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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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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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2022.04.27.
돌아오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알테어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고, 나는 그런 알테어를 살피며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려보았다.
소설 속 악당이었던 알테어.
그 악당의 주군이었던 오르카 황자.
두 사람이 정면에서 부딪히게 되었으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알테어와 오르카가 대립했을 때, 소설 속에서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 선명히 알고 있는 탓인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으스스 떨렸다.
“무서운 일은 없을 거야.”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줄로만 알았던 알테어가 언제 떨고 있는 나를 본 건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높은 선’이 오르카 황자라면…… 황제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일을 크게 키울 수 없을 테니까.”
오르카 황자는 황족이다.
황제가 아끼는 자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아들이고, 황실의 명예와 권위를 중시하는 황제는 요란하게 제 아들을 내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명예와 권위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알테어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왜 오르카 황자가 이렇게까지 대담한 일을 벌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비로소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르카 황자는 황제를 믿고 있었던 거다.
만약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더라도 황제가 무슨 수를 쓰든 상황을 묻어 버릴 거라고.
아버지로서의 황제는 몰라도 황제로서의 아버지는 자신을 도울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오르카 황자는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치밀한 사람이야.’
과연 이야기 하나를 모두 뒤흔들었던 악당다운 배포였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숙부를 공개적으로 고소해서 일을 키운 건 황제의 입김을 빌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리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이 황제의 명예와 권위를 해치는 것이라면…….
그의 협조는 바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황제와 거래가 필요할 것 같군.”
“거래요?”
“이 일을 뒤에서 조용히 처리하는 대신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황제가 잡아뗄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겠지.”
거기까지 말한 알테어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해.”
“……내가 왜 ‘높은 선’이 오르카 황자라고 확신하는지 이유가 필요하군요.”
“이건 믿음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원하는 걸을 얻어 낼 무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알테어가 ‘나를 믿지 못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는 난처한 기분이 되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했고요. 그런데…… 내겐 그런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없어요.”
내 말에 알테어는 쉽게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상대가 오르카 황자라는 건 안다. 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한 정보는 없다.
중간의 연결고리가 텅 비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묘한 침묵이 내려앉은 순간, 마차가 비오스케스 공작저에 도착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결심을 다잡은 뒤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안으로 들어가서 말할게요.”
***
돌아오는 부부를 반갑게 맞이하던 마리와 안나는 우리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걱정스럽게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밖으로 내보낸 뒤 한동안 접근하는 사람이 없도록 단단히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마리와 안나는 대단한 임무를 받은 기사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든든하게 입구를 지켜주었다.
덕분에 나와 알테어는 조용한 가운데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마차 안에서 결심을 굳히긴 했지만 막상 알테어의 얼굴을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쭉 말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용기를 내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이야기?”
애매한 표현에 알테어의 고개가 갸웃,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어요. 전생의 삶에서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그게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죠. 처음에는 몰랐는데 환생한 뒤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알아가면서 깨닫게 됐어요.”
그러면서 나는 소설 속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 피폐 소설이었다는 이야기.
그 소설에서 오르카 황자는 반역을 주도하는 악역이었다는 이야기.
알테어는 그 오르카 황자의 수하였다는 이야기.
그래서 수도에서 벌어질 피바람을 피하고자 일부러 지방 귀족과 결혼했다는 이야기.
에일스포드에 와서 남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던 이야기.
열심히 살아 보겠다며 소설 속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석 광산을 찾아낸 이야기.
조금 전에 만난 드윈호퍼라는 자가 소설 속에서 오르카 황자의 비밀결사대였다는 이야기.
하지만 악역의 사정이 모두 소설에 나온 것은 아니라서 그에 대한 다른 정보는 거의 없다는 이야기.
알테어는 길고 긴 이야기를 끊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가 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러워 열심히 얼굴을 살폈지만, 표정으로는 어떤 힌트도 얻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워낙 기이한 이야기였기 때문인지 알테어에게서 쉽게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알테어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긴장은 더욱 커져갔다.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되는군.”
오래 기다린 것에 비해 알테어의 반응은 싱거웠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알겠어. 왜 처음에 날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오르카 황자를 왜 그렇게 신경 썼는지. 난 그게 전부 다른 이유 때문인 줄 알고…….”
알테어가 미간을 구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이건 전혀…….’
내 예상에 없는 반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믿지 않거나, 내가 아픈 건 아닌지 의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여태까지 왜 숨겼냐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테어의 반응은 셋 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내 이야기에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어어…….”
나는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안 놀랐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놀랐어. 아무리 나라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 놀라지.”
질문에 고민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정말로 놀라기는 한 모양이라 나는 더욱 황당해졌다.
“놀랐다면서 반응이 왜 이래요?”
“내 반응이 왜?”
“전혀 놀란 사람 같지가 않다고요!”
“내가 놀랐다고 펄쩍 뛰면서 발을 동동 구를 사람처럼 보여?”
알테어의 말에 자연스럽게 놀란 얼굴로 펄쩍 뛰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알테어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건 정말로 안 어울렸다.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푸흡. 그, 그건 너무 안 어울려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소파에 몸을 기대자 알테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제야 편한 얼굴을 하는군.”
“네?”
“이야기하는 내내 바들바들 떨었잖아. 꼭 신 앞에서 심판받는 죄인처럼.”
“그, 그거야…….”
솔직히 이야기하는 내내 그런 심정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고, 이야기가 사실이라 믿더라도 이 상황이 화날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을 뿐인데 능력 있는 아내라고 알테어를 속인 셈이니까…… 게다가 이런 이상한 사연을 가진 사람은 싫을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모든 진실을 공유할 필요는 없어. 부부는 분명 가까운 사이지만, 꼭 상대의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알테어가 차분하게 대꾸한 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재빨리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비밀을 만들겠다는 건 아니야. 단지 상황을 이해한다는 거다. 그런 큰 비밀은…… 쉽게 말하기 어려웠겠지.”
별로 따뜻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상황을 이해한다는 무덤덤한 그 반응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했던 수많은 고민과 피폐한 소설 속에 뚝 떨어졌다는 사실에 오들오들 떨면서 살았던 지난날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안전한 땅에 두 다리를 쭉 뻗은 듯한 안도감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마치 비옥한 토지에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 같았다.
그러자 이상하게 눈가가 뜨끈해지더니…….
“왜, 왜 우는 거지?”
삽시간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알테어는 내가 눈물을 쏟아낼 줄은 몰랐는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내 앞에 다가왔다.
당황하는 알테어를 보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라 그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눈물이 쏟아졌다.
후두둑. 후두둑.
도무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우는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쏟아내는 날 보며 한참이나 안절부절못하던 알테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 오늘 진짜 이상하죠. 이상한 소리나 하고, 갑자기 울고. 미안해요.”
훌쩍대며 사과하자 알테어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줬으니 오히려 난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지.”
“고맙다고요?”
“그래. 오늘 넌 나를 너의 세계 속에 들여놓은 거지. 감사하게도.”
알테어를 나의 세계 속에 들여놓았다고?
나는 눈을 껌뻑여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밝혀보았다.
흐렸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며 평소와 다름없는 알테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서…….
나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입술이 쪽- 하고 닿았다 떨어지자마자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려버렸다.
놀란 건 알테어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내 심장 소리인지 알테어의 심장 소리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열기를 담은 붉은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알테어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다고.
그 세계로 향하는 문은 어떻게 열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고 두렵지만, 그 마음 하나만은 아주 든든해서, 무엇보다 선명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 든든한 마음이 나를 강하게 만들 수도 있겠구나.
아마도 난 이토록 작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이 이상한 세상 속에 뚝 떨어진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