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누구랑 꼭 닮았군.
(105/170)
105화. 누구랑 꼭 닮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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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누구랑 꼭 닮았군.
2022.06.05.
황실의 체면을 지키면서 1황자를 아름답게 치울 방법?
상반된 두 가지를 모두 얻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알테어는 이미 계획을 그려둔 듯했다.
그의 머리에는 어떤 그림이 준비되어 있는 걸까.
가만히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낼 작정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판에서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제국과 마랑의 정식 교류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입장이지.”
“네. 제국과 마랑은 멀고 문화도 많이 다르니까요.”
갑자기 여기서 왜 마랑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더니 알테어가 위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황제께서 마랑에 보낼 적임자를 찾고 계시다 하더군. 마랑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 가는 길에 귀한 마차가 망가져 사고가 날지도 모르지. 또 그곳은 우리와 기후가 달라 위험한 풍토병도 있다 하던데. 귀하게 자란 분은 더욱 조심하셔야 할 테고…….”
알테어가 태연하게 손가락을 꼽으며 죽음의 이유를 언급했다.
말투는 마랑으로 가는 사람을 걱정하는 듯했지만, 눈빛이 아주 즐거워 보여서 그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황자를…… 마랑으로 보낼 적임자로 추천하려는 거군요.”
그리고 자연스러운 이유를 붙여 처형하려는 거다.
타인의 눈에는 사고사나 병사로 보일 테니 황실의 체면이 상할 걱정은 없다.
“1황자의 죄를 모두에게 알리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당장 황제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당장 모든 죄는 바인 후작이 가져가겠지.”
“네. 1황자의 죄까지 폭로하려면 황제와도 척을 져야 할 테니까요. 또 든든한 아군이 되어준 비오스케스 공작께서도 황실이 상하는 걸 원치 않으실 테고요.”
마음 같아서는 숙부의 뒤에 모든 걸 계획한 악당이 선한 가면을 쓴 채 숨어 있다고, 몹쓸 악당을 처단해야 한다고 모두의 앞에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이렇게라도 처리할 수 있다면 다행인가…….’
권력을 가진 자를 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째서 자신만만하게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들키지 않거나, 만약 들켜도 쉽게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펄쩍 뛸 노릇이다.
막막하고 억울해서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보았는지 알테어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다소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거친 기사답지 않은 세심함에 웃으며 고개를 들자 알테어가 흔들림 없는 견고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물론 끝까지 1황자를 안타까운 사고의 희생양으로 두진 않을 거야. 당장은 힘들지만, 반드시 그의 죄가 역사에 기록되어 모두가 그에게 돌을 던지게 하겠어. 끈질기고 인내심 강한 자의 복수야말로 무엇보다 무섭지.”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알테어는 반드시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다.
같은 사람을 원수로 두었다는 동질감과 연대감, 혹은 다른 어떤 감정들이 끈끈하게 나와 알테어를 이어주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막막하지 않았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하지.
“맞아요. 나도 끈질겨요. 인내심이라면 지지 않고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니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런 각오는 좋지만, 나와 당신 모두 이런 이야기를 할 차림은 아닌 것 같군.”
“네……?”
알테어의 시선이 내 얼굴을 지나 아래로 떨어졌다.
덩달아 고개를 떨구니 아직도 어젯밤의 상태 그대로 이불을 두르고 있는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런 꼴을 하고 진지하게 군자의 복수는 어쩌고-라며 진중한 생각을 했던 것이 너무 민망했다.
“물론 이런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게 부부겠지만.”
얼굴이 벌게져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알테어는 태연하게 몸을 일으켜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으면서도 알테어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따로 시중드는 하인을 부르지 않고 대충 옷을 주워 입은 뒤 다시 침대로 다가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픽 웃으며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건드렸다.
“식사를 준비해 오지.”
***
“남작님께 식사 준비를 맡기시다니…….”
마리가 옷 입는 걸 도우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주전자에 물을 채우기 위해 주방을 찾았다가 알테어가 주방을 돌아다니며 먹을 걸 챙기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수도 귀족들은 절대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뼛속까지 수도 출신 사용인인 마리에게는 이것이 매우 충격적인 사건인 듯했다.
“식사를 준비해 오겠다는 말이 ‘직접 주방에서 가져오겠다’라는 말인 줄은 나도 몰랐어. 사람을 부르러 가는 줄 알았는데…….”
마리가 후다닥 들어와서는 ‘남작님이 주방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어요!’라고 외쳤을 때는 나도 어찌나 놀랐는지.
하지만 에일스포드 토박이라 오래 알테어를 모신 안나는 그런 일이 별로 놀랍지 않은 듯했다.
