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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자백이나 다름없지. (80/170)


101화. 자백이나 다름없지.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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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를 받고 씩씩하게 재판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얼굴에 꽂혔다.

눈에 익은 귀족들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다수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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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가 엄청나.’

슬쩍 바깥을 바라보니 오늘 재판이 어떻게 결론 날지 궁금한 듯 미처 안에 들어오지 못한 구경꾼들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재판장 앞에 몰려 있었다.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인파에 당당하던 마음이 금방이라도 쪼그라들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알테어에게 배운 마음가짐을 되새겼다.

어쩌라고!

알 게 뭐야!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그 말을 계속 곱씹으니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맞은편을 보니 숙부는 다소 초조한 얼굴로 탁자에 잔뜩 쌓인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평범한 재판에서는 변호사를 대동할 수 있지만,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재판에서는 당사자가 혼자 나서야 한다.

감히 황제 앞에서 세 치 혀를 놀리는 사태는 막겠다는 의도다.

판결을 황제가 직접 내리는 데다 누구에게나 참관을 허용하니 여러모로 특별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재판은 결국 분위기 싸움으로 흐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이든 기세가 중요한 법이니까.

황제가 양측의 변론과 자료를 가지고 재판관들의 조언을 구하긴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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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유리해.’

외모만 봐도 그렇다.

풍채 좋은 숙부와 어린 여자인 나.

이미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있는 후작과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작위와 재산을 모두 빼앗긴 어린양의 싸움이니…….

내 쪽이 구경꾼들의 동정을 사기 훨씬 쉬운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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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증거도 명백해.’

부모님의 죽음이 숙부에게 넘어간 건 상속법상의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니 동정밖에 얻을 수 없겠지만, 보험금과 관련한 부분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부모님은 보험에 가입했고, 작위 상속과는 별개로 수령인을 딸인 나로 지정해 두었다.

그건 이미 치안대의 손에 들어간 보험증서에 확실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갑자기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왜 그런가 싶어 주위를 살피자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재판장인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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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자?’

1황자가 비서처럼 딱 붙어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는 중에도 1황자는 황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드윈호퍼가 나가떨어진 뒤 상황을 파악한 1황자가 방어를 위해 황제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명백한 아군을 발견한 숙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1황자는 애써 숙부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지만, 속사정을 아는 내게는 두 사람이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는 게 분명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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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 쪽에는 불리한 일이지.’

황제는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들 1황자가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장자이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2황자가 호시탐탐 1황자를 견제하며 기회를 노리고는 있었지만, 1황자에게 큰 문제만 없다면 그에게 차례가 돌아올 일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3황자인 오르카는 말할 것도 없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지 오래였고, 황제 역시 1황자를 차기 황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짐작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황제가 오늘 이 자리에 1황자와 함께 나타난 것도 일종의 후계 교육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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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드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시종의 외침에 구경꾼들을 포함한 재판정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나와 숙부도 마찬가지였다.

명백한 차기 황제가 내 편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숙부는 조금 전까지의 초조한 기색을 모두 지운 채 편안한 얼굴이었다.

날 바라보는 숙부의 시선에 비웃음이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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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착석하라.”

황제의 짧은 명령에 어수선했던 재판장이 한순간에 정리됐다.

사람들은 반듯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앞으로 진행될 재판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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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으로 불온한 사건에 대한 고발이 접수되어 직접 해결하고자 한다.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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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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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고소장에 이렇게 작성했군. 숙부인 바인 후작이 그대의 부모인 선대 바인 후작 부부의 죽음으로 발생한 보험금을 갈취하였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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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는 결혼해 바인 후작가를 떠난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보험에 가입하셨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긴장되어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너무 씩씩하게 상대를 고발하는 것보다는 적당히 긴장된 티가 나는 것이 더 좋기도 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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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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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측은한 여자애의 호소가 구경꾼들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곳곳에서 숙부를 향한 비난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이 워낙 화제였던 터라 구경꾼들 모두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실제로 피해자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숙부가 괘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숙부는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난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강하게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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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폐하! 저는 보험금을 갈취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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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그대에게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네.”

황제의 싸늘한 지적에 숙부가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황제의 곁에 앉은 1황자를 바라보고는 다시 힘을 얻은 건지 억울하다는 호소를 계속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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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제가 얼마나 억울하면 이러겠습니까?”

숙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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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모를 잃은 조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었습니다. 후작가에서도 안 쫓아내고 잘 보살피다 좋은 혼처에 시집까지 보내 주었지요. 마석 광산을 소유한 부호, 에일스포드 남작이 저 아이의 남편입니다. 그 혼처는 제가 찾아주었고요!”

마석 광산. 부호. 혼처.

