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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그 아버지에 그 딸. (65/170)

86화. 그 아버지에 그 딸.2022.03.30.

16550935246095.jpg“마님!”

마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이야기를 가져왔다.

16550935246095.jpg“데몬 경의 비서에게 연락해 준비하고 있는 게 뭔지 알아냈습니다.”

데몬 경은 나이가 지긋한 신사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바인 가문의 재산을 관리해 온 변호사였다. 그는 그리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밑에서 일하는 비서는 우리와의 오랜 인연을 꽤 소중히 여겨주었는데, 덕분에 마리가 중요한 이야기를 미리 들을 수 있게 된 듯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숙부에게 작위가 돌아가던 그 시기에도 데몬 경은 냉철하게 일을 처리했지만, 비서를 비롯한 그의 부하 몇몇은 내 처지를 불쌍히 여겨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었다. 물론 숙부의 날카로운 경계에 막혀 실질적인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그리 마음 써준 것을 지금도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16550935246095.jpg“바인 후작께서 토지 양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16550935246107.png“토지 양도?”

16550935246095.jpg“예. 토지를 넘기는 건 에일스포드 남작이고요.”

마리의 낯빛이 평소답지 않게 어두운 걸 보니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놀라웠다.

16550935246095.jpg“데몬 경이 며칠 사이 검토했던 서류를 생각하면, 과수원을 넘기려는 것 같다고 합니다.”

16550935246107.png“과수원이라……. 어떤 땅을 말하는지 알겠어.”

그럴 만한 땅이라면 시비가 붙었던 동부 귀족에게서 마수 토벌을 대가로 받아낸 과수원뿐이었다. 흔히 과수원이라면 ‘고작 그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 과수원은 특별했다. 황제에게까지 진상하는 귀한 과일이 나는 땅이니 금싸라기나 다름없었다. 사정을 아는 숙부가 군침을 흘리며 일을 추진했던 게 이해가 된다.

16550935246107.png‘하지만…….’

나는 동시에 의아해졌다. 갓 과수원을 얻게 되었을 때, 알테어는 친정인 바인 후작가에 그 땅을 넘겨주겠다고 관대하게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숙부에게 귀한 걸 넘길 필요가 없다며 알테어를 말리지 않았던가? 나의 의사를 존중해 증여 계획을 깨끗하게 접었던 알테어가 논의도 없이 다시 일을 추진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16550935246107.png‘설마 알테어가 그때의 일을 잊을 사람도 아니고.’

16550935246107.png“……아무래도 진짜 증여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짧은 나의 평가에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던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0935246095.jpg“그럼 영주님께 다른 의중이 있다는…… 그럼 왜 마님께 미리 말씀하시지 않고…….”

나도 그게 의아했다. 숙부와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응당 나의 문제일 테니, 사전에 의견을 나눴어야 하는 것 아닌가.

16550935246107.png‘하지만 더 의아한 건…….’

알테어가 추진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허술하게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마음을 제대로 먹었다면, 나는 숙부와 알테어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알테어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일을 감추는 대신에 적당하고 허술하게 내게 드러내는 쪽을 택했다.

16550935246107.png‘꼭 일부러 알아차리길 바라는 것처럼.’

지금도 그렇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 마리와 내가 대화할 시간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머릿속이 번뜩하는 기분이었다. 설마 알테어는, 내가 스스로 ‘어떤 일’을 알아차리길 바라는 걸까?

16550935246107.png“……마리. 변호사는 내일 몇 시에 저택에 도착해?”

16550935246095.jpg“예정은 오후 8시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알아볼 시간은 충분하다.

16550935246107.png‘가문의 변호사가 연관된 일. 알테어가 일부러 나서서 손대야만 하는 일이라면.’

