수를…….”
상대의 서열을 아래로 밀어 넣기 위해 부인과 처가의 약점을 들먹였던 당사자는 어느새 두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거만한 얼굴로 알테어와 나디아를 비꼬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알테어는 사람들의 시선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혈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실수는 제가 했지요. 이렇게 좋은 날에 피를 보게 되다니…….”
태연한 목소리였으나 ‘나는 마냥 어수룩한 변방의 귀족이 아니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뜻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키는데 알테어가 그에게 물었다.
“혹시 손수건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지혈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 무, 무, 물론이지요.”
남자가 허둥대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알테어는 그 손수건으로 상처를 꾹 눌러 능숙하게 지혈했고, 고급스러운 손수건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습했습니다.”
어느 정도 피가 멈추자 알테어는 피로 젖은 손수건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덜덜 떠는 남자의 손에 손수건을 억지로 꾹 쥐여 주자, 피로 젖은 손수건의 기묘한 감촉에 그가 기겁하며 인사도 하지 않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귀족들은 알테어의 눈치만 살피며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쳐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정중한 척하는 미친개다!’
그리고 그 미친개는…….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멀리서 다가오는 남작 부인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의 살벌함을 싹 거두고 엉망이 된 손을 등 뒤로 스윽 숨겼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단번에 깨달았다. 이 미친개의 조련사는 남작 부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에일스포드의 실세는 결국…… 이 남작 부인이다! 역학 관계를 빠르게 파악한 귀족들이 눈을 반짝였다. ***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보자마자 머리가 빙글 돌았다. 피 공포증에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비틀거리자 알테어가 서둘러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한 손은 여전히 뒤로 숨긴 채였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쳤어요?”
“큰 상처는 아니다.”
“피, 피가 이렇게 흘렀는데…….”
나는 상황을 정확히 가늠하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피를 다시 바라보았다가,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에서 피가 사라지자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던 기분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여, 여기서 꼴사납게 쓰러질 순 없어.’
게다가 다친 알테어의 보호자는 나다. 보호자가 고작 피가 무섭다며 기절해 버리면 다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고 알테어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치료하러 가요.”
“이미 지혈했으니 괜찮아.”
“지혈이 치료는 아니잖아요.”
나는 알테어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신사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신사분들. 제 남편의 손을 치료해야 하니, 죄송하지만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자리를 떠나겠다는 통보였지만 신사들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그래야지요! 치료가 중요하지요!”
“우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치료하십시오!”
오히려 반가워하는 것 같은 기색에 나는 알테어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 무서운 얼굴로 얼마나 사람들을 기죽였으면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대연회장의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알테어는 고집부리지 않고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긴 연회 중간에 지친 손님들이 쉴 수 있도록, 이런 연회장에는 작은 테라스 공간이 여럿 마련되어 있었다. 거대한 커튼을 치면 안에 사람이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표시였다. 아직 연회 초반이라 테라스는 많이 비어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커튼을 쳤다. 들어가기 전 지나가는 시종에게 의사를 불러달라는 말을 전해 두었으니 금방 전문가가 올 테지만, 하얗게 질렸던 구경꾼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엔 그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손 줘 봐요.”
알테어는 내 요구에도 여전히 손을 등 뒤에 두었다. 순순히 상처를 보여줄 분위기가 아니라 후다닥 걸음을 옮겨 알테어의 등 뒤로 달려가니 그가 몸을 휙 돌려 나를 피했다. 황당해져 입을 떡 벌리고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다시 한번 알테어의 등 뒤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정면으로 나를 마주했다. 몇 번이나 알테어의 등을 공략했지만 절대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러기예요?”
“보기에 좋지도 않은데 뭐 하러. 또 놀라서 기절하려고.”
“내, 내가 기절할 정도로 많이 다친 거예요?!”
놀라서 반문하자 알테어가 실수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냐. 넌 워낙 작은 거에도 잘 놀라니까 하는 말이다.”
“그……!”
차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다쳤어요? 알테어를 다치게 할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는데.”
“실수로 잔을 깼어.”
“……실수요?”
알테어가 어디 실수로 잔을 깰 만한 사람인가.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뜨자 알테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긴장해. 수도 사교계는 처음이잖아. 황제도 만났고.”
맞다. 보통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흐으음…….’
