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님의 잠은 방해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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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마님의 잠은 방해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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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마님의 잠은 방해할 수 없지.
2022.05.01.
후두둑 쏟아내던 눈물을 멈추고 마음이 진정되니 이제야 민망함이 몰려왔다.
멀쩡하게 대화하다가 갑자기 울어 버리더니 다짜고짜 입술을 갖다 대질 않나…….
이 이상한 여자를 앞에 두고 알테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훌쩍대며 슬그머니 알테어의 눈치를 살피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정이 됐나.”
“……네.”
어물대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테어의 입에서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라니?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에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싶어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알테어의 웃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나를 의식한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최대한 웃음을 감추려 노력했지만 흘러나오는 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웃는 알테어는 처음 보는 터라 더욱 어리둥절했다.
“왜, 왜 웃는 거예요?”
“그야, 상황이 웃기잖아.”
알테어는 웃음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이제는 대놓고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그런 알테어의 얼굴을 보며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알테어는 평소에 미소를 지을 때면 엄청나게 무서운 얼굴이 되어 차라리 무표정인 게 덜 무서운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크고 시원하게 웃으니 음산하거나 살 떨리는 느낌 없이 따스함만이 느껴졌다.
알테어가 이토록 크게 웃는 건 흔치 않을 테니 정말 귀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알테어의 얼굴을 지켜보니 어느새 내 입꼬리도 슬쩍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미소는 점점 커져 웃음이 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와 알테어는 어느새 마주 보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주변은 소란한데 서로가 마주한 공간만은 안락해서 어떤 걱정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다.
***
알테어는 긴장이 풀린 건지 순식간에 잠들어 버린 나디아를 침대로 옮겨준 뒤, 등받이도 없는 작은 의자를 두고 그 옆에 앉았다.
사실 작은 의자라는 말은 다소 애매한 감이 있었다.
나디아가 그 의자에 앉았다면 크기가 적당하고 평범한 의자였을 테니까.
하지만 커다란 알테어가 앉기엔 확실히 작은 의자가 맞았다.
오늘 나디아가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놀라웠다.
매사 침착한 알테어도 크게 놀랐을 정도이니 대사건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알테어가 나디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느꼈던 감정은 놀라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바들바들 떨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나디아를 보며 놀라움보다 기묘한 뿌듯함과 간질거림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테어는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상대에게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나의 약점을 드러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알테어가 생각하는 인간이란 매우 교활해서, 상대가 호의로 열어준 부분을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알테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꽁꽁 숨겼고, 타인도 자신에게 깊은 곳을 털어 내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주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는 딱 그 정도의 관계.
알테어는 그게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언젠가 나의 이득을 위해 상대에게 등을 돌릴 때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나.
하지만 나디아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열어 알테어에게 보여주었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지.
알테어는 작고 연약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에게서 이렇게 큰 용기를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심장이 안 좋으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심장 근처를 움켜쥐고 있었던 건지 불쑥 나타난 블란이 신중하게 알테어의 가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테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쉿!’ 하고 블란에게 경고했다.
“아내가 잠들었다. 조용히 해.”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요.”
“그냥 입을 다물라는 소리였는데. 이해를 못 했어?”
“아니…….”
블란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열심히 정보를 찾아온 사람 취급이 왜 이렇습니까?”
“무슨 정보. ‘높은 선’이 오르카 황자라는 거?”
“예?”
무심하게 툭 튀어나온 말에 블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르카 황자요? 그게 무슨…… 황가의 누군가와 연관이 있겠다는 정도는 알아 왔는데…… 오르카 황자요? 네?”
블란이 횡설수설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알테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직 거기까지 알아 오지도 못했나. 아직 첩보 훈련이 덜 된 모양이군.”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돌아다녔는데 억울합니다.”
“그러니 더 문제다.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목표를 잡아 오지 못했으니 능력 부족이 맞지. 차라리 게으른 놈이었으면 개선의 기회라도 있을 터인데.”
“무슨 이런 궤변이…….”
블란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자 알테어가 다시 한번 ‘쉿!’ 하고 침묵을 강조했다.
“으음…….”
정말로 불만스러웠지만 마침 나디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이기까지 해서 블란은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이라면 몰라도 마님의 잠을 방해하는 건 안 되지.’
어차피 영주님은 잠을 얼마 안 자도 튼튼하기만 한 괴물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여리신 마님의 수면은 귀하게 지켜드려야 한다.
블란은 기사단 동료들이 들었다면 모두 쌍수 들고 동의할 생각을 되새기며 침묵을 지켰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나디아는 금세 편안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자 알테어가 훈련받은 자들이나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블란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황제를 만나야 한다. 은밀하게.”
“설마 황제를 납치해 오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군. 하지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좋지 않아.”
황제의 심기가 중요하지 않았다면 그를 납치할 수도 있다는 엄청난 소리를 하면서도 알테어와 블란은 무덤덤했다.
“재판을 앞둔 시기에 공개적으로 황제를 만나면 사람들은 우리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할 거다. 그러니 최대한 은밀하게 황제와 접촉해서 만남을 주선해.”
“황제는 한동안 외출 계획이 없습니다. 황궁 안으로 가야 합니다.”
“잠입은 너보다 카인이 낫겠군.”
“네. 정정당당하지 못한 일은 저보단 카인이 낫습니다.”
