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내는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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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아내는 될 수 있어.
2022.04.13.
“마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알테어가 사람을 써서 찾아낸 자료들을 하나씩 검토하고 있으니 마리가 조심스럽게 약을 준비해 주었다.
나는 불만스럽게 약을 노려보았지만, 마리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마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분까지 쥐고 있는 시녀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나.
포기하고 약을 마시자 입 안에 약의 쓴맛이 돌아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으으…….”
아무리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만 이 약은 유독 맛이 이상해서 먹을 때마다 입맛이 뚝 떨어질 정도였다.
“리온은 여기에 도대체 뭘 넣은 거래?”
빈 그릇을 돌려주며 투덜거리니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저도 잘……. 의사 선생님들은 저희 같은 시녀들에게 전문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시니까요. 특히 리온 님은 말수가 많지 않으세요.”
“그래? 나는 마리와 리온이 꽤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밤중에 알테어가 아파서 리온을 찾아갔더니 외출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던 마리가 함께이지 않았던가?
은근히 그 점을 지적하며 말꼬리를 늘이자 마리가 시치미를 뗐다.
“사용인으로서 마님께서 귀중하게 여기는 인재를 잘 모실 뿐이지요.”
“마리.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 곧 마리도 결혼하게 될 거고, 그때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잖아.”
귀부인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측근 시녀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주인이 기꺼이 좋은 혼처를 찾아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궁의 시녀들은 물론이고 귀족가의 시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귀부인의 측근 시녀가 되고자 하는 이유였다.
물론 마리가 그런 이득을 바라고 내 곁에 온 것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내게 많은 의지가 되어 준 사람이니 번듯하게 결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마리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데 처지가 여의치 않아 포기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실 이런 게 귀부인들의 은근한 즐거움이기도 하지.’
귀족가의 여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연애 결혼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딸의 의사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신랑감을 고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 양측의 이득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가까운 시녀를 번듯한 사람과 연애 결혼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못다 한 로맨스를 충족한다고나 할까?
내 눈이 즐거움으로 반짝이는 걸 알아챘는지 마리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정말로 아니에요, 마님! 전 아직 결혼 생각도 없고, 의사 선생님과도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아직은 마님을 곁에서 모시는 것만 생각하는걸요.”
“날 위해 주는 마리의 마음은 고맙지만 누군가와 연애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그렇게 부정할 필요 없어. 결혼도 그리 나쁜 게 아니고…….”
이어지는 이야기에 이번에는 마리가 즐거움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빙긋 웃었다.
“마님의 경우에는 ‘결혼도 그리 나쁜 게 아니다’가 아니라, ‘결혼은 아주 좋다’가 아닌가요?”
“으응……?”
“왜냐하면, 남작님께선 마님을 정말로 아끼시잖아요. 두 분은 늘 사랑이 넘치시죠. 이번 고소 건도 그래요. 아내를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분이 흔하진 않지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사랑이 넘친다니…….”
사랑?
생소하고도 낯선 단어에 가슴이 간지러우면서도 싸늘한 기분이었다.
알테어와 나는 사랑의 결실로 결혼한 게 아니었다.
서로가 원하는 게 명확했고, 그 부분을 충족하기 위해 알맞은 상대를 골랐을 뿐이다.
실제로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라는 말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내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는 걸 보고 마리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계획대로 풀린다면 마님께선 바인 후작의 작위를 가지실 테죠. 그럼 남편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시는 건데, 평범한 사내들은 그런 걸 못 견디지요. 영주님께선 그런 걸 감수할 만큼 마님을 아끼시는 게 아닐까요?”
“알테어는 황제에게도 주눅 들지 않는 사람이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지. 꼭 날 아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겐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거야.”
“물론 영주님께선 그렇게 올곧은 분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예요. 지켜보는 저는 확신합니다, 마님.”
마리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귀부인의 역할이 뭔지 안다.
남편의 애정보다 집안 살림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
결혼의 목적은 사랑이 아니라 후계를 잇기 위함이고, 그러니 알테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알테어가 날 많이 아끼고…… 사랑할까?”
알테어가 날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이 바람의 대상은 ‘아내’가 아니라 ‘나’이다.
알테어가 아내로서의 내가 아닌 그 자체로의 나를 사랑해줬으면 한다.
이건 평범한 귀족 부부가 아니다.
목숨만 부지하길 바라며 다급하게 올린 결혼이니 그런 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어느새 그런 생각을 하고, 욕심이 나고, 그걸 위해서 뭐든 열심히 하게 되고.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알테어를…… 아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일 거야.’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하자 가슴이 벅차면서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알테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소설을 통해서 모두 보았으니까.
알테어에게 제일 중요한 건 에일스포드였다.
