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이미 충분해.
(72/170)
93화. 이미 충분해.
(72/170)
93화. 이미 충분해.
2022.04.24.
상대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르카 황자가 공식적인 악당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악행이 이런 식으로 나와 연관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 한패였던 알테어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사건에도 연결되어 있다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 오르카 황자와 알테어가 끝까지 한패였던 건 아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오르카 황자는 알테어를 죽이려 했다. 그가 예전처럼 충성스럽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알테어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오르카 황자의 손에 죽는 순간 그의 목을 함께 가져갔으니 ‘주요 등장인물 전원 사망!’이라는 어마어마한 결말을 만들어낸 건 결국 알테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르카 황자와 알테어가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탓에 두 사람이 틀어지게 된 사연까지는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주변 인물의 이야기 아닌가?
소설을 열심히 읽을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땐 소심함을 고쳐보자면서 일부러 피폐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숨겨진 악역들의 사연에 호기심을 가질 여력도 없었고.
‘하지만 이런 사연이 숨겨져 있는 줄 알았다면 좀 더 그 부분을 궁금해할 걸 그랬어!’
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알테어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긴장한 탓에 이미 식은땀이 맺힌 상태였다.
“아, 알테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마자 고개를 돌린 알테어가 내 상태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안색이 안 좋은데.”
“그게…….”
내 상태에 반응한 건 알테어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드윈호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높은 선’의 정체를 폭로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하려던 말을 멈추고 알테어의 팔을 단단히 붙잡자 드윈호퍼가 가까이 다가왔다.
“부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안쪽으로 모실 테니 잠깐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드윈호퍼는 선량한 목소리로 호의를 베풀었다. 그의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비열한 보험 사기의 설계자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얼굴에 알테어는 혼란스러운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알테어도 속일 만큼 가장에 능한 자라는 뜻이었다.
‘우선 둘만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해.’
“그렇게 해요, 알테어. 잠깐 쉬고 싶어요.”
‘쉬고 싶다’는 말에 알테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알테어는 내가 좀처럼 이런 아쉬운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내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알테어가 거부하지 않고 드윈호퍼의 안내를 순순히 따랐다.
드윈호퍼는 우리를 갤러리 안쪽의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표면적으로는 고가의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니 귀한 손님을 모실 응접실 정도는 잘 마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시원한 물을 한잔 마셨으면 하는데, 부탁해도 될까요?”
나는 응접실을 정비하는 하인이 오기 전에 재빨리 드윈호퍼에게 물을 부탁했다.
“물론이지요. 제가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드윈호퍼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운 없는 내 모습에 딱히 경계하지 않고 순순히 자리를 비웠다.
이럴 때는 다소 맹한 인상의 얼굴이 꽤 도움이 된다.
나는 드윈호퍼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기운 없는 척을 집어치운 뒤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알테어, 혹시 주변에…….”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알테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드윈호퍼의 이름을 듣자마자 식은땀을 흘리더군. 아는 사람인가?”
“안다면 아는 사람인데…….”
일방적인 안면이라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애매한 대답에 알테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의 의문을 풀어줄 시간이 없었다.
드윈호퍼가 물을 가지고 오기 전에 얼른 내가 깨달은 사실을 알려야 했다.
“드윈호퍼가 보험사기를 설계한 자의 끄나풀이 확실한가요?”
“블란의 말로는. 상황이 절박한 귀족들에게 먼저 접근해서 ‘도움’을 준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렇게까지 안 알려졌다고요?”
“‘도움’을 수락한 자들은 공범이 된 셈이니 떠벌리고 다닐 리 없고, ‘도움’을 거절한 자들은 죽음으로 입막음 당했으니까.”
“…….”
냉정하게 사람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확실히 소설 속에서 보았던 오르카 황자의 솜씨다.
“……그렇다면 ‘높은 선’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요.”
“뭐?”
폭탄 발언에 알테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대체로 무표정인 알테어에게는 큰 변화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목소리를 낮췄다.
“드윈호퍼의 주인은 3황자예요.”
명확하게 상대를 지목하기까지 하니 알테어의 얼굴이 더욱 미묘해졌다.
“나디아. 당신이 헛소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물을 수밖에 없겠군. 어떻게 그걸 확신하지?”
“……헛소리라고 생각해도 할 말은 없어요. 난 어떤 근거도 댈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드윈호퍼의 주인은 3황자가 확실해요.”
나는 알테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충분한 근거를 댈 수 있다면 이미 이야기했을 거다.
하지만 오르카 황자의 비밀결사대는 말 그대로 비밀에 묻힌 집단이라 겉으로 드러난 연결고리가 전무했다.
