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 작은 불빛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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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이 작은 불빛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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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이 작은 불빛이 뭐길래.
2022.04.20.
알테어는 걱정스럽게 자신의 곁을 지키다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 나디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보다는 괜찮다는 알테어의 말도 믿지 않고 ‘오늘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을게요!’라고, 이 거대한 남자를 어린애 취급하는 호기를 부리더니.
‘결국 본인이 먼저 잠들어 버리는 거냐고.’
알테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보이기 위해 가식적으로 지어낸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 상황이 유쾌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 심력을 많이 소모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체력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알테어와 달리 그의 부인은 체력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제나 전심전력으로 일한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약한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알테어는 그게 아주 신기했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사람 안에 그토록 굳건한 의지가 있다니.
알테어는 나디아가 깨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기척을 지우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계속 잠들었다간 다음 날 몸이 힘들 테니 침대로 옮겨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작은 얼굴, 작은 손, 가녀린 팔과 다리.
아내는 신기할 정도로 몸의 선이 여리여리해서, 거친 손으로 잘못 만졌다가는 똑 부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욕망에 못 이겨 밤마다 아내를 괴롭힌 건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알테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하며 나디아를 안아 들었다.
어느새 밤이 된 나디아의 방은 아주 어두웠지만, 그녀가 밝힌 등불 하나가 있어 시야는 충분했다.
알테어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등불을 바라보았다.
오늘 들은 이야기들이 충격적이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쩡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누구 하나 부모님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이건 내 것이다, 저것도 내 것이다 싸우는 소리만 들려 더욱 공허했었다.
어둠 속에 홀로 뚝 떨어져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자신을 마구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곁에서 기꺼이 불을 밝혀줄 사람이 있었고, 덕분에 그의 주변은 환했다.
물론 이제는 불빛 없이도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불빛 없는 삶이 편안하다는 건 아니었다.
‘이 작은 불빛이 뭐길래.’
이토록 안락하고 따스한 느낌을 준단 말인가.
“으음…….”
알테어는 자세가 불편한지 칭얼대며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나디아의 몸짓에 흠칫하고 정신을 차렸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서둘러 나디아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주니 어느새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아내와 관련된 일에는 왜 이렇게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게 되는지.
나는 어떤 일에도 무던하게 대처해 온 사람이었는데.
복잡하게 흐려졌던 생각은 결국 하나로 이어졌다.
‘내가 이 사람에게 마음을 줬으니까 그런 거지.’
그런데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면 사람이 이토록 흔들리게 되는 걸까? 이처럼 사소한 일에도? 다들 이런다고?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정답은 알 수 없었다.
‘내가 누구한테 마음을 줘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이게 평범한지, 아니면 지금 유난을 떨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렴 어때.’
이 사람은 내 아내인데.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을 내 가족.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알테어는 마음을 놓고 곤히 잠든 나디아 옆에 누웠다.
편안히 잠든 나디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평온함이 전염된 건지 노곤하게 몸이 풀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스스로 믿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주 편안했다.
상념이 사라졌다.
***
‘헉!’
나는 경악에 차서 눈을 번쩍 떴다.
‘분명히 알테어를 재워주려고 했는데…….’
일렁이는 불빛에 의지해 알테어를 바라보던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 내가 먼저 잠들어 버린 거야?!’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방 안은 아무도 없이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얼떨떨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문이 열리고 마리와 안나가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마님.”
“준비는 모두 해두었어요. 먼저 씻으시겠어요?”
안나와 마리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준비라니?”
“영주님께서 오늘 함께 외출할 테니 준비를 도우라고 하셨는데요. 이야기가 안 되셨나요?”
물론 듣지 못했다. 혼자 잠들어버렸으니 그럴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알테어가 외출을 계획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사건을 조사하려는 거야!’
홀로 외출하는 대신 함께 외출하겠다고 준비를 명한 건…… 이번에는 날 빼놓지 않고 함께 일하겠다는 뜻일 테고.
어쩐지 알테어에게 제대로 인정받은 기분에 뿌듯해졌다.
“아냐. 준비해 줘. 먼저 씻을게.”
“예, 마님.”
나는 마리와 안나의 능숙한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잠이 덕지덕지 붙은 몰골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 몰골이 멀끔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치장을 시작했다.
거울 앞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니 어딘가 열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화장이며 옷차림이 화려한 것 같았다.
‘어쩐지 내 모습 같지가 않네.’
아무래도 평소에는 수수한 분위기의 옷이며 화장을 선호하다 보니 작정하고 꾸미는 건 어색했다.
황궁 무도회에 갈 때도 화려하게 치장하긴 했지만, 그땐 무도회 차림이라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웠다고나 할까?
내가 어색해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마리가 빙긋 웃으며 푸른 리본을 머리에 대 주었다. 가운데 보석 장식이 박힌 리본이었다.
“오늘은 이 리본으로 할까요? 영주님과 수도에서의 첫 데이트니까 예쁘게 꾸미셔야지요.”
“데, 데이트?”
“네. 생각해 보니 제대로 데이트해 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영주님도, 마님도 바쁘셔서는…….”
마리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안나가 옆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오늘 데이트하실 거니까요! 저희만 믿으세요!”
‘아, 아니…… 오늘은 데이트가 아닌데…….’
