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진단서.
(10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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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진단서.
2022.06.08.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1황자 전하께 연락해라.’
멜리사는 아버지가 재판 직전 제게 당부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아버지의 당부에 따라 여러 루트를 사용해 1황자에게 접근했지만,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아 앞이 막막했다.
바인 후작이 공개 재판에서 죄인처럼, 아니, 죄인이 되어 발스테드로 끌려간 후 후작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조사를 목적으로 황실의 조사관들이 마구 들이닥쳐 집 안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멜리사는 며칠째 공포에 벌벌 떨고 있었다.
후작이 건재하게 저택을 지키는 상황에서라면 무어라 항변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멜리사에게는 이런 일에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멜리사에게 후계자로서의 교육을 전혀 해 주지 않았다.
후작으로서의 권력은 아버지가 모두 틀어쥔 채 멜리사에게 조금도 나눠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멜리사 역시 어차피 자신은 후작이 될 수 없으니 그런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는 나디아가 선대 후작에게 이런저런 후계자 교육을 받는 걸 보면서 어차피 후작이 되지도 못할 거면서 작위가 있는 걸 괜히 생색낸다고 여겼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조금 후회가 되었다.
사용인들이 불안함에 떨며 ‘이건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 멜리사는 어떠한 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누구도 답을 해 주지 않았다.
멜리사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신사들도, 그녀를 우상처럼 떠받들던 레이디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내게 들러붙어서 하하 호호 웃을 때는 언제고!’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사람들이 괘씸해 죽을 지경이었다.
‘두고 보라지. 아버지가 돌아오기만 하면……!’
아니. 아버지가 돌아오실 수는 있나?
초조하게 방을 배회하던 멜리사의 두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멜리사는 그리 똑똑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얼마나 최악인지 파악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
황제가 주관하는 재판에서 아버지가 끌려 나갔고 황실 조사관들이 집 안을 들쑤시며,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외면하는 상황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멜리사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그리 많이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덕분에 작위도 없는 ‘이름만 귀족’에서 작위까지 있는 ‘진짜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정말로 아버지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가 유죄로 확정되어 상황이 회복되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멜리사는 오싹해져 두 손으로 팔을 쓸어내렸다.
작위 없이 ‘이름만 귀족’이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멜리사는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겼다.
아버지는 분명 1황자에게 의지하라는 이야기 말고도 다른 조언을 덧붙였었다.
당시에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몰랐던 멜리사가 건성으로 흘려듣는 바람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1황자 쪽에서 우릴 외면하면 다른 쪽을 물고 늘어져야 해.’
‘다른 쪽이요?’
‘그래. 우리가 잡을 줄이 따로 있을 것 같으냐? 에일스포드 남작이다. 나디아 그 맹랑한 계집애가 우릴 물 먹이면, 반드시 남작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
‘네에…… 그럼 좋겠네요.’
‘이 녀석! 제대로 듣지 못해? 만약 재판이 잘못되면 어쩌려고 이리 철없이 굴어?’
‘재판이 왜 잘못되겠어요? 아버지는 1황자 쪽 연줄이 있으신 거잖아요. 나디아 걘 아무것도 없는 멍청한 애고요.’
‘진짜 멍청한 애라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 수도 없었어! 생각보다 간악한 계집애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
‘어휴. 알았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 해요!’
‘잔소리라니! 혹 일이 터지면 후작 부인의 방으로 가서 여자 그림을 찾아라. 그걸 젖히면 그 뒤에 있는 금고가 나오는데, 네게 준 열쇠로 금고를 열면 안쪽에 나디아 그 계집애의…….’
금고! 인장으로 금고를 열어야 해!
되새긴 기억 속에서 단서를 찾아낸 멜리사가 눈을 번쩍 뜨고 후작 부인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황실의 조사관들이 한바탕 뒤집고 떠난 뒤였지만 원래 비어 있던 후작 부인의 방은 멀끔했다.
멜리사는 단번에 아버지가 말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벽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지만 인물화는 하나뿐이었다.
조심스럽게 그림을 젖히자 아버지의 말처럼 금고가 나타났다.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사용해 금고 문을 열자 안은 다소 휑한 느낌이었다.
후작의 인장과 서류 하나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아버지의 성격을 생각하면 금고 가득히 중요한 것들을 쌓아 뒀을 것 같은데 상당히 의외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멜리사는 후작의 인장을 무시하고 곧장 서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마 이것이 아버지가 말한 ‘나디아 그 계집애의……’ 어쩌고저쩌고 서류일 것이다.
멜리사는 차분하게 서류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진단서잖아?’
환자의 이름은 나디아 바인.
‘그리고 내용은…….’
나디아의 이름 아래에 쭉 적힌 내용을 확인한 멜리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확실히 아버지와 자신의 목숨 줄이 되어줄 것이다.
초조하던 멜리사의 얼굴에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
***
멜리사는 당장 비오스케스 공작저로 달려갔다.
