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불합리한 상속법.2022.03.27.
나는 엄살을 부리는 알테어를 내버려 두고 테라스 밖으로 나왔다. 숙부와 멜리사가 곁에 붙어 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 일을 꾸미는 듯한 얄미움에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사실 이것도 알테어가 숙부나 멜리사에게 넘어갈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실버 쥬빌리를 위해 수도에 올 때는 소설 속 모든 비극이 일어나는 무대에 알테어가 발을 들이게 된다는 게 걱정스러웠다. 날 무시하고 모든 걸 빼앗은 숙부와 멜리사가 알테어까지 같은 취급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수도에서 지내며 모든 것들이 내 기우라는 걸 알아차려 마음이 조금 편해진 상태였다. 숙부와 멜리사는 알테어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비극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오르카 황자도 알테어에게 손을 뻗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알테어의 처지가 가난하던 소설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서인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방심할 수는 없다. 상황이 달라진 이유가 부를 갖추었기 때문이니 이걸 지키고 더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삐끗해서 에일스포드의 재정이 나빠지면 다시 무서운 상황이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읽었는걸.’
이야기 속에 떨어진 주인공이 예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결국 원작의 흐름대로 진행되고야 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세계는 예정된 운명대로 흘러간다!’는 건 꽤 익숙한 전개다. 물론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상황에 취해 너무 손을 놓고 있어서도 안 된다.
‘뭔지는 몰라도 알테어는 열심히 하고 있어.’
비오스케스 공작과 인연을 만든 것도, 숙부나 멜리사를 적당히 받아주고 있는 것도. 전부 세워둔 계획이 있어 노력하는 중일 테지. 그리고 그건 에일스포드의 미래에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어.’
알테어는 내가 멋진 사람이라고 해줬으니까, 정말로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선은 에일스포드의 재정을 착실히 불려 나가야 한다. 그게 에일스포드가 무시당하지 않고, 알테어가 나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뿌리가 될 테다. 장사라는 건 상품만 좋다고 잘 되는 게 아니다. 결국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특히 귀족들은 상품의 가치보다도 그 외의 부분을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으니,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과 좋은 관계를 다져 놔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대연회장으로 다시 발을 들이자마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다. 소심한 마음에 다짐이 쪼그라들 것 같았지만 나는 억지로 어깨를 폈다. 어느 무리로 다가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영향력 있는 무리 주위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기 마련이니 대연회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구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처럼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 구도를 더욱 잘 알아차릴 수 있지.’
가장 영향력이 큰 무리는 오늘의 주인공인 황제가 이끌고 있다. 그는 황후와 함께 중후한 귀족들의 축하를 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다음으로는 1황자와 2황자의 무리다. 다소 젊은 귀족들이 주위에 몰려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3황자, 오르카의 곁은…….
‘무서울 정도로 한산하군…….’
오늘 그가 황제에게 바친 선물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몇몇 사람이 다녀가긴 했지만 다른 황족들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하니까 사람이 삐뚤어져서 그런 무서운 짓을 저지르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쭉 이런 상태였다면 내면에 분노가 쌓일 만하다. 늘 오르카 황자가 두려웠는데. 지금만큼은 그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에 잠겨 서서히 걸음을 옮기다 보니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요, 남작 부인.”
‘어라?’
놀라서 번뜩 생각에서 깨어나 눈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오르카 황자가 코앞에 있었다.
‘어, 어, 어쩌다 내가 여기에!’
오르카 황자가 안쓰럽다는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앞으로 발길이 향한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할 필요는 없잖아……!’
이래서 요령 없는 인간의 삶은 고달픈 거다. 내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오르카 황자도 놀란 얼굴이었다.
늘 웃는 낯으로 휘어져 있는 눈이 제대로 뜨여 그의 두 눈동자가 정확히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흔들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르카 황자는 금세 평소처럼 사르르 웃는 얼굴로 돌아와 멀리 떨어진 1황자와 2황자 무리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면 부인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겁니다. 형님들은 인맥이 대단하거든요.”
내가 무얼 하려는지도 알아차리고 친절하게 저쪽으로 가라는 조언까지 들으니 오히려 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르카 황자의 조언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아, 그렇군요!’ 하고 자리를 옮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머뭇대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날 보며 오르카 황자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내 팬인 것처럼…….”
웃음만큼이나 작은 혼잣말 뒤로 오르카 황자가 물었다.
“그대는 우리나라의 상속법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요?”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물었지만, 사실은 그럴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상속법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닌 황자가 상속법의 불합리함을 언급한다는 건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제국은 철저한 장자상속이죠. 가문의 모든 재산과 작위가 장자에게 돌아가니 나머지에겐 기회가 없어요. 뭐, 장자에게 결격 사유가 있다면 모를까.”
재빨리 주위를 살피니 다행히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다 알고 이야기를 꺼낸 건지 오르카 황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성의 경우엔 더욱 불합리해요. 애초에 상속 대상이 아니죠. 만약 부인이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금쯤 바인 후작이 되어 있었을 텐데, 딸이라 숙부에게 자리가 넘어갔지요. 억울하지 않았나요?”
