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불을 밝혀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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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불을 밝혀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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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불을 밝혀줬어.
2022.04.17.
“…….”
“…….”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나와 블란 모두 앞이 막막해져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같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 건지 난처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저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블란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나 역시 똑같은 생각이었다.
알테어에게 모두 털어놔야 한다.
‘하지만 알테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린 시절 겪었던 부모님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나 역시 부모님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매우 놀랐으니까.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애써 외면해 온 슬픔과 극복하지 못한 상실감이 다시 나를 덮쳐와 어쩔 줄을 몰랐다.
‘하물며 알테어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어.’
지금의 알테어는 과거의 슬픔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 무심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여전히 선대 남작 부부가 목숨을 잃은 화재 사고의 현장을 방치하고 있었다.
과거를 떨쳐낸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지난날의 흔적을 버려두진 않을 테지.
‘어쩌면 부모님의 죽음이야말로 알테어의 마음을 흔드는 가장 큰 약점인지도 몰라.’
깊은 곳에 숨은 트라우마는 강한 인간도 한번에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지금까지도 부모님을 잃은 그 날의 기억 때문에 피가 무서운 거고…….’
그래서 진상을 제대로 알아낸 뒤 알테어에게 조심스럽게 상황을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의혹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나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 알테어를 곁에서 지켜본 블란이라면 선대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원시원한 블란답지 않게 우물대고 있는 거겠지.
“그럼 제가 영주님께…….”
“아니에요. 내가 할게요.”
나는 먼저 나서려는 블란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일을 겪은 내가 말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아. 그렇겠군요. 이건 단순한 상황 보고가 아니니…….”
블란도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납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가족의 일은 가족이 전하는 게 가장 좋지요. 이럴 때 영주님께 가족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알테어는 블란도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걸요.”
“예. 물론 영주님께서 저희를 가족처럼 여겨 가까이 두시는 건 알지만…… 역시 ‘여기고 있는 것’과 ‘진짜 가족인 것’은 다르니까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아직도 가족이라는 말에 기분이 이상해서 심장이 울렁거리는 나보다는 블란을 비롯한 기사들이 더 가족 같은걸.
나보다 알테어를 더 오래 알았고, 더 많이 알고 있고, 또…….
줄줄이 이어지던 생각이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뚝 끊어졌다.
‘이건 어쩐지 기사들을 질투하는 것 같잖아.’
터무니없는 생각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겉으로도 그런 변화가 느껴졌는지 블란이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며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폈다.
“마님. 얼굴이 붉으십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셨던 건가요?”
다정한 기사의 걱정에 안 그래도 달아오른 얼굴이 더욱 뜨거워졌다.
에일스포드 사람들과 있을 때면 숙부의 괴롭힘 아래에서 잊고 살았던 애정들이 느껴져서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사람의 호의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건 어쩜 이렇게 부끄럽고 간지러울까.
“얼마나 열이 높으면 얼굴이 이렇게…….”
블란이 열을 재려는 듯 자연스럽게 내 이마로 손을 뻗었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서둘러 손을 거뒀다.
“어휴. 안나한테나 하던 버릇이. 민첩하지 않았더라면 또 영주님께 한 소리 들을 뻔했습니다.”
겨우 이런 일로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라는 얼굴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자 블란이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움을 잃지 않은 태도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농담이 아닙니다, 마님. 우리 영주님은 저희가 마님을 쳐다보면 왜 쳐다보냐, 마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왜 이야기를 나누느냐, 마님이 주신 걸 받으면 그걸 왜 받냐…… 그렇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분이시라고요.”
유쾌한 블란의 과장하는 투덜거림에 더욱 웃음이 커졌다.
그때 문 너머에서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
블란의 너스레에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목소리가 커진 탓에 작은 문으로 연결된 알테어의 방까지 소리가 넘어간 모양이었다.
블란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알테어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준비도 없이 그와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우리 둘 모두 놀란 상태였다.
“우, 우선 들어오라고 해야…….”
허둥대며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 순간 발이 꼬여 몸이 휘청했다.
“앗!”
짧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몸이 넘어갔지만, 다행히 옆에 있던 블란이 재빨리 손을 뻗어 나를 끌어 당겨준 덕분에 바닥을 나뒹구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블란과 나의 입에서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뒤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블란?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블란의 팔에 의지한 채 삐걱대며 고개를 돌리니 알테어가 어느새 열린 문 앞에 서서 싸늘한 얼굴로 블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블란이 난처한 얼굴로 나와 알테어를 번갈아 보았다.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알테어의 명령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다. 내가 지시한 일이다.
