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네 덕분이야. (102/170)


102화. 네 덕분이야.
2022.05.25.


16583308323101.jpg

 

16583308323111.png

“이걸 저희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른 뒤 작성했다고요?”

16583308323115.jpg

“그, 그래. 문서에 날짜까지 정확히 적혀 있지 않으냐?”

숙부가 침착하게 묻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소심하고 유약한 조카가 문서를 보자마자 말도 안 된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이라도 쏟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겐 전혀 평정을 잃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결코 이런 문서를 작성한 적이 없었고, 그렇다면 당당하게 나의 논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숙부가 이 문서의 작성 시점을 모두의 앞에서 스스로 못 박아주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16583308323111.png

“그때 만들어진 문서라니…… 정말 이상하네요.”

16583308323115.jpg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네가 직접 이름을 적고 서명까지 했다!”

숙부가 코웃음을 흘리더니 황제에게 시선을 돌려 굽신거렸다.

16583308323115.jpg

“폐하. 조카가 이 명백한 증거가 거짓이라고 잡아떼려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백합니다! 황실 필체감정관의 검증을 받아도 좋습니다!”

16583308323136.jpg

“그래. 황실의 필체감정관은 누구보다 정확한 눈을 가졌지. 그에게 검증받으면 그 문서에 서명한 것이 누구인지 밝혀지겠군.”

황제가 숙부의 말에 동조하자 1황자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숙부가 일부러 ‘황실 필체감정관’을 들먹이는 걸 보니 이미 그쪽까지 매수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들 딴에는 벗어날 길 없이 사방을 틀어막기 위한 상수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저기 조작의 흔적을 너무 많이 남겨둔 것이 된다.

16583308323111.png

“폐하. 저 역시 검증을 요청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날 쳐다보는 숙부를 외면하고 황제에게 예를 갖춰 청했다.

16583308323136.jpg

“필체를 검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16583308323111.png

“바인 후작가에는 제가 남긴 문서가 아주 많습니다. 필체를 위조하는 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부러 황실 필체감정관이 매수당했을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건 재판장에서 공공연하게 떠벌릴 사안이 아니었다.

자칫 황실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 있는 일이니, 괜히 들쑤셨다간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다.

16583308323111.png

‘이건 내가 지적한 부분이 밝혀지고 난 뒤에 황제에게 직접 전해야 해.’

진상이 드러난 뒤, 황제는 분명 모두의 앞에서 황실의 체면을 보호해 준 내 공로를 잊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의아하면서도 흥미롭다는 듯 내 손에 들린 문서를 쳐다보았다.

16583308323136.jpg

“필체가 아니라면 그 문서에서 무엇을 검증할 수 있지?”

16583308323111.png

“종이와 잉크입니다.”

16583308323136.jpg

“종이와 잉크?”

무척이나 뜬금없는 이야기라 여겼는지 황제는 물론이고 재판장을 가득 채운 구경꾼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16583308323136.jpg

“종이? 잉크? 그게 왜?”

16583308323136.jpg

“몰라. 불리해지니까 괜한 트집을 잡는 거 아냐?”

16583308323136.jpg

“아무래도 그런 모양인데.”

재판장의 분위기가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건 확실했다. 이미 내가 서명했다는 문서가 등장한 후라 더욱 의심을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숙부도 그 분위기를 등에 업고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16583308323115.jpg

“종이와 잉크라니. 이상한 걸로 트집을 잡아 시간을 끌 속셈인 게지?”

16583308323111.png

“그럴 리가요. 종이와 잉크는 이 문서에서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걸요.”

나는 문서를 품에 안은 채 황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재판석을 지키는 기사들이 흠칫하며 나를 막으려 했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 그들을 물렸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황제에게 문서를 건넬 수 있었다.

16583308323111.png

“먼저 종이를 자세히 살펴주십시오, 폐하. 폐하께선 안목이 뛰어나시니 이 종이가 어떤 것인지 금방 알아보실 겁니다. 조금 전에는 내용을 살피시느라 배경을 흘려 보아 모르셨을 뿐이지요.”