알테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내가 계속 의심을 거두지 못하자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귀부인들과의 대화는 어땠어?”
“다들 알테어에 대해 궁금해 했어요. 우리 영지에 대해서도요.”
대체로 예상 범위 안의 질문들이라 소심한 나도 당황하지 않고 척척 대답할 수 있었다.
‘대화가 더 길어졌으면 밑천이 드러났을지도 모르지만.’
알테어가 다치는 바람에 대화가 중간에 끊겨 적당히 대화한 상태에서 빠져나온 셈이다.
“알테어는 어땠어요? 신사분들과의 대화요.”
“나도 비슷했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은 듯하더군.”
신사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건지 알테어의 눈이 잠시 흐려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알테어의 등 뒤를 노렸다.
‘됐어!’
제대로 빈틈을 노린 덕분인지 이번에는 무사히 알테어의 다친 손을 낚아챌 수 있었다. 알테어는 내가 이렇게 기습할 줄은 몰랐는지 작게 움찔했지만, 내 손을 쳐내진 않았다. 덕분에 나는 뿌듯한 심정으로 알테어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상에…….”
제대로 지혈한 모양인지 피는 멈춘 상태였지만, 베인 상처 발생지 주위로 피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확실히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고, 피 공포증이 있는 내겐 버거운 모습이었지만,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파편이 박히진 않았어요? 잔이 깨졌을 땐 그게 제일 위험하대요.”
“걱정 마. 파편이 박히지 않게 잘 조절 했…….”
걱정이 가득 담긴 내 말투에 경계 없이 대답하던 알테어가 제 실수를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난 이미 사태를 파악한 뒤였다.
“역시 실수가 아니었죠? 일부러 그랬던 거죠?”
알테어를 추궁하려는 순간 타이밍 나쁘게 의사가 도착했다.
“이쪽에 환자가 계시다고요?”
평소라면 의사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거면서, 알테어가 구세주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얼른 의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다. 손을 다쳤어.”
“세상에. 어쩌다 이리 다치셨습니까. 통증은 없으시고요?”
“아프다. 엄청나게 아파.”
추궁을 피하기 위한 엄살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프다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우선 치료가 중요하지.’
치료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하지만 치료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라스의 커튼이 확 젖혀졌다. 사람이 있다는 표시를 했는데도 누가 이런 무례를 저지르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숙부와 멜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에일스포드 남작! 상처는 괜찮은가? 내가 왔으니 안심하게!”
“남작님! 많이 아프시죠?”
숙부와 멜리사가 모두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치며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모두에게 에일스포드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소란을 떠는 듯했다. 특히 멜리사는 치료를 받고 있는 알테어의 옆에 바짝 붙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렇게 상처가 깊다니,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들의 전략이 통하긴 한 모양인지 귀족들이 테라스 쪽을 힐끗대며 “남작이 지금 바인 후작가에서 신세를 지고 있대요.”라든가, “남작이 바인 후작을 깍듯하게 모시는 듯했어요.”라는 이야기를 수군댔다. 숙부도 멜리사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호들갑을 거들었다.
“그래. 너무 무리할 필요 없네. 작은 상처라고 가벼이 여기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기는 법이야.”
하지만 결이 조금 달랐다.
“내일 저택에서 가문의 변호사를 만나 서류를 처리하기로 하지 않았나. 혹여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그러니 그전까지 푹 쉬고 있는 게 좋겠네.”
‘서류? 가문의 변호사?’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알테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런 중요한 일을 잊겠습니까.”
“크흠, 아니, 이 소란에 자네가 그걸 잊을까 봐 하는 말은 아니었네.”
알테어의 상처보다도 함께 잡은 약속이 더 중요하다는 게 뻔히 보인다.
‘그걸 알테어가 모를 리도 없는데.’
왜 이렇게 관대한 태도로 숙부를 받아주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후작님. 절차에 필요한 자료는 모두 준비해 두셨습니까?”
“물론이지. 나야 인장만 찍으면 되는 문제 아닌가.”
숙부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치료하고 있던 의사를 채근했다.
“꼼꼼하게 감게. 귀한 손이니까 말이야.”
의미심장한 대화에 해답을 바라는 의미로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내 시선을 알아채고는 다시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쪽이 아프다. 저쪽도.”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