범위는 넓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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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인 후작은 아침부터 잔뜩 들떠 콧노래를 흥얼댔다. 덕분에 후작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멀리서 제 할 일을 하는 바인 가의 사용인들도 그의 기분이 좋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멜리사 역시 아버지가 무척이나 들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평범한 사용인들과 달리 그녀는 아버지의 기분이 왜 이렇게 좋은지, 그 이유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16550935268836.png“아버지. 굳이 이렇게 넘겨받을 필요가 있어요?”

후작과 마주 앉아 점심을 함께하던 멜리사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시큰둥한 얼굴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 말에 바인 후작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16550935246095.jpg“필요를 뭐 하러 따져? 땅을 준다는데 당연히 받아야지.”

16550935268836.png“어차피 에일스포드의 재산은 다 우리 것이 될 거잖아요. 내가 남작 부인이 되면요.”

16550935246095.jpg“그래. 하지만 그게 ‘바인’의 땅인 것과 ‘에일스포드’의 땅인 건 달라.”

16550935268836.png“‘바인’은 아버지 것이고, ‘에일스포드’는 그렇지 않아서요?”

16550935246095.jpg“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묘하게 비꼬는 말에 바인 후작이 요란하게 식기를 내려놓으며 눈을 부라렸다. 질문으로 돌려주긴 했지만, 후작은 이미 멜리사의 말에 숨은 의도를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16550935246095.jpg‘흥. 곧 남작 부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내가 제 몫을 빼가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이거야?’

후작이 멜리사에게 ‘네가 남작 부인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이후, 그녀는 이미 에일스포드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녔다. 절대 상속받지 못할 것 같았던 바인 후작가도 집어삼킨 아버지이니, 시골 귀족가의 남작 부인 자리 정도야 쉽게 가져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나디아 바인이라는 멍청한 계집애라니 긴장감도 들지 않았다. 에일스포드 남작이 바인에 귀한 땅을 넘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마냥 좋았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머리를 굴려보니 이게 ‘아버지’에게는 좋아도 ‘나’에게는 손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일스포드가 내 손에 떨어진 상태라고 생각하니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 거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나 할까. 멜리사는 아버지의 경고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 역시 제 아버지에게 배운 모르쇠다.

16550935268836.png“땅을 넘겨받으려면 절차가 복잡하니 그렇죠.”

16550935246095.jpg“일이야 변호사 놈이 다 하는데 뭐가 걱정이냐.”

16550935268836.png“그 변호사도 문제라고요. 난 그 사람 영 불편한데.”

16550935246095.jpg“뭐…… 확실히 편한 인간은 아니지만…….”

가문의 사용인들이 자신에게 굽실대는 것에 익숙한 멜리사는 예전부터 뻣뻣한 데몬을 불편하게 여겼으나, 바인 후작은 그가 썩 마음에 들었다. 가문의 변호사 데몬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아직 선대 후작이 살아 있던 시절, 어떻게든 그를 꾀어내 제 편으로 삼으려 했지만 고리타분한 원칙주의자는 끝까지 뻣뻣하게 굴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법과 서류, 계약뿐이었다.

16550935246095.jpg‘그걸 달리 말하면…….’

법에 어긋나지 않고, 서류가 확실한 계약이라면 다른 부분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거다.

16550935246095.jpg‘그놈이 인간적인 타입이 아니라 다행이었지.’

만약 데몬이 사사로이 정에 얽매이는 타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나디아를 쳐내고 바인 후작가를 집어삼키지는 못했을 거다. 당시 그놈의 부하들이 나디아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던 걸 알아채고 미리 싹을 자른 게 얼마나 다행인지.

16550935246095.jpg“이미 결정된 일이니 너는 말을 보태지 마라, 멜리사. 너에게 큰 걸 쥐여 주기로 했으니 그 땅은 수수료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16550935268836.png“칫. 부모 자식 사이에 수수료가 웬 말이에요?”

16550935246095.jpg“내가 핏줄에 끌려 관대함을 베푸는 사람이었다면 너와 내가 이 자리에 있었겠느냐?”

단호한 말에 멜리사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고 입을 비죽였다.