내 말에 황제는 주의 깊게 종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눈 가까이 가져가 종이의 광택을 확인하고 손으로 매만져 재질을 파악했다.

16583308323136.jpg

“허.”

신중하게 종이를 살피던 황제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멈칫하며 짧게 탄식을 토해냈다.

뭔가를 알아챈 듯한 반응에 숙부와 1황자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16583308323136.jpg

“이 종이는 특별하군.”

16583308323111.png

“예, 폐하. 평범한 종이는 노란빛이 감도는 미색인데, 이 종이는 완벽한 하얀색입니다. 여러 차례 표백한 것이지요. 게다가 표면에 반짝거리는 광택감이 있습니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잘게 부수어 바른 듯해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다릅니다.”

16583308323136.jpg

“우리 제국에는 이런 종이가 없지. 타국에서 들여온 것이로군. 마랑 공국산인가?”

좋은 품질의 종이는 마랑 공국의 특산품이었다.

16583308323111.png

“마랑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종이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마랑 출신의 장인에게 종이를 보여주면 단번에 알아보겠지요.”

16583308323136.jpg

“이게 마랑 공국산이라면 참으로 재미있군. 제국이 공식적으로 마랑의 종이를 수입한 것은 고작…… 반년 전인데 말이야.”

나른한 듯 무심하게 튀어나온 황제의 말에 숙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마랑 공국은 종이를 비롯한 마랑산 제품에 붙이는 관세가 과하다며 제국으로의 수출을 거부하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나서 극적으로 관세 협정을 타결한 것이 겨우 반년 전.

이 문서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반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우리 부모님의 장례식이 있던 시점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숙부가 사색이 되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변명거리조차 찾기 힘든 모양이었다.

조금 더 정신을 붙잡고 있던 쪽은 1황자였다.

16583308323136.jpg

“후작!”

1황자가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숙부를 향해 크게 호통쳤다.

16583308323136.jpg

“감히 밀무역으로 마랑산 종이를 들여왔단 말인가? 아니면 암시장을 이용했나?”

밀무역과 암시장!

질책하는 척 숙부에게 도망갈 구석을 일러준 것이다.

마랑 공국과의 협정 체결 전에도 밀무역이나 암시장을 통해 마랑산 물건을 들여오는 경우가 제법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당연히 불법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문서를 위조한 놈이 되는 것보다 밀무역이나 암시장을 통해 종이를 들여온 놈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숙부가 반색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16583308323115.jpg

“소, 송구합니다! 마랑산이 워낙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래전부터 암시장을 통해 종이를 들여왔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질책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처벌이 조금 더 가벼운 암시장 쪽을 루트로 핑계 대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수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16583308323111.png

“종이를 암시장을 통해 들여오셨다면, 잉크는 어떻게 된 일일까요?”

16583308323115.jpg

“잉크도 마찬가지로 암시장에서 얻었다.”

편리한 핑계를 알게 된 숙부가 똑같은 변명을 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16583308323111.png

“암시장에는 미래에서 건너온 물건을 파는 상인도 있나 보군요? 그렇다면 저 역시 꼭 만나고 싶네요.”

16583308323115.jpg

“그게 무슨 헛소리냐?”

16583308323111.png

“여기 사용된 잉크는 평범한 검은 잉크가 아닙니다. 은하수처럼 은은한 펄감이 있는 게 특징이죠. 에프런 공방의 신제품입니다. 제가 에일스포드로 시집가기 직전에 출시된 잉크인데…… 이걸 어떻게 제 부모님의 장례식이 있던 시기에 암시장에서 구하셨죠?”

16583308323115.jpg

“비, 비슷한 것과 착각한 거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 잉크가 아니다.”

16583308323111.png

“그럼 어떤 잉크인지 말씀해 주세요. 암시장을 통해 일부러 구입하실 정도라면, 분명 어떤 잉크였는지 기억하고 계시겠죠. 제품을 알려주시면 비교해 볼 수 있어요.”

