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어쩌라고! (79/170)


100화. 어쩌라고!
2022.05.18.


16550938049194.jpg

 
오르카 황자는 약속대로 다음 날 불쑥 비오스케스 공작저로 찾아왔다.

16550938049201.jpg

“드윈호퍼가 남작에게 팔았다는 그림이 어떤 거죠?”

그러고는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잊은 사람처럼 태평하게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

알테어는 그런 오르카 황자를 잠시 눈여겨보더니, 군말 없이 갤러리에서 구매해 온 그림을 보여 주었다.

거대한 화폭 안에서 불길이 춤을 추는 듯 역동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르카 황자는 물론이고, 이미 이 그림을 질리도록 살펴보았던 나와 알테어까지도 홀린 듯 그림에 빠져들 정도로 묘한 힘이 있는 작품이었다.

과거의 사연이 없었다면 좀 더 순수하게 좋은 그림으로 평가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얼굴을 살폈다.

걱정과 달리 그는 차분하고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16550938049205.png

“이 그림을 누가 내놓았는지 알아내신 모양이군요.”

16550938049201.jpg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찾아오겠다고.”

알테어의 말에 오르카가 빙긋 웃으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16550938049201.jpg

“남작은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한 배를 타게 될 것 같습니다.”

한 배를 탄다.

그 말은 곧 오르카 황자와 우리의 적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1655093804922.png

‘오르카 황자가 적으로 표현할 사람이라면…….’

16550938049201.jpg

“큰형님께서 이렇게 미술에 조예가 깊으신 줄 미처 몰랐지 뭡니까. 드윈호퍼에게 그 소릴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간접적으로 돌려 말했지만, 속에 담긴 뜻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림을 보낸 사람이 1황자라면, 드윈호퍼를 앞잡이로 내세운 설계자 역시 그라는 뜻이다.

1655093804922.png

‘1황자라니.’

소설을 수십 번 읽은 나도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이야기가 주인공 위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곁가지로 취급되어 잘려 나간 듯했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곁가지 취급하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공들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한 로맨스 소설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정치적 상황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으레 ‘숨겨진 설정’ 같은 것으로 작가의 수첩에만 남게 되겠지.

문제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게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1655093804922.png

‘이런 식으로 숨겨진 설정들이 얼마나 많을까?’

주요 인물에 속했던 1황자의 일탈과 악당 공작 알테어의 과거뿐만 아니라 비중이 쥐똥만큼 작았던 ‘나디아’에게도 숙부의 음모라는 숨겨진 설정이 있지 않았나.

당연히 내가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이런 식으로 ‘숨겨진 설정’을 발견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앞으로의 전개를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무기인데 이렇게 모르는 이야기들이 계속 튀어나오면…….

‘나’라는 사람의 무기가 무뎌지게 되고, 결국 ‘나’의 가치가 바닥에 뚝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나의 쓸모는 뭘까?

절로 무거워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하는 사이 알테어와 오르카 황자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16550938049205.png

“꼭 같은 배를 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알테어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불량한 태도에 겁을 먹고 물러났을 테지만 오르카 황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악당 공작의 상관이었던 악당 황자답게 그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했다.

16550938049201.jpg

“굳이 한배를 안 탈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목적지가 같으면 합승하는 게 낫지요. 뱃삯도 나눠 낼 수 있으니 좀 더 편하게 도착할 수 있겠죠.”

16550938049205.png

“단순히 같은 목적지에 닿자고 한 배를 타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1차 목표는 이 사달을 일으킨 1황자를 무너뜨리는 것이지만, 오르카 황자의 목표는 더 멀리 있었다.

황위.

그와 한 배를 탄다는 건 곧 반역자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오르카 황자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없다는 듯한 태도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16550938049201.jpg

“끝까지 같이 가자고는 안 합니다. 두 사람은 목적지에 닿으면 내리세요. 함께 가는 동안 나쁘지 않았다면 안 내리고 같이 갈 수도 있을 테고.”

오르카 황자의 말에서 묘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분명 우리가 중간에 내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과 함께하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알테어는 그런 확신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의견을 구하려는 듯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덩달아 오르카 황자의 눈길까지 나를 향했다.

나의 대답에 앞으로의 전개가 걸려 있다고 생각한 건지 오르카 황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16550938049201.jpg

“원흉을 응징하는 일에만 집중합시다. 더 확실하고, 더 철저하게. 그렇게 응징할 수 있도록 내가 돕지요.”

이건 괜한 허세가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오르카 황자가 자기 적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생각하면 말이다.

1655093804922.png

‘그래. 우선은 같은 목적지까지만.’

오르카 황자가 중요한 서류를 가져다준 것도 사실이고, 진짜 ‘높은 선’을 찾아낸 공로도 있으니 이 정도의 동행은 가능하겠지.

반역이라니. 그런 것까진 무서워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 결말이 소설에서처럼 알테어의 목이 쓱싹 날아가는 거라면 더더욱.

1655093804922.png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내릴 거예요.”

16550938049201.jpg

“물론입니다. 난 가는 사람 안 막아요.”

뜸 들이며 나온 대답에 오르카 황자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16550938049201.jpg

“한 배를 타게 된 기념으로 악수라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황자가 청한 악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머뭇대며 손을 뻗으니 알테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16550938049205.png

“악수는 저랑 하시죠.”

알테어는 오르카 황자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꽤 강한 힘으로 붙잡았는지 오르카 황자가 드물게 미간을 찌푸린 채 알테어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댔다.