그러니 블란이 곤란하지 않도록 내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알테어. 내가 블란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블란이 여기에…….”
“네가 블란에게?”
알테어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부탁했지?”
“그게…….”
이런 분위기에서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라 우물대고 있으니 알테어가 척척 걸어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날카로운 분위기와 달리 나를 붙잡는 손길은 조심스러워서 묘한 기분으로 알테어의 얼굴을 살피니 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블란은 내 몸이 완전히 알테어 쪽으로 넘어가자 가볍게 두 손을 들며 한숨을 푹 내쉬고 내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보세요. 제 말이 맞죠?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알테어의 얼굴이 더욱 불만스럽게 구겨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는 알테어의 팔을 놓아도 문제없이 설 수 있었지만, 나는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 알아봐야 할 일이 있었어요. 그게…… 알테어의 부모님 일이에요.”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온 탓인지 불만으로 가득 찼던 알테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의문으로 물들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하지만 알테어는 날 위해 언제든 어려운 일을 해줬어.’
이번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던 알테어의 호의에 보답할 차례였다.
“아무래도 선대 남작 부부께서 돌아가신 그 화재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와…… 비슷한 사건에 연루된 걸로 보여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알테어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블란을 슬쩍 바라보니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님께서 리온이라는 의사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선대 영주님을 죽인 게 지금의 영주님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는 선대 영주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았기에 역시 살해당했다고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이야기를 듣는 알테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니까 당연했다.
블란은 흔들리지 않고 알테어 앞에서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읊었다.
긴 이야기에 혼란으로 가득 찼던 알테어의 눈빛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하.”
긴 이야기가 끝난 뒤 알테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한숨 같은 탄식을 토해냈을 뿐이다.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설정하려면 알테어의 결정이 필요했지만, 그를 재촉할 수는 없었다.
블란은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생각에 잠긴 알테어를 두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알테어의 방에서 잠시 기다릴 생각인 듯했다.
나 역시 블란을 따라 자리를 옮기려는데,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테어의 옆에 있어 달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자리에도 앉지 않고 우두커니 선 알테어의 근처에 멈춰 섰다.
블란은 잘 부탁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고, 나는 무거운 침묵 속에 알테어와 단둘만 남겨졌다.
알테어는 생각에 잠겨 주변에 누가 남았는지, 누가 떠났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언제나 날카롭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완전히 풀려버린 모습을 보니 그가 얼마나 복잡한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럴 땐 묵묵히 곁에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돼.’
나도 부모님을 잃고, 곁에 마리가 있어 줘서 큰 힘이 됐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슬픈 건 슬픈 것이고, 가득 넘치는 이 슬픔을 누군가와 나눌 수는 없다.
하지만 슬픔으로 가득 차 휘청거리는 사람이 고꾸라지지 않도록 든든하게 받쳐 주는 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알테어의 옆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밝았던 주위가 서서히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블란이 따로 손을 쓴 건지, 평소라면 불을 밝히기 위해 방에 왔어야 할 마리와 안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 어둠 속에 알테어를 세워 두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내가 불을 밝혀야겠어.’
원래는 사용인들에게 모두 맡기는 일이지만 숙부의 핍박에 초라한 방에 지내는 동안 스스로 등불을 밝히는 일은 많이 해 보았다.
나는 알테어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등불 앞에 섰다.
이런 고위 귀족의 저택에서는 대체로 마석을 이용한 등불을 많이 사용하는데, 비오스케스 공작가는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인지 곳곳에 구시대의 등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구를 사용해 불을 켜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타올랐다.
방 전체를 채우기에는 미약한 불빛이었지만 주변이 환해지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잠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다 몸을 돌리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코앞에 드리웠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알테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알테어.”
“계속 여기 있었어?”
생각보다 침착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알테어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뺨을 매만졌다.
간지러운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자 알테어가 픽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난 항상 내 아내가 연약하다고, 그래서 내가 지켜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은 네가 내 곁을 지켜주는군.”
“뭐라고 위로도 못 하고, 대책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 있기만 했는데요.”
“무슨 소리야. 방금 불을 밝혀 줬잖아. 그땐 아무도…….”
알테어가 내 등 뒤의 등불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이번에는 당신이 불을 밝혀줬어.”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가볍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진 뒤 바라본 알테어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우리’의 문제가 되었으니…… 더욱 철저히 파헤쳐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