몇 가지 단어에서 구경꾼들이 웅성댔다.

내가 알테어와 결혼할 때는 에일스포드가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이었지만, 숙부는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구경꾼들의 동요에 기운을 얻은 건지 숙부의 이야기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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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의 보험금을 갈취한 무뢰한이라면 조카를 이렇게까지 챙겼겠습니까? 진즉에 가문에서 내쳐서 이런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못 얻게 했을 겁니다. 은혜를 이렇게 원수로 갚다니…… 정말이지…….”

숙부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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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잘 따르던 조카입니다. 결혼한 뒤에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지요. 혹시 남편에게 꼬여 넘어가 바인 후작가의 재산을 빼내려고 한 게 아닌지 영 의심스럽습니다, 폐하!”

황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 숙부가 이번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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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려무나. 네 남편의 꾐에 넘어가서 오랜 명문가인 우리 가문에 먹칠을 할 생각이냐? 응? 돈이 필요하다면 줄 수 있다. 소중한 조카에겐 전혀 아깝지 않아. 하지만 이런 모욕은 참을 수가 없어!”

나뿐만 아니라 알테어까지 나쁜 놈으로 엮어 내리는 기묘한 화법에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나를 측은하게 보던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부부 사기단을 보는 듯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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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님. 저는 돈이 필요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숙부님의 말씀처럼 에일스포드 남작은 마석 광산을 소유한 부호인데, 고작 돈이 필요해서 제가 이러는 걸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면…….

눈물에는 눈물이지!

나는 최대한 슬픈 생각을 쥐어 짜내며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숙부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눈물의 흔적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숙부와 달리, 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에 갖다 대자마자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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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우는 척’을 하려고 한 숙부와 달리 난 정말 슬펐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면 절로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슬픔에 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슬픔을 한쪽에 묻어두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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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모님께서 제게 남겨 주신 정당한 유산을 받고 싶을 뿐입니다. 그건 단순히 돈이 아니에요. 부모님께서 남겨 주신 사랑인데…… 그걸 가로채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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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가로채긴 누가 가로챘다는 거야!”

나의 눈물에 구경꾼들의 분위기가 바뀔 것처럼 보이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숙부가 우는 척하는 것도 잊고 손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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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보험금을 똑똑히 받아 갔어!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네가 너무 슬픔에 취해 있어 내가 보험사와 이야기하고 먼저 보험금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난 후 분명히 네게 전달했어! 증거를 남기는 게 좋겠다는 말에 문서까지 만들지 않았더냐!”

숙부가 그렇게 주장하며 슬쩍 1황자를 쳐다보았다.

1황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잘했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그의 확인까지 받은 숙부는 더욱 의기양양한 태도로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 쪽에서 수령인이 명시된 보험증서를 확보한 걸 깨닫고 ‘내가 먼저 보험사로부터 돈을 받은 뒤 조카에게 전달했다’라는 쪽으로 논리를 수정한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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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보한 증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이렇게 큰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짓말의 빈 공간을 채우려면 더 큰 거짓말이 필요하고, 더 큰 거짓말의 빈 공간을 채우려면 더더욱 큰 거짓말이 필요하고, 그러다 결국 구멍을 막을 거짓말이 똑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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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숙부님과 그런 대화를 한 기억이 없어요. 문서도 작성하지 않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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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릴 적부터 넌 욕심 많고 영악했지! 네가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서를 만든 것 아니냐. 그걸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폐하!”

숙부가 씩씩대며 탁자에 가득 쌓인 서류 중 하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얼른 그 서류를 받아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서류의 내용을 살피더니 흥미롭다는 듯 웃고는 시종을 통해 내게 서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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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그 행동에 숙부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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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가 부, 불리한 증거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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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니 더 잘된 거지. 안 그런가?”

황제가 숙부의 항의를 부드럽게 외면하고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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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류에 대해 할 말이 있나?”

나는 손에 들어 온 문서를 차분히 살폈다.

내용은 숙부의 말 대로였다.

보험사가 장례식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나 대신 숙부에게 먼저 보험금을 전달했고, 숙부는 장례식이 끝난 뒤 확실히 내게 보험금을 주었으니, 그것을 서로 확인하고 서명하여 문서로 남긴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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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는 걸 증명해야만 그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어.’

하지만 생각보다 문서가 정교했다.

서명 역시 내 것과 아주 흡사했는데, 아마 자세히 살펴도 위조를 알아내긴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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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에 내가 남긴 문서가 많으니 서명 위조는 완벽하게 했을 거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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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험증서를 확보한 건 정말 최근의 일이야. 숙부와 1황자는 오래 고민하고 대처할 시간이 없었지.’

그러니 반드시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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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너질 거짓말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죠, 숙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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