하지만 두 사람을 말리기엔 너무 먼 길을 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야 금방 갈아입을 수 있지만, 화장이며 머리는 빨리 수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걸 보면 알테어가 실없는 아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함께 진상을 조사하려고 외출 준비를 명했더니 이렇게 화려하게 꾸민 채로 나타나면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을 거다.
‘안 되겠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전부 다시 해야 해.’
그렇게 결심하고 마리와 안나를 부르려는 순간.
“나디아.”
방과 방 사이에 난 문 너머에서 알테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준비는 다 되었나?”
“아, 그, 그게, 아직…….”
당황해서 허둥대며 대답하려는데 안나가 먼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리본 장식만 마무리하면 금방이에요, 영주님!”
‘헉!’
놀라서 안나의 말을 정정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알테어가 안으로 들어섰다.
날 바라보는 알테어의 두 눈이 평소보다 조금 커진 게 느껴졌다.
‘여, 역시 이게 아니었어!’
“다시 할게요!”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테어를 맞이했다.
다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리본을 달아 주려던 마리의 손을 머리로 강타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머리 장식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리가 답지 않게 당황해서 떨어진 리본 장식을 주우려는데, 알테어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두고 나가.”
“네? 하지만…….”
“괜찮으니까.”
머뭇대던 마리가 알테어의 단호한 태도를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안나도 눈치를 보며 재빨리 그녀를 따라나섰다.
알테어는 두 사람이 나가는 걸 본 뒤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바닥에 떨어진 리본 장식을 주워 들었다.
빤히 그 장식을 바라보던 알테어의 시선이 곧 내 얼굴에 닿았고,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억울함을 주장했다.
“마리와 안나가 오해한 모양이에요! 이, 이런 차림을 할 자리가 아닌데…… 두 사람을 다시 불러주면 얼른 갈아입을게요!”
“두 사람이 뭘 어떻게 오해했는데?”
“그러니까…… 알테어가 내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착각해서…….”
“뭐…… 틀린 말도 아닌데?”
“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니 알테어가 설명 대신 머리 장식을 손수 달아 주었다.
한 번도 이런 걸 해 보지 않은 탓인지 손놀림이 상당히 엉성하더니, 결국 리본 장식의 무게를 못 이겨 머리가 볼품없이 축 늘어졌다.
거울을 통해 바라보니 아주 엉망이었다.
“알테어…….”
원망스럽게 알테어를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그냥 달면 되는 거 아니었나?”
“제대로 위치를 잡아야 한다고요.”
나는 투덜거리며 머리 장식을 떼어내 다시 달았다.
마리가 해주던 것처럼 완벽한 모양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봐줄 만한 모양새로는 수정이 되었다.
이것 보라는 듯 자랑스럽게 알테어를 휙 돌아보니 그는 미안한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테어?”
“예뻐.”
“……네?”
“응?”
툭 튀어나온 말에 놀라서 되묻자 도리어 질문이 돌아왔다.
모른 체하는 거라기엔 너무나도 진실이 느껴지는 의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심코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 그런…….’
그게 더욱 진심처럼 느껴져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터져버리기 전에 얼른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난 어제 들은 이야기 때문에 조사할 게 생겨서 외출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그것도 틀린 건 아냐.”
데이트도 맞고, 조사하러 나가는 것도 맞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에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이야기했다.
“어젯밤에 블란과 추가로 이야기를 더 나눴다. 녀석은 새벽까지 정보를 모아왔고, 그 결과 ‘높은 선’의 중개인으로 생각되는 자를 만날 수 있다는 곳을 알아냈지.”
“중개인이요?”
“그래. 그 ‘높은 선’이라는 자가 얼마나 당당한지, 수도 한가운데서 대놓고 영업하더군. 물론 겉은 번듯한 갤러리로 꾸며져 있었지만……. 비밀을 알고 찾아온 자들에겐 보험사기를 설계해 주는 모양이야.”
“그, 그래서 우리가 지금 거길 간다고요?”
“그래. 우연히 갤러리에 방문한 귀족 부부인 양 굴겠지만, 상대는 우리를 모르지 않을 테니 반응을 보고 뭔가 얻을 수 있겠지.”
알테어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가지.”
***
우리는 마차를 타고 수도의 중심가로 달려갔다.
수도 한가운데에서 당당히 영업한다는 알테어의 말처럼, 문제의 갤러리는 번화가에 속해 있었다.
수도의 유명한 상점은 모두 이 거리에 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테지만, 알테어와 함께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분이 묘해졌다.
‘여긴…….’
이미 눈에 익은 곳이다.
내가 에일스포드 남작에 대한 소문을 내기 위해 돈을 마구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미술상이 있는 그 갤러리.
‘그땐 갤러리에 가려다가 오르카 황자가 화원으로 이끄는 바람에 못 갔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갤러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더욱 묘한 느낌이 나를 잡아끌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갤러리의 주인이라는 미술상이 밝게 웃으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소문의 에일스포드 남작 부부시군요! 두 분께서 저희 갤러리를 찾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제가 바로 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미술상, 드윈호퍼입니다.”
드윈호퍼!
엄청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디아’의 몸으로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소설을 통해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접했었다.
왜냐하면 드윈호퍼는…….
‘어둠 속에서 오르카 황자를 돕는 그의 비밀 결사대 중 하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