“……그런 상황에서 억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아하게 ‘제국의 법이 그런 걸 어쩌겠나요?’라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하지만 오르카 황자가 당연한 질문을 꺼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3황자인 오르카 황자는 1황자와 2황자가 줄줄이 세상을 떠나야만 황제가 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런 일이 매우 드문 것을 넘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딸이라 가문의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나와 삼남이라 황위 계승에서 완벽히 배제된 자신의 처지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걸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그…… 어어…… 여기서 그런 말을 하시면…….”
말을 꺼낸 오르카 황자는 태연한데 나만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혹시라도 누군가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으니 오르카 황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곤란하게 하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나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람.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악당의 속마음 따위 별로 안 알고 싶단 말이야…….’
악당이 속마음을 말한 뒤에 벌어질 일이란 뻔하다. ‘그러니까 내 편이 돼라!’거나 ‘내 속셈을 알았으니 죽어줘!’라는 전개 아닌가.
‘난 어느 쪽도 싫다고!’
오르카 황자가 멀리 가라고 기회를 줄 때 얼른 도망칠 걸 그랬다. 그의 주변이 눈에 띄게 썰렁한 걸 보고 괜히 마음이 무거워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게 화근이 될 줄이야. 오르카 황자는 계속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든 답하기 전엔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내 대답이 그를 자극할까 봐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건 제게 불합리한 일이었어요. 법이 왜 그럴까, 일이 왜 이렇게 된 걸까 원망한 것도 사실이고요.”
모든 자식에게 동등한 상속권이 있는 세상에서 살았던 내게는 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하겠죠. 그렇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만약 법이 바뀐대도 소급 적용은 되지 않을 테니 제겐 다른 게 더 중요했어요.”
“다른 거라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가문의 재산과 작위만이 나타내는 것은 아니잖아요. 계속 그걸 생각했어요. 가문의 재산과 작위가 없어도 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매몰되지 말고 앞으로 가자고…….”
게다가 당시의 내게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더 컸다. 소설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재산이나 작위가 무슨 소용인가? 다 죽어버리고 말 텐데.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오르카 황자는 내 대답이 조금 신기했는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가문의 재산과 작위만 내 가치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고요…….”
분명 오르카는 거기서 이야기를 삼켰지만, ‘하지만 내겐 그게 전부인데요.’라는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보다 어째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괜히 떠들어대며 실수한 건가 싶어 오르카의 눈치를 살피는데 조용했던 주변으로 몇몇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두 분께 친분이 있었나요?”
나와 오르카 황자의 조합이 신선해서 눈길을 끈 모양이었다.
“아아. 제가 요양을 다니다 에일스포드 영지에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잘 알지요. 부인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답니다.”
오르카 황자는 언제 어두운 분위기였냐는 듯 웃는 낯으로 돌아와 사람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주위에는 점점 더 사람이 늘어났다. 대화를 주도하는 오르카 황자를 지켜보고 있자니 묘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오르카 황자가 본격적으로 사교계를 장악하는 시점.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버린 ‘소설’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 성황리에 마무리된 실버 쥬빌리 연회에서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 황제와 안면을 텄고, 유력한 귀족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그들에게 마석을 제대로 홍보할 수 있었다. 벌써 마석을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가문이 많았다. 계약 단위를 계산하면 금액이 어마어마해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기쁜 마음보다 불안함이 컸다. 알테어는 저택에 돌아온 뒤 계속 의기소침한 날 보며 뭐라 말을 걸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물러섰다.
‘아마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추궁당할까 봐 그런 거겠지.’
숙부와 모종의 거래를 하는 중인 듯한데 그걸 내게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긴 에일스포드 성이 아니라 바인 후작저야.’
내게도 익숙하고, 마리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특히 마리의 인맥은 대단했다. 알테어가 말하지 않을 셈이라면 내가 알아내면 된다! 나는 은밀히 마리를 불러 부탁했다.
“마리. 내일 가문의 변호사가 올 거라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봐 줄래?”
“가문의 변호사라면 데몬 경이시죠. 그 집 사용인 중에 친한 애가 있어요.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마리는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요즘 약은 잘 먹고 계시죠?”
“약? 에일스포드에서부터 가져온 그거?”
“네.”
“그럼. 마리와 안나가 신경 써서 준비해 주고 있잖아.”
의사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두 사람 모두 내가 약을 싹 비울 때까지 곁을 지키며 감시하는 바람에 요령을 피울 수도 없었다. 약과 상극인 음식을 먹는 것도 곤란하다며 식사 때마다 마리가 나서서 검사하는 바람에 왜 이렇게 유난이냐는 수군거림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그만 먹어도 될 거 같아. 기력도 회복되었고.”
크게 아픈 곳도 없는데 괜히 요란하게 구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자 마리가 서둘러 부정했다.
“안 될 말씀이세요!”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리가 차분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져온 약도 아직 많이 남았는걸요. 마님께서 안 드시면 그걸 다 버려야 하는데, 그건 아깝잖아요.”
“으응…….”
“아무튼 전 얼른 마님께서 알아보라 하신 걸 알아 올게요.”
마리가 서둘러 물러났다. 나는 멀어지는 마리를 보며 묘하게 찝찝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