“그럼 카인에게 전달해. 임무가 떨어졌다고.”
“네.”
두 사람은 카인이 들었다면 펄쩍 뛸 평가를 태연하게 내린 뒤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토록 찾던 ‘높은 선’이 오르카 황자라는,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블란은 의문 하나 갖지 않았다.
어떻게 그 정보를 알게 되었는지, 그 정보가 확실하긴 한 건지.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블란은 자신의 주군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었다.
***
재판 일자가 다가오니 조금 초조해진 것인지 비오스케스 공작이 나를 찾아왔다.
“준비는 잘되고 있나? 사실 난 뭘 준비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하!”
비오스케스 공작은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외골수였다.
황제가 그를 장인으로 선택한 것도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는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알테어와 손을 잡고자 결정한 이유도 혼자 힘으로는 엉뚱한 놈에게 후계를 넘기게 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어서였을 터.
‘장인이라도 황제는 절대 비오스케스 공작을 돕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비오스케스 공작은 늘 정치적인 속셈을 안고 사는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매우 귀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작위가 높은데도 이처럼 욕심 없고 속내가 꼬이지 않은 사람을 찾는 건 힘들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위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체격과 무서운 인상 때문일 뿐이지 사실은 누구보다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니 마음이 아주 편안했다.
‘게다가 묘하게 알테어와 비슷한 느낌이야.’
겉모습은 다가가기 힘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게 아주 비슷했다.
물론, 알테어는 비오스케스 공작과 달리 속내가 상당히 꼬여 있지만…….
‘흠흠.’
나는 이 자리에 없는 알테어가 내 속마음을 알아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찔려서 빠르게 생각을 수습했다.
“저희 쪽에 유리한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제게도 정말 중요한 일이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 남작도 아주 바빠 보이더군. 내가 도울 일은 없나? 폐하와의 만남을 주선이라도 해봐?”
알테어가 은밀히 황제를 만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전해 들었다.
하지만 비오스케스 공작에게까지 그 계획을 공유하지는 않았을 터.
설마 공작이 무엇인가를 눈치채고 나를 떠보는 것인가 싶어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딱히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심함 때문에 이래저래 눈칫밥을 먹고 산 탓에 누군가의 속셈을 파악하는 건 자신 있었다.
나는 공작이 정말 도움을 주려는 순수한 호의에서 한 말이라 확인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판결을 내리실 폐하와 만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순수하게 진실로 재판을 이겨도, 그 만남을 이유로 진실을 폄하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생각해보니 그렇군.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역시 영특하군. 이렇게 현명한 이를 두고 엉뚱한 놈에게 작위가 넘어갔으니…… 법이 단단히 잘못된 게지. 우리 손녀도 아주 영특하거든.”
비오스케스 공작이 코웃음을 흘리며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은근슬쩍 손녀 자랑을 늘어놓았다.
“말을 어찌나 빨리 배우는지 몰라. 벌써 이 할애비를 보면 공손히 인사한다니까!”
그 손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애정 필터에 사로잡힌 팔불출 공작의 착각이 분명하겠지만, 이렇게 애정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썩 보기 좋게 느껴졌다.
“게다가 현 바인 후작은 정말이지 쥐새끼 같은 자라네. 사람들 옆에서 아부만 할 줄 알지, 귀족으로서의 품위나 의무는 쥐똥만큼도 생각 안 하지. 선대 후작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스치듯 흘러나온 부모님 이야기에 눈이 크게 뜨였다.
“저희 부모님을 기억하시나요?”
“당연하지. 수도 귀족 사회는 아주 좁다네.”
“하지만…… 그리 눈에 띄는 분들은 아니셨을 거라…….”
부모님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좋은 분들이었지만 유능한 귀족은 아니었다.
가문을 유지할 능력은 충분히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키워낼 인재는 아닌, 정말로 평범한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수도 귀족 사회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비오스케스 공작의 눈에 들었다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맞아. 눈에 띌 만한 사람들은 아니었지. 오히려 그래서 눈에 띄던걸?”
“네?”
“그렇지 않겠나? 제 꼬리를 자랑하는 화려한 공작새들 사이에 작은 참새가 돌아다니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겠지.”
“작은 참새…….”
“자네도 부모님과 이미지가 비슷하군. 남작이 싸고도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공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알테어의 과보호를 지적하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가 유난을 떨며 날 보호하는 건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반응을 보며 공작은 더욱 신이 난 듯 웃음소리가 커졌다.
“참으로 보기 좋은 부부라니까! 두 사람 모두 일찍 부모를 잃었으니 이젠 나를 아버지라 생각하고, 아니, 이건 너무 무거우니까…… 그래! 나를 삼촌이라 생각하고 의지하게!”
“어떻게 공작님을 감히 그렇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서둘러 사양하자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리 말하니 남작은 넙죽 그러겠다고 대답하던데.”
“네?”
“그런 걸 생각하면 남작도 참으로 특이해. 공작새도, 참새도 아닌 것이…… 꼭 까마귀 같군.”
공작의 즉흥적인 비유가 꽤 알테어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참. 오늘 자네를 보고 싶다며 찾아온 손님이 있는데.”
“손님이요? 저를 찾을 만한 사람이 없는데요.”
“그런가? 오르카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나?”
익숙한 이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3황자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