그렇다고 소설을 읽었다느니, 거기에서 드윈호퍼와 3황자의 관계가 나왔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나.
‘내가 생각해도 쉽게 믿기 힘든 소리야.’
하물며 알테어는 정확한 근거와 정보에 따라서 움직이는 캐릭터다.
겉으로는 무력으로 모든 걸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뒤에서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든 상황에서만 나서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내 이야기가 알테어에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알아차린 사실을 알려야겠다며 조급했던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알테어를 바라보던 시선도 함께 땅으로 꺼졌다.
시야에 나와 알테어의 발이 보였다.
어떻게 알테어에게 내 이야기의 신뢰성을 증명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우선 알겠다.”
그때, 머리 위로 알테어의 무심한 말이 툭 던져졌다.
“‘높은 선’은 3황자란 말이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꺼낸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테어는 벌써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건지, 내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테어의 행동을 보니…….
“서, 설마 믿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제야 알테어가 상념에서 깨어나 날 쳐다보았다.
“믿으라고 한 말 아닌가?”
“맞아요. 맞는데! 그래도 이렇게 쉽게 믿으면 어떡해요? 난 아무런 근거도 못 댔잖아요!”
“……믿는다는 이유로 타박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알테어가 황당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근거라면 이미 충분해.”
“어디가요?!”
“네가 한 말이잖아. 네가 그 정보의 근거야.”
“…….”
간단한 말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소리였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도 기꺼이 신뢰할 정도로 알테어가 날 믿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가슴부터 타고 올라온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 건지 눈까지 뜨끈해질 정도였다.
“날 왜 믿어요…….”
“왜냐니. 넌 뭔가를 숨기고 거짓말할 위인이 못 돼.”
알테어가 피식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아내는 뭘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내가 큰 비밀을 숨기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온몸으로 신뢰받으니 죄책감에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른 것처럼 아파 왔다.
“흐음…… 난 방금 긍정적인 이야길 한 거 같은데.”
내 표정이 이상한 걸 보고 알테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자신이 말실수한 건가 고민하는 눈치라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긍정적인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반응이 왜…….”
알테어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입을 떼는 순간, 드윈호퍼가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부인을 위해 물을 가지고 왔습니다만…….”
기묘한 분위기를 느낀 건지 드윈호퍼가 묘한 눈으로 우리를 살피는 게 느껴져 나는 괜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얼른 물을 받아마셨다.
마시고 싶어서 요청한 물은 아니지만,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덕분에 나아졌어요. 보답은 아니지만 추천하는 그림을 구매하고 싶네요.”
“에일스포드에서 저희 그림을 구매해주신다면 영광이지요. 마침 좋은 그림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기 위해 꺼낸 말에 드윈호퍼가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박수를 치자 두 사람이 커다란 그림 하나를 들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림보다는 알테어의 얼굴에 집중하고 있었다.
알테어가 내게 굳은 신뢰를 선물했으니, 나 역시 내가 내린 결론에 대한 진짜 근거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거야말로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알테어에게 내가 이 세상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그래서 알테어가 누구인지도, 오르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안고 있던 진실이지만 알테어라면 어쩐지 지금처럼 대수롭지 않게 ‘그래?’라며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줄 것 같았다.
이건 단순히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알테어가 내게 확신을 준 만큼 나 역시 알테어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래. 저택으로 돌아가면…… 이야기하자.’
속으로 그런 결심을 새기는 순간, 알테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드윈호퍼가 가져온 거대한 그림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그림이길래 알테어가 이런 반응인 걸까.
의아함을 안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거대한 화폭을 가득 채운 것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불은 열정을 상징하지요. 성에 이런 그림을 걸어둔다면 강한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엄청난 명작이지요.”
거친 붓 터치로 켜켜이 쌓아 올린 그림은 분명 수작이었지만 소재가 좋지 않았다.
알테어에게 불은 열정이 아니었다.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알테어를 대신해 드윈호프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선량한 얼굴로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설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재 사고를 조작해 보험 사기를 저지른 자의 끄나풀이 이런 그림을 가져오다니.
이건 명백한 도발이 아닌가?
내가 드윈호프의 의도를 읽기 위해 애쓰는 사이 알테어는 말없이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접근에 열심히 그림을 설명하던 드윈호프의 입이 꾹 다물렸다.
알테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그림을 응시하다 곧 씨익 웃으며 드윈호프를 바라보았다.
“좋은 그림이군. 내가 사지.”
“……그러시겠습니까?”
드윈호프가 약간의 공백을 두고 되물었다.
알테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난 이런 걸…… 절대 사양하지 않거든.”
그의 눈빛에 묘한 서늘함과 열기가 동시에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