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닫으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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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닫으면 안 되나요?
2022.04.06.
“당장 내 집에서 나가게!”
전면전을 예고한 마당에 더 체면을 차릴 것도 없었는지, 숙부는 건장한 가문의 기사들을 우르르 데려와 당장 떠나라며 우리를 위협했다.
소송을 마음먹었을 때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나는 마리와 안나에게 눈짓을 보내 이미 정리된 짐 가방을 꺼내 왔다.
숙부와 데몬 경을 만나러 가기 전 미리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숙부 성격에 당장 우릴 내쫓으려고 날뛸 걸 알았지.’
태연하게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의 모습에 숙부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 이런!”
숙부는 금방이라도 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기세였다.
부들대는 주인을 앞에 두고 사용인들이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아마 알테어가 없었다면 당장 손을 들어서 내게 분풀이했을 테지.
하지만 아무리 숙부라도 용을 때려잡는 남자를 앞에 두고 힘자랑하긴 힘들 거다.
원래 무서운 강자의 존재가 거짓 분노 조절 장애의 가장 좋은 치료제인 법이다.
늘 무섭기만 했던 숙부의 태도가 어쩐지 우습고 하찮게 느껴져서,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무서워했던 거지?’
소심함에 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바들바들 떨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숙부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럼 지금 숙부가 두렵지 않은 건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기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알테어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다.
시선은 내가 아니라 씩씩대는 숙부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혹시라도 숙부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면 날 보호하겠다는 듯이.
그 배려에 속이 간지러워져서 나는 얼른 알테어에게 말을 걸었다.
침묵 속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였다.
“어서 가요.”
그러나 숙부에게 고정되어 있던 알테어의 시선이 나를 향해 새빨간 그의 눈과 마주하게 되자 오히려 속이 더욱 간지러워졌다.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였던 거다.
나는 알테어에게서 고개를 휙 돌리며 헛기침했다.
“마리에게 숙소를 알아보라고 했어요. 실버 쥬빌리 기간이라 수도의 숙박 시설이 대부분 만실이었지만, 웃돈을 주면 방을 내어 주겠다는 곳이 있어서…… 조금 아깝지만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죠.”
“흠.”
시선을 피한 채 우르르 말을 쏟아내자 묘한 반응이 돌아왔다.
“마리가 고생했겠군.”
알테어가 마리의 공을 짧게 치하한 뒤 나를 밖으로 이끌며 말했다.
“그런데 우린 거기로 안 가. 묵을 곳을 이미 구해 두었거든.”
“구해 뒀다고요?”
나는 놀라서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그가 숙부의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묵을 곳을 찾아 나선 건 그리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런 번잡한 시기에 수도에 익숙하지도 않은 알테어가 당당히 숙소를 잡아둔 게 신기했다.
“어떻게 방을 구했어요? 어딘데요?”
제대로 구한 게 맞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의심스럽게 바라보니 알테어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비오스케스 공작가.”
***
‘와아…….’
나는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에 감탄하며 차를 홀짝였다.
‘와아……!’
대접받은 차의 향이 훌륭해서 더욱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에일스포드도 많이 정비되었고, 바인 후작가 역시 훌륭하지만, 역시 비오스케스라는 큰 공작가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반짝거려서 황궁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남작 부인! 이렇게 또 보는군!”
“켁!”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와중에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이 집의 주인, 비오스케스 공작이 들이닥쳤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서 쿨럭대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알테어가 조용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모습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부부 사이가 좋단 말이야?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 부부는 드물지.”
흐뭇하게 웃는 눈빛에 묘한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어 어깨가 바짝 얼었다.
눈썰미 좋은 공작이 그걸 놓치지 않고 살피더니 눈을 가늘게 떠 알테어에게 물었다.
“정말로 남작 부인 혼자 진실을 알아냈다는 거지?”
“네. 공작께서도 모두 지켜보고 계셨을 텐데요.”
“그렇지. 하지만 정말로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알테어가 그랬었지.’
이번 문제는 반드시 내 손으로 일을 키웠어야 했다고.
주위의 시선이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꼭 ‘나’의 손을 거쳐야 했던 건지 의문스러웠었는데.
‘설마…… 공작이…….’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비오스케스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턱을 괸 채 웃는 낯으로 친근한 척을 해왔다.
“사실 난 부인이 그리 미덥지 못했거든. 유순하고 심약해 보이는 이 부인과 손을 잡아도 좋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단 말이야.”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공작의 얼굴은 점점 진지해져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상속법이 바뀌는 건 아주 큰일이지. 제국의 근간을 바꾸는 일이라네. 절대 쉽지 않아.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게 될 테지.”
옳은 말이다.
특히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테다.
‘여성’에게 상속권을 줌으로써 자신의 상속 순위가 밀리는 사람들도 말이 안 된다고 드러누울 테고.
“기회를 잡고 논의를 끌어 올렸을 때 성공시키지 못하면…… 앞으로 또 수백 년은 이 문제를 입에 올릴 수 없을 거야.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누구’를 전면에 내세우느냐 하는 거고.”
공작의 까다로운 눈이 탐색하듯 나를 훑었다.
“가련한 여인이 필요했어. 상속법의 안타까운 희생자여야만 했지. 그래야 탐욕스러운 자가 작위와 재산을 노린다며 공격받지 않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부인은 합격점이었지. 아름답고 청순가련한 여인이라 동정을 사기 좋아.”