“원래 자주 그러시는걸요. 주방에 불쑥 나타나셔서 필요한 것만 가지고 돌아가시는 거죠. 바쁘고 귀찮다면서 거창하게 식사를 잘 안 하시니까요.”
“맞아. 알테어가 원래 그런 사람인걸. 바깥에 나왔다고 그런 모습을 바꿀 필요는 없지.”
빙긋 웃으며 안나의 말에 동조하니 마리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가엾은 비오스케스의 하인들이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게 굴었으면 남작께서 직접 주방에!’라며 경악하고 있을 거예요.”
명문가의 하인들이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 했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우면서도 어쩐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언제나 주변에 파문을 던지는 알테어의 성격이 새삼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그들의 시중은 훌륭했다고 꼭 말해 주는 게 좋겠다. 너무 놀라지 않게 마리가 잘 이야기해 줘.”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주님께서 많이 늦으시네요. 주방을 활보하고 다니시는 걸 보았을 때는 금방 오실 줄 알았는데요.”
마리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시간이 많이 지난 상태였다.
알테어가 요리를 정성스럽게 준비해 올 성격도 아니니, 그가 한참 전에 주방에 들이닥쳤다면 벌써 방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혹시 예상 못 한 일이 터져서 급히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린 걸까?
그런 걱정을 하고 있으니 문밖에서 다소 소란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명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소란스러운 소리 사이에 알테어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마리와 안나도 알테어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를 기울이자 바깥의 소리가 조금 더 명확해졌다.
“도둑이에요? 빵 훔쳐떠요?”
낯선 목소리가 알테어를 추궁하고 있는 듯했지만 심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게 어린 여자아이의 혀 짧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도둑 아니다. 주방에서 정당하게 가져온 거야.”
“나 모르는 사람 없떠요. 근데 아저씨 몰라요!”
“공작께서 초대해서 머무르는 중이야. 오래됐는데.”
“하라부지가요? 하라부지 친구 없더요!”
“난 그분의 친구는 아니니까.”
천진난만하게 공작의 인맥을 폭로하는 아이와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주는 알테어의 목소리에 마리와 안나가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당당하게 길을 막고 선 아이에게 붙잡힌 알테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테어는 간단한 빵과 수프가 준비된 쟁반을 손에 든 채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평소처럼 딱딱한 얼굴이었지만 용감하게 제 앞을 가로막은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묘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알테어의 앞을 막은 아이는 공작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비오스케스 공작의 손녀인 듯한데, 뒷모습만 보아도 다부지고 똘똘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날 도둑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뛰어들어서는 안 됐어.”
“왜요?”
“난 간단하게 널 제압할 수 있으니까.”
알테어가 짧게 경고하며 몸을 일으키고는 한 손으로 가볍게 아이를 들어 올렸다.
“꺅!”
순식간에 달랑 들려 올라온 아이가 놀라서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알테어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 봐. 내가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으면 큰일 났겠지?”
“무, 무떠워…… 큰일 마자요…….”
씩씩하게 알테어에게 맞서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이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알테어는 순식간에 쪼그라든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픽 웃으며 조심스럽게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쪼그라드는 게 누구랑 꼭 닮았군.”
“아, 안 쪼그라드러떠요!”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닮았고.”
알테어가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가 봐도 나였다.
발끈해서 당장이라도 반박하려던 마음은 아이를 바라보는 알테어의 눈빛이 너무도 부드럽다는 걸 깨닫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
분명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눈빛이 나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휴. 영주님은 아이를 너무 좋아하신다니까요. 에일스포드에서도 아이들을 잘 챙겨주셨죠.”
나와 함께 문틈으로 알테어와 아이의 대치를 지켜보던 안나가 익숙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러니 자기 아이가 생기면 얼마나 잘해주시겠어요? 말씀은 안 하셔도 아이를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안나!”
마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얼른 안나의 입을 단속했다.
결혼하고 많은 밤을 보냈는데도 나와 알테어 사이에서는 아직 아이 소식이 없었다.
마리의 지적에 상황을 파악한 안나가 놀라서 손으로 제 입을 막았지만, 사실 나도 안나의 말에는 동의하고 있었기에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알테어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나와 결혼한 목적이 후계자를 갖기 위해서였으니까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계자를 알테어는 아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줄 것이 분명했다.
‘여태까지 아이가 안 생긴 게 초조하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마리가 놀라서 안나를 막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아이가 들어서는 게 많이 늦어지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셔요, 마님.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기게 될 테니까요.”
“응.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니까.”
마리의 조심스러운 위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알테어에게 많은 걸 받았는데…….’
나는 알테어가 가장 원하는 걸 아직 주지 못했다.
‘어떡하지.’
어서 알테어가 원하는 걸 주고 싶은데.
마음이 초조해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