당연히 입구에서부터 가로막혔으나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하인에게 거금을 쥐여 주며 ‘에일스포드 남작에게 이야기만 전해 달라’고 사정하니, 하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돈 주머니를 가져가며 헛기침했다.
“정말로 이야기만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돼. ‘나디아’와 관련된 일이라고, 나와 만나지 않으면 그 애의 치부가 수도 전체에 퍼질 거라고 전하면 돼.”
“네, 네? 그, 그런 이야기를 제가 어떻게 남작님께…….”
“멜리사 바인이 전했다고 하면 되잖아! 그 주머니, 다시 돌려주고 싶어?”
내용을 들은 하인이 돈 주머니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해 드리지요.”
“남작님을 데려오면 그만큼의 돈을 더 줄게.”
하인이 돈만 받고 도망칠까 싶어서 보험까지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간 하인의 눈빛이 탐욕스럽게 반짝이는 걸 보니 멜리사의 보험이 아예 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멜리사의 초조함이 극에 달해 폭발하기 직전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녀가 돈을 쥐여 주었던 하인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고, 그 뒤로 무표정한 얼굴의 에일스포드 남작 알테어가 보였다.
멜리사는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알테어 앞으로 달려가서는 얼른 하인에게 돈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하인이 만족하고 물러나자 알테어는 대문을 완전히 닫고 저택 밖으로 나와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걸음을 옮겼다.
멜리사는 그 뒤를 졸졸 쫓았다.
“그래. 도대체 무슨 치부를 떠들겠다는 거지? 헛소리일 게 분명하지만, 무슨 헛소리를 하든 내 아내의 명성에 먹칠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알테어가 싸늘하게 멜리사를 추궁했지만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멜리사는 자신이 꺼낼 ‘헛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알테어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헛소리가 아니에요. 이걸 보세요!”
멜리사는 금고에서 얻은 서류를 알테어에게 내밀었다.
“나디아의 진단서예요. 그 애의 건강 상태가 세세하게 적혀 있죠. 결혼하기 전에 신부에게 병이 있는 건 아닌지 검사받곤 하니까, 그때 의사에게 진단받은 것 같아요.”
귀족들은 대체로 정략결혼을 하다 보니 정식으로 식을 올리기 전에 신랑과 신부, 양쪽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의사로부터 건강에 대한 진단서를 받아 교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끼리의 결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후계자 생산이니 그 부분에 문제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건 필수였다.
하지만 알테어는 신부로부터 그런 증명서를 받지 않았다.
좀처럼 신부를 구하지 못하고 있던 찰나에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터라 다른 부분을 재며 확인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인 후작이라면 수도의 유력한 귀족인데, 그가 아끼는 조카라며 크게 강조하기까지 했으니 이상한 사람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고 말이다.
어쩐 일인지 결혼을 상당히 서두르는 듯했던 바인 후작 쪽에서도 서류를 요구하지 않았던 탓에 귀족 사회에서는 매우 드물게도 양측의 진단서가 과감하게 생략되어 결혼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나디아의 진단서를 받아보게 되다니.
알테어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멜리사가 내민 진단서를 받아 들었다.
무심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알테어의 시선이 어떤 지점에 이르러 못 박힌 듯 멈추었다.
멜리사는 그게 어떤 부분인지 짐작한다는 듯 코웃음을 흘리며 알테어에게 바짝 다가섰다.
“나디아는 불임이에요, 남작님!”
불임.
진단서는 분명히 그렇게 작성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왜 이걸 금고에 보관하셨겠어요? 나디아 그 계집애가 이게 알려지면 평생 결혼을 못 할 거라고 울며불며 매달렸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께선 조카를 위해 감추신 걸 테고요.”
멜리사는 알테어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후작은 멜리사가 이 무기를 사용해 어떻게든 자신을 구해 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멜리사는 후작과 자신, 둘 모두 타기에는 이 배가 너무 부실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무기로 만든 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그 한 명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
멜리사는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며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꾸며낸 뒤 비틀거리며 알테어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이지…… 나디아와 아버지, 둘 모두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어요. 간절히 후계자를 원하는 남작님을 감쪽같이 속이다니요. 전 정말이지 너무나 충격받아서…… 남작님도 안쓰럽고…… 그래서 어쩔 줄 몰라 당장 여기로 달려온 거예요.”
바르르 떨며 몸을 가까이 붙여오는 여인에게 무뚝뚝할 수 있는 사내가 있을까?
멜리사는 속으로 ‘다 됐어!’라고 생각하며 알테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알테어의 시선이 매우 싸늘했다.
“충격받았다는 사람치고는 협박을 아주 잘하던데.”
“그, 그건, 그래야 남작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면서 머리도 잘 굴리고.”
싸늘한 비아냥에 멜리사가 사색이 되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알테어는 멜리사가 그냥 멀어지게 두지 않았다.
“이걸 수도에 퍼트릴 생각이었다는 건, 겉으로라도 사촌을 아끼는 레이디 행세는 안 하겠다는 건데.”
알테어는 멜리사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틀어잡은 뒤 싸늘하게 경고했다.
“난 그런 위험한 인간을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