그의 냉정한 평가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움츠러들었다간 정말로 내가 ‘나약한 인간’으로만 끝날 것 같아서 애써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공작은 그런 모습마저도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인하고 총명한 여인이 필요하지. 작위를 잇게 될 여인이 나약하기만 하다면 ‘역시 여인은 가문을 이끌 능력이 없다’라고 공격당할 수 있으니까. 연약하면서도 강인하고, 가냘프면서도 총명한 사람이 필요했어.”
마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같은 말이 아닌가?
“남작은 부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군. 나는 당연히 믿을 수 없다고 했지. 내가 직접 시험해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그래서…….”
나는 묘한 눈으로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였던 이상한 태도들이 이제야 이해되는 듯했다.
“난 분명 남작이 뒤에서 부인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지만 그런 움직임은 없더군. 정말로 부인 스스로 답에 도달했어. 내가 아직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야겠구먼. 하하!”
압박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정말로 유쾌함이 묻어나는 웃음만 귓가를 울렸다.
“나도 이제 부인을 믿겠네. 우리의 우두머리로 손색이 없어!”
“우, 우두머리요?”
“그럼. 자네가 우두머리지. 이 일의 스타는 나디아 에일스포드이고, 우린 뒤에서 스타를 돕는 일개미라네.”
“그, 그런…….”
세상에 누가 비오스케스 공작을 일개미로 둘 수 있단 말인가?
당황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자 비오스케스 공작이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모습에 내가 속아 넘어간 것 아닌가! 심약한 척 상대를 방심시킨 뒤에 뒤에서는 원하는 걸 얻어내는 치밀함이라니! 정말이지 우두머리로 완벽하다니까!”
‘아, 아니…….’
심약한 척이라니요…….
‘전 진짜로 심약한 건데요?!’
“난 이제 다 알았으니 내 앞에서까지 그럴 필요 없네! 하하하!”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길이 없는 엄청난 오해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
비오스케스 공작과의 짧고도 길었던 대화를 마친 뒤.
나와 알테어는 공작가에서 준비해 준 방으로 이동했다.
수도의 문화대로 각자의 방이 나뉘어 있었고, 방과 방 사이에 작은 문이 있어 원하면 서로의 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구조의 공간이었다.
“후작님의 표정 보셨어요? 비오스케스 공작가로 간다니까 얼이 빠져서는! 그분이 그동안 마님과 저희를 얼마나 무시했어요? 필요한 것도 잘 안 내어주고요. 마님을 쫓아내면 곤란해할 줄 알았나 봐요.”
“안나. 후작님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어. 그냥 ‘그 아저씨’라고 하면 돼. 존칭할 가치도 없는 인간인걸.”
“그렇다면 차라리 ‘그 대머리’라고 하는 게…….”
“아직 대머리는 아니지 않아……?”
“아니에요! 정수리가 휑하던걸요. 길길이 날뛸 때 제가 유심히 봤거든요!”
마리와 안나는 가져온 짐을 능숙하게 풀어내며 열심히 속닥댔다.
평소라면 안나를 자제시켰을 마리까지 수다에 동참한 걸 보면 후작가에서 쫓겨난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별로 기분 상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숙부가 그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고.
그렇지만 두 사람의 노력은 고마웠다.
“고마워. 기분이 많이 나아졌어.”
“어머나. 사실을 말한 거였는걸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안나가 뿌듯하게 마리를 바라보았고, 마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 기분을 풀어주자며 둘이서 따로 작전을 짠 모양이었다.
“이제 정말 괜찮으니 두 사람도 어서 가서 쉬어. 이동하느라 고생했잖아.”
“저희야 괜찮지만, 마님께서 피곤하실 테니 얼른 물러가겠습니다.”
“응. 고마워.”
마리와 안나를 보내고 낯선 공간에 홀로 남자 묘한 적막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결혼한 이후 알테어와 항상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지만 서로의 공간이 나뉘어져 있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같은 방을 쓰는 거에 놀라서 기겁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따로 방을 쓰는 게 어색하다니 우스웠다.
그런데 키득대며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알테어의 방과 연결된 작은 문이 덜컹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다가가 문을 열자 어딘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알테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눈을 껌뻑이며 분위기를 파악하려는데 알테어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문을 열려고 했던 건 아냐. 그냥 앞에서…….”
“앞에서……?”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을 뿐이야.”
“그러니까 왜…….”
어색한 침묵이 나와 알테어 사이에 흘렀다.
‘딱히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닌가……?’
괜히 문을 열었다 싶어져 쭈뼛대며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알테어가 황급히 손을 뻗어 닫히려는 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다, 닫으면 안 되나요?”
“……이번에도 뒤늦게 말했는데. 기분 상하지 않았나?”
“아.”
이제야 알겠다. 알테어는 지금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거다.
무슨 일을 추진할 때면 내게도 알려달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꼭 혼날까 봐 걱정하는 대형견 같아.’
알테어가 내 머릿속을 읽었다면 펄쩍 뛸 생각이었지만, 대단한 악당 새싹인 그에게도 내 머릿속을 읽을 능력은 없다는 걸 안다.
나는 어쩐지 속이 다시 간지러워지는 걸 느끼며 괜히 부루퉁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상했으면 어쩌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