부모님이 비극적으로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불안한 영지를 떠맡게 된 후, 알테어는 이를 악물고 그 땅을 지켜왔다.
그러니 에일스포드는 그의 전부, 그의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게 호의를 보여준 이유 역시, 내가 에일스포드를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일 거다.
알테어가 날 칭찬할 땐 언제나 ‘에일스포드의 발전은 네 덕분이다’라는 말이 꼭 들어간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에일스포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면.
그때도 알테어가 내게 보여준 호의를 계속 보여줄까?
‘난 알테어의 아내는 될 수 있어.’
하지만 그의 사랑은 될 수 없을 거야.
쓰디쓴 약을 먹었을 때보다 입안이 더욱 썼다.
“마님……? 제가 뭔가 실수를…….”
순식간에 가라앉은 내 모습에 마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어 마리를 안심시켰다.
‘유난 떨 거 없어.’
보통 귀족 부부라면 이렇게 산다. 특별히 불행한 척 기죽을 이유는 없었다.
‘아내로서 존중받고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좋은 삶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입가심으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은데.”
“예. 좋아하시는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내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게 느껴졌는지 비로소 마리가 안심하며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양 조심스럽게 창문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검은 그림자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 게 먼저였다.
“마님! 접니다! 쉿!”
익숙한 목소리였다.
겨우 진정하고 크게 뜬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니 블란이 잔뜩 지친 기색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했다는 표시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블란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비명을 지르시면 끝장이다 싶어서 그만…….”
“괜찮아요. 여기서 비명을 질렀으면 정말 큰일이 났을 테니까요.”
“네. 비오스케스 공작가의 방비가 너무 철저해서 뚫고 들어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나가는 건 또 어떻게 나갈지…….”
블란이 창밖을 힐끗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잔뜩 질린 얼굴이 어쩐지 우스워서 웃음을 흘리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블란은 이번 수도행에 포함되지 않은 기사였다.
이곳에서는 그가 아닌 카인이 기사들을 이끌고 대장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비오스케스의 방비를 뚫고 비밀스럽게 접근하는 대상이 알테어가 아닌 나라니.
그럴 만한 이유라면 하나뿐이다.
‘설마…….’
“선대의 죽음에 대한 정보를 찾은 건가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묻자 블란이 금방 심각한 얼굴이 되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혹시라도 불청객이 들이닥치지 않도록 문으로 다가가 잠금장치를 걸어 잠그고 목소리를 낮췄다.
“예. 마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고하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숙부님을 고소하게 되어서 귀환이 많이 늦어지게 되었죠.”
하지만 선대 남작 부부의 죽음은 과거다.
에일스포드로의 귀환이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블란이 이렇게 수도까지 찾아와 보고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블란이 쓸데없이 발품을 팔아 수도까지 오지는 않았을 터.
‘그럼 과거의 일이 현재까지 이어져 무엇인가 급박한 문제가 있다는 건가?’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모를 리 없는 블란이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선대 남작 부부의 죽음에 대한 게 아니었다.
“마님. 이번에 부모님의 보험금 문제로 숙부를 고소하신 거라 들었습니다.”
“블란도 알고 있지 않았어요? 알테어는 에일스포드에서부터 이 일을 알고 대책을 마련한 모양이던데요.”
비오스케스 공작과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으니까.
“정보는 모두 기사단을 통해 얻었을 테고…… 그럼 블란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도 그 사안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별문제가 아니었지요. 그런데 선대 영주님의 일을 조사하다가……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기시감이요?”
“네. 그것이…… 조사 과정에서 선대 영주님께도 거액의 사망 보험금이 있었던 걸 알아냈습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직접 조사한 블란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이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보험금의 수령인은 발하일 님의 부친이었습니다. 대단히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는데,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용히 지나갔지요. ‘높은 선’의 개입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건…… 우리 부모님의 경우와 너무 흡사해요.”
놀라서 손이 덜덜 떨렸다.
블란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너무 지나친 우연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 일이 두 번 있었는데, 하필 그 두 번의 사례에 연관된 사람이 부부가 됐다는 건 정말 이상해요.”
그런 경우 생각할 수 있는 답은 두 가지다.
정말로 우연이 겹쳤다든가, 사실은 이런 우연이 발생할 정도로 사례가 많다든가.
‘개연성을 생각한다면…….’
역시 후자가 더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아무래도 ‘높은 선’이 생각보다 더 큰 일을 벌인 모양인데요.”
한 번 개입한 건 돈에 욕심이 나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숙부가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면, 일부를 ‘높은 선’의 누군가에게 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면?
‘상대에게 몰래 자금을 불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뜻이야.’
그건 분명 떳떳하지 못한 이유였을 터.
서늘함이 등골을 스치고 갔다.
‘일이…….’
생각보다 커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