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우린 완벽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2022.05.08.
당연히 필요하다. 보험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숙부가 아니라 나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
‘숙부는 처음부터 ‘선대 후작 부부가 나를 수익자로 지정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의 거짓을 밝혀낼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스러웠다. 어떻게 저 서류가 오르카 황자의 손에 들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온갖 의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오르카 황자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건 확실한 원본입니다. 조작되지 않은 진짜 서류죠.”
흔들림 없는 말에 의문은 더욱 커졌다. 지금 부모님의 보험증서를 가지고 있는 쪽은 둘. 숙부와 보험사다. 대한민국에서는 언제든 보험증서를 다시 발급할 수 있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개념이 희미하다고나 할까? 특히 보험증서 같은 증명서들은 일종의 계약서처럼 취급되어 다시 발행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오로지 ‘원본’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중요한 서류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커다란 자료실을 만들어 원본을 묵혀두곤 했다. 별도의 자료 관리인을 두어 서류를 분류하고, 종이가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바인 후작가에도 선대의 선대부터 이어져 온 중요한 서류들을 보관하는 자료실이 있지만, 숙부가 내게 그 공간을 열어줄 리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수령인이 숙부가 아니라면, 내가 고소를 선언한 타이밍에 이미 서류를 훼손하거나 없애 버렸을 것이 분명하니 그쪽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안고 있을 바보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오르카 황자가 손에 넣은 보험증서가 진짜라면 이건 분명 보험사 쪽에서 얻은 것일 테다. 하지만 보험사도 본인이 아니라면 절대 증서를 내어 주지 않는다. 이미 보험사에 서류를 요청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당사자가 직접 요청할 수 있겠냐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보험증서를 보여 주었을 때 자신들이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우리는 보험증서대로 지급을 처리했다! 분명 당사자에게 보험증서를 주었으니 그걸 확인하면 될 것 아니냐? 여기 당사자가 보험증서를 받아 갔다는 확인증도 있다!’라는 식이라 도무지 방법이 없었는데. 그런데 뜬금없이 이걸 오르카 황자가 가지고 있다니? 생각하니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그가 보험사와 손을 잡고 상황을 조작한 ‘높은 선’이 확실하니 서류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먼저 이걸 어떻게 얻었는지 알려 주세요.”
“음. 그 말은 이걸 제시했는데도 여전히 날 의심한다는 뜻이로군요.”
오르카 황자가 곤란한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과정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전에 남작 부인이 왜 날 이렇게 의심하는지 알고 싶군요. 처음부터 당신은 날 크게 경계했잖아요.”
“그건…….”
“내 팬이라는 말도 사실 거짓 핑계일 뿐이고.”
작게 한숨 섞인 목소리에서 묘한 무게가 느껴졌다. 오르카 황자의 얼굴은 마치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깨달은 사람 같아서 나까지 기분이 묘했다. 오르카 황자는 정말로 내가 그의 팬이길 바랐던 건가? 어쨌든 지금은 다른 이야기가 더 중요했다. 오르카 황자에게서 진실을 얻으려면, 나 역시 어느 정도 진실을 열어주어야 한다. 진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다.
“전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저는 그런 무서운 일에 휘말리기 싫었고요. 그래서 거리를 두고 싶어서…….”
“흠. 어떻게 내가 ‘높은 곳’을 원하는 걸 알았죠? 첫 만남에서부터 그걸 알아차리는 건 이상하잖아.”
오르카 황자가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
“아니면 내 얼굴에 반골의 관상이라도 있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카 황자는 큰 사건을 일으킬 관상이 절대 아니니까. 어느 순간부터 오르카 황자는 내게 자신의 야심을 은근슬쩍 드러내곤 했다. 타인을 향해 쓰고 있는 가면이 내겐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이후부터인 것 같았다. 그는 종종 나를 탐색하듯 바라보며 위험한 발언을 슬쩍 던지곤 했다. 지금도 그런 말을 던질 때와 비슷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소설 속에서 악당인 네가 황제가 되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걸 다 봤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타이밍이니, 적당한 거짓말을 꾸며낼 시간이었다.
‘난 거짓말에는 자신 없어.’
그러니까 ‘다른 진실로 돌려 막기’ 전법을 쓰기로 했다.
“조용히 살았지만 저도 후작가의 레이디였어요. 부모님께선 데릴사위를 들여 제게 가주 역할을 맡기실 생각이었고요. 아버지께서 아시는 건 저 역시 다 알았어요.”
은근슬쩍 공을 아버지에게 돌리는 말이었다. 부모님께서 데릴사위를 들여 내게 가주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는 것도, 아버지께서 본인이 아시는 걸 내게 모두 알려주셨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르카 황자의 야심 따위 모르셨지.’
아마 이 세상의 누구도 몰랐을 이야기다.