16583308323115.jpg

“그……!”

숙부가 말문이 턱 막혀 입만 뻥긋댔다.

황제는 이미 결론을 내린 것인지 차가워진 눈으로 숙부를 쳐다보았고, 그건 재판장의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판관도 여론도 모두 등을 돌린 것이다.

자신을 향한 싸늘한 분위기를 느낀 숙부가 1황자를 향해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무리 1황자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16583308323136.jpg

“진실을 말하는 자가 문서를 위조할 리는 없지. 그렇지 않나, 후작?”

16583308323115.jpg

“아, 아닙니다! 저, 저는, 그러니까……!”

황제의 질문에도 숙부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결국 황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자 두 명의 기사가 숙부에게로 다가가 그를 자리에서 끌어냈다.

16583308323115.jpg

“폐하! 억울합니다! 이건 계략입니다! 저 간악한 계집애가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겁니다!”

숙부는 끌려 나가는 동안에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 앞에서 항상 턱을 치켜들고 고압적으로 굴던 숙부가 하찮게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16583308323111.png

‘이렇게 쉽게 찍어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새삼 내 안의 소심함과 공포가 얼마나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지 느껴졌다.

16583308323136.jpg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판결을 내리지는 않겠다. 신중하게 결론 내려야 하니 양쪽이 준비한 모든 자료는 검토하지. 후작 쪽이 준비한 자료는 아무래도 까다로운 검토를 거쳐야겠지만 말이야.”

황제가 질린 얼굴로 숙부가 탁자 위에 잔뜩 쌓아둔 서류를 쳐다보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내게 질문했다.

16583308323136.jpg

“그런데 남작 부인은 어떻게 이 짧은 시간 동안 잉크가 특별하다는 걸 알아봤지? 종이는 확실히 특별한 것이 눈에 보이지만 잉크는 오랜 시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가 없는데.”

16583308323111.png

“누군가에게 장황한 잉크 강의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루뭉술한 내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려서, 나는 기꺼이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16583308323111.png

“제가 에일스포드로 시집갈 무렵, 제 사촌이자 바인 후작의 딸인 레이디 멜리사가 에프런 공방의 새 잉크를 들여왔다며 자랑하러 왔었지요.”

갑자기 등장한 제 이름에 끌려 나가는 숙부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멜리사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으며 그날의 기억을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16583308323111.png

“에일스포드는 촌구석이라 이런 잉크는 물론이고 우리가 예전에 쓰던 오래된 잉크도 없을 거라면서 묵은 잉크는 다 네가 가져가라고 선심을 베풀더군요. 그게 전부 딱딱하게 굳어 버려야 할 잉크라는 건 몰랐던 모양이에요.”

부드럽게 돌려 말했지만 사촌을 무시하고 괴롭힌 것이 분명한 일화였던지라 사람들이 멜리사를 힐끗대며 무어라 쑥덕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멜리사의 심술에 익숙해서 한숨만 쉬고 말았었지.

어차피 후작가를 떠날 테니 멜리사와 피곤하게 다투고 싶지도 않아서 혼자 잉크병을 치웠던 기억이 있었다.

16583308323111.png

“그날의 일 덕분에 오늘 바로 잉크를 알아볼 수 있었어, 멜리사. 네 덕분에 진실을 밝힐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고맙다는 건 진심이었다.

멜리사가 그때 그런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면 잉크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제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니까.

16583308381127.png

“그, 그런…… 내가 알려준 걸로 우리 아버지를…….”

멜리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더니, 결국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16583308381132.png

 
주위에는 수많은 신사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더러운 것을 피하려는 듯 멜리사 근처에서 물러날 뿐이었다.

16583308381127.png

“이대로 안 끝나…….”

멜리사가 멍하니 중얼거렸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알테어가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재판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도 동요하지 않는 게 알테어다워서 오히려 안심이 됐다.

16583308323111.png

‘이걸로 끝이 아냐.’

숙부에게 빼앗긴 걸 되찾아오는 건……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16583308401835.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