16550938049201.jpg

“남작. 사람들한테 쪼잔하다는 소리 안 듣습니까?”

16550938049205.png

“전혀요.”

16550938049201.jpg

“다들 뒤에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 겁니다. 아내의 악수까지 단속하는 남편이라고요.”

16550938049205.png

“글쎄요. 그게 쪼잔한 거면…….”

알테어가 오르카 황자의 손을 놓아주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16550938049205.png

“그냥 쪼잔하다는 소리를 듣고 말겠습니다.”

 

***

드디어 재판일이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재판에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마리와 안나는 나보다 더욱 긴장해서 결연한 태도로 단장을 도왔고, 비오스케스 공작도 걱정되는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나 역시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비오스케스 공작저를 나와 마차를 탈 때까지는 그래도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길을 달려 재판장에 가까워지자 주체할 수 없이 긴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재판 준비는 완벽했다.

숙부가 상상하지도 못할 증거를 확보했으니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655093804922.png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숙부도 보통 사람은 아닌 데다, 그의 뒤에는 1황자가 있다.

1황자는 자신의 치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숙부의 죄도 덮으려고 할 터.

1655093804922.png

‘재판이 끝나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해내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재판장에 선 내 모습을 떠올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황제가 주관하는 재판은 공개재판이 원칙이라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들 것이 뻔했다.

거대한 재판장을 가득 채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등 뒤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긴장된 분위기와 달리 알테어는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듯 태연해 보였다.

애초에 긴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말이다.

1655093804922.png

“알테어. 너무 멀쩡한 거 아니에요?”

나는 부러움과 신기함, 또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팔꿈치로 알테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벌써 심장이 두근대며 소란스러운데 혼자만 이렇게 태연하다니. 정말로 얄미웠다.

1655093804922.png

“난 긴장되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얼마나 긴장되는지 심장에서 시작된 박동이 손끝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심장이 손끝에 달린 것 같았다.

쿵. 쿵.

두 손을 내려다보니 정말로 손이 쿵쿵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말이다.

16550938049205.png

“걱정하지 마.”

알테어가 무심하게 툭 말을 던지며 자신의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그의 손은 아주 크고 단단해서 쿵쾅대던 손이 금세 고요해졌다.

16550938095078.png

 

1655093804922.png

“걱정은 안 해요. 그냥 긴장되는 거지.”

16550938049205.png

“걱정하지 않는데 왜 긴장이 되지?”

1655093804922.png

“걱정과 긴장은 별개의 문제라고요…….”

나는 소심하게 반박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자 알테어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내 손을 토닥여주며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16550938049205.png

“어쩌라고. 알 게 뭐야.”

1655093804922.png

“네?”

16550938049205.png

“긴장을 풀어야 할 거 아냐. 자. 따라 해. 어쩌라고. 알 게 뭐야.”

어떤 큰 문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는 마법 같은 주문.

1655093804922.png

“어, 어쩌라고. 아, 알 게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알테어의 태도를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평소에 절대 꺼내지 않는 말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16550938049205.png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겠어? 좀 더 강하게 나가야지.”

1655093804922.png

“마, 맞아요. 이런 태도로는 안 되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이 없을 때도 이렇게 머뭇대는데,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닿을 때는 더더욱 쪼그라들겠지.

반드시 이 소심함을 떨쳐내야 한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외쳤다.

1655093804922.png

“어쩌라고! 알 게 뭐야! 꺼져 버려!”

16550938049205.png

“……꺼지라는 말은 안 알려줬던 거 같은데.”

1655093804922.png

“앗!”

빤히 쳐다보는 알테어의 시선에 실수를 깨닫고는 민망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1655093804922.png

“그, 그게 강하게 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16550938049205.png

“알려 주지 않은 것까지 응용하다니. 역시 훌륭한 학생이군.”

알테어가 기특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왜인지 모르게 애정이 묻어나는 손길에 그렇지 않아도 빨간 얼굴이 더 빨개졌다.

달아오른 뺨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 손으로 뺨을 감쌌지만, 이미 손도 후끈하게 달아올라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16550938049205.png

“이러다 얼굴이 터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알테어가 살짝 미소가 걸린 얼굴을 하곤 내 뺨으로 손을 뻗었다.

뜨거운 내 손을 비집고 들어온 알테어의 손은 기분 좋게 서늘했지만, 달아오른 뺨의 열기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1655093804922.png

‘오, 오히려 갈수록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아…….’

남자애 손을 처음 잡아보는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까워진 거리에 가슴이 떨리는지.

나는 후다닥 몸을 뒤로 빼 알테어의 손길을 피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에 알테어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아서,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1655093804922.png

“안 되겠어요. 재판이 끝날 때까지 접촉 금지예요.”

16550938049205.png

“……어째서?”

알테어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나로서도 최후의 수단이었다.

1655093804922.png

“알테어가 날 자꾸 홀리니까 생각이 어지러워지잖아요.”

16550938049205.png

“뭘, 내가, 널 홀려?”

1655093804922.png

“네! 홀려요!”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췄다. 재판장에 도착한 것이다.

1655093804922.png

“그러니까 접근 금지하는 걸로 해요. 알았죠?”

나는 알테어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후다닥 마차에서 내렸다.

에스코트도 없이 우당탕탕 마차에서 내리는 귀부인을 보며 마차 문을 열어 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런 시선은 별문제도 아니었다.

어쩌라고! 알 게 뭐냐!

숙부와의 담판이 걸린 재판이 코앞이었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다.

1655093818984.pn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