“그 말은, 후작이 나의 야망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주 거하게 헛다리를 짚은 거지만, 오르카 황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가 그렇게 느끼도록 내가 판을 짰다. 별다른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자 오르카 황자는 금세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선대 바인 후작도 상당히 조용했는데 말이야. 하긴. 원래 조용한 사람들이 제일 무서운 법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기 어려우니까.”
만약 아버지가 귀족 사회에서 눈에 띄게 영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었다면, 오르카 황자는 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행동반경이 너무 뻔히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분이셨다. 그렇기에 오히려 오르카 황자를 속일 수 있었다.
“제 이유를 알려 드렸으니, 이젠 전하의 과정을 들려주셔야지요.”
“맞습니다. 그런 거래였지요.”
오르카 황자는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이 해결되어서인지 다소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리 복잡한 방법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럼요?”
“훔쳤어요. 보험사의 자료실에서 슬쩍.”
“……네?”
오르카 황자라면 엄청난 공작을 통해 서류를 얻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너무도 단순무식한 방법에 입이 떡 벌어졌다.
“때론 단순한 방법이 가장 확실하니까요.”
황당해하는 날 보며 오르카 황자가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잖습니까. 내가 서류를 빼돌리려고 사람을 보낸 날, 당신 남편도 보험사의 자료실을 털러 왔던데.”
“네, 네에? 아, 알테어가요?!”
“정확히는 그의 수하인 기사요. 다소 가볍고 경박해 보이는…….”
오르카 황자가 이름이 잘 기억 안 난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물론 나는 그 짧은 설명만으로도 보험사의 자료실을 털러 간 기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인이요.”
“아.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내 수하가 서류를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봤다고 하더군요. 아쉽게도 당신 남편이 한발 늦었네요.”
경쟁에서 이긴 것이 즐거운지 오르카 황자가 생글대며 서류를 가볍게 흔들었다.
“참 신기하고 재밌지 않습니까? 당신 남편과 내가 비슷한 전략을 짜다니. 나와 참으로 많이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질감을 형성하는 오르카 황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르카 황자와 알테어는 절대 가까워지면 안 되는 사이! 나는 오르카 황자가 알테어를 향해 느끼는 내적 친밀감을 잘라내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데요!”
“그런가요? 나는 썩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르카 황자가 뭐가 그리 다른지 말해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그가 납득할 수 있도록 열심히 다른 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온통 다른 점뿐이죠.”
“그래요?”
“네. 알테어는 아주 무섭게 생겼잖아요. 그에 비해 전하께서는 산들바람같이 부드러운 외모이시고요. 또 성격은 얼마나 다른가요? 알테어는 답답할 정도로 외골수인데 전하께서는 융통성 있지요. 완전히 달라요.”
‘네가 훨씬 더 낫다! 그러니까 내 남편에게 내적 친밀감 같은 건 느끼지 마!’라는 의도로 일부러 오르카 황자를 띄워 주니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뭐.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어떻게든 납득한 것인가 싶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이 이야기에 대한 남작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오르카가 내 등 뒤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 남작의 생각?’
이건 마치 알테어가 뒤에서 내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 같은……. 기분 탓이겠지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등 뒤에서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말로…… 기분 탓이겠지…….’
알테어는 지금 외출 중이지 않나?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삐걱대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세가 점점 더 선명해지더니, 완전히 고개를 돌리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삐딱하게 서재의 문을 붙잡고 있는 알테어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언제부터 있었어요?”
내가 당황해서 허둥대자 알테어가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외모의 융통성 있는 황자 전하께서 협잡하게도 도둑질을 하셨다는 이야기부터 들었지.”
세상에. 전부 다 들은 거야? 어쩔 줄 몰라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으니 알테어가 내게서 시선을 돌려 오르카 황자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황자의 손에 있는 서류에 꽂혀 있었다.
“장물은 공식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습니다.”
“그렇지. 훔친 물건을 감히 어떻게 폐하 주관의 재판에 증거로 내밀겠습니까.”
알테어의 지적에도 오르카 황자는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말이야. 남작도 나와 같은 짓을 하려고 했잖습니까? 그러니 이걸 어떻게 써먹을 건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일 것 같은데…….”
오르카 황자가 알테어의 속내를 떠보려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알테어는 묵묵히 오르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묘한 대치는 피식 웃음을 흘린 오르카 황자에 의해 깨졌다.
“물론 장물이 공식적인 증거는 될 수 없지만…… 황제 폐하가 주관하는 재판장만이 전쟁터가 아니지요.”
오르카 황자가 서류를 알테어의 가슴팍에 턱 갖다 대며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이걸로 여론을 만들면 됩니다. 소문을 만들고, 아군을 만들어, 재판장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 남작, 당신이 그린 그림도 아마 이거였겠지?”
우린 완벽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 확신이 오르카 황자의 눈에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