16550935268836.png“그럼 ‘큰 거’는 언제 가질 수 있어요? 이런 ‘작은 거’ 말고요.”

16550935246095.jpg“나디아 그 계집애가 수도를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겠지. 적당한 타이밍을 살피고 있으니 차분하게 기다려라. 괜히 나서서 사고라도 치는 날에는 일이 더 복잡해져.”

16550935268836.png“제가 무슨 사고를 친다고요?”

16550935246095.jpg“남작은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다. 미색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니, 괜히 살랑대며 눈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게다. 그런 건 오히려 경계심만 부추길 뿐이야.”

16550935268836.png“하지만…… 나디아와 남작님은 보란 듯이 같은 방을 쓰면서 금슬을 자랑하잖아요! 기다리는 동안 사이가 더 깊어지면 어떡해요!”

딸의 투정에 바인 후작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16550935246095.jpg“결국 남작도 귀족 사내다. 흠결 있는 아내가 자신을 속이고 결혼했는데 그걸 이해해 줄 사내는 아무도 없어. 그러니 얌전히 기다려라. 얌전히!”

16550935268836.png“으휴. 잔소리는…… 알았어요!”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건지 여전히 철없이 구는 멜리사를 보며 바인 후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35246095.jpg“아무튼 오늘 오후에 변호사 놈이 오기로 했으니 인장을 꺼내오마.”

바인 후작이 멜리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멜리사는 익숙하다는 듯 목에 걸고 있던 작은 목걸이를 풀어 후작에게 건넸다. 후작의 손에 닿자마자 열쇠 모양의 작은 장식의 크기가 커져 커다란 열쇠가 되었다. 후작가의 인장을 보관한 금고의 열쇠였다. 인장은 후작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 귀족들이 작위를 물려받으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인장을 숨길 장소와 방법을 정하는 것일 정도였다. 누가 찍었든, 서류에 인장만 찍혀 있다면 그건 바인 후작의 뜻이 된다. 서명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를 가진다. 그래서 귀족들은 누구나 인장을 꽁꽁 숨겨 놓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꺼내어 썼다. 오늘처럼 토지를 주고받는 계약서에는 서명이 아닌 인장이 필요했다. 황제에게 올려 승인받아야 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16550935246095.jpg‘이런 중요한 열쇠를 이렇게 요란한 딸의 목걸이로 줬다곤 누구도 짐작 못 했을 거야.’

바인 후작은 자신의 영리함에 스스로 감탄하며 얼른 열쇠를 품에 숨겨 걸음을 옮겼다. 인장을 숨겨둔 금고는 지금은 비어 있는 후작 부인의 방에 두었다. 후작의 방과 작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사용인들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동하기 좋았다. 그는 우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방과 방 사이에 난 작은 문을 통해 후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금고는 벽에 걸린 그림을 옆으로 젖히면 나타난다. 후작은 콧노래를 부르며 금고의 문을 열고 인장을 꺼내 품 안에 소중히 보관했다. 다들 인장이라면 커다란 도장을 생각하지만, 그런 건 황제나 쓰는 것이다. 후작가의 인장은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였다. 대신 도장에 새겨진 문양이 섬세하고 복잡해서 쉽게 위조할 수가 없었다.

16550935246095.jpg‘오늘 또 내 재산이 늘어나겠군.’

후작은 뿌듯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고와 그림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자신이 떠난 자리에 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졌다. 알테어는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가, 시간이 8시에 가까워지자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부와 미리 약속한 장소로 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알테어의 뒤를 따라붙었다.

16550935246107.png“같이 가요.”

16550935334602.png“내가 어딜 가려는 줄은 알고?”

16550935246107.png“네. 뭐 하려는 건지도 알아요.”

16550935334602.png“고생했네.”

깔끔한 나의 대답에 알테어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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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나서는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가겠다는 말에 놀라지도 않는다.

16550935246107.png‘이것 봐.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참으로 못 말릴 사람이라 생각하며 나는 알테어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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