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사실이었어.
(107/170)
107화. 사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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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사실이었어.
2022.06.12.
“왜, 왜 나한테 화를 내요? 다, 당신은 나디아 그 계집애에게 속은 거라고요!”
멜리사는 무서운 눈빛에 덜덜 떨면서도 억울해 죽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이 상황이 정말로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디아가 불임이라는데, 그 사실을 아버지와 나디아가 작심해서 숨긴 채 에일스포드로 시집을 보냈다는데.
왜 그 사실을 알려준 은인에게 이리 무섭게 군단 말인가?
멜리사는 자신이 이 사실을 가지고 알테어에게 달려가면 그가 매우 고마워하며 당장 나디아를 내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디아가 내쳐진 자리에 은근슬쩍 자신이 들어앉을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아버지를 구해야겠다는 의무감도 딱히 없었다.
둘 다 살기 힘들다면 하나라도 살고 봐야지. 살아남는 쪽이 ‘내’가 되는 것은 멜리사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매우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멜리사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 이상으로 복잡해질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카인.”
알테어가 허공에 대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기척 하나 없던 나무 뒤에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꺄ㅇ……!”
멜리사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카인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았기에 큰 소리가 튀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잘 모셔라. 절대 바인 후작저에서 못 나오게 해.”
“방에 잘 가둬 두겠습니다.”
당사자를 배제하고 이어지는 대화에 멜리사가 반항하며 입을 가린 손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카인은 어떤 저항에도 꿈쩍도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이 여자가 말한 이야기는…….”
카인은 곧장 물러나지 않고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손에 들린 서류를 힐끗댔다.
자신이 끼어들 만한 일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알테어에게 후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에일스포드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 방정맞은 멜리사라는 여자의 말에 따르면 마님은 불임이라 절대 후계자를 가질 수 없다는 건데, 그렇다면 도대체 에일스포드의 앞날은 어찌 된단 말인가?
카인은 나디아가 멜리사의 말처럼 작정하고 사람들을 속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태까지 지켜본 나디아의 인간성이 절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임은, 몸의 상태는 인간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카인을 비롯한 에일스포드 사람들은 착하고 현명한 마님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후계자를 갖지 못하는 몸이라면…… 그러면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러움에 카인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정작 나디아의 남편인 알테어는 안색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선을 지켜라, 카인. 네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압니다. 알고 있지만…… 이게 워낙…….”
카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이려다 버둥거리는 걸 멈추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멜리사를 발견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결국 이 여자에게 도움이 될 테지.
“……죄송합니다. 그럼 이분을 친절하게 저택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카인이 평소처럼 웃는 낯을 하고 멜리사를 마차로 이끌었다.
그녀의 사소한 반항 정도는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알테어는 카인과 멜리사를 태운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 차분하게 몸을 돌렸다.
평온한 표정과 달리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
“무슨 일이에요? 마리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어요. 얼른 앉아요.”
갑자기 찾아온 하인의 이야기에 밖으로 나갔던 알테어가 다소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알테어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정신이 어디로 나가 버린 건지 내 이야기를 안 듣고 있는 것도 같았다.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선 모습이 정말로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알테어!”
나는 그런 알테어의 모습이 이상하고 답답해서 얼른 그의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기척에 겨우 정신을 차린 건지 조금 흐려졌던 알테어의 시야가 단번에 선명해졌다.
“나디아.”
이름을 부르는 알테어의 목소리가 어딘가 평소와 달라서 얼떨떨했다.
혹시라도 이 상황에 대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눈을 껌뻑이며 알테어의 얼굴을 살피니 그가 먼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멜리사 바인이 찾아 와서 주고 가더군.”
“멜리사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 애가 알테어에게 주고 갈 서류라니. 더더욱 짐작이 안 된다.
그렇게 의문을 품은 채로 서류를 살피니 ‘진단서’라는 글자와 내 이름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로…….
“불임……?”
분명 두 눈으로 글씨가 보이는데,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당황스럽고 놀라워 고개를 번쩍 들자 알테어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멜리사 바인의 말로는 후작의 금고에서 찾았다는군. 당신이 결혼 전에 받은 진단서고, 당신과 후작이 합심해서 숨긴 거라고.”
“아, 아니에요! 내가 왜…… 난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게다가, 이런, 부, 불임이라니…….”
말을 하면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알테어는 멜리사의 말처럼 내가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할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정말로 불임인가?
숙부는 그걸 숨기고 날 시집보내며 알테어에게 돈을 뜯어 갔고?
설마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얼굴에서도 핏기가 싹 가시는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자 머리 위로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려오더니 알테어가 팔을 뻗어 덜덜 떠는 내 어깨를 감쌌다.
“정신 놓지 마. 그 여자가 주고 간 서류야. 완전히 다 믿을 수는 없어.”
“마, 맞아요. 멜리사 그 애가 준 거니까…… 분명 헛소리일 거예요. 제가 숙부님께 보험금을 받았다는 서류도 조작된 거였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굳어 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떨림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알테어는 나를 이끌어 소파에 앉혀 주고, 그 옆에서 가만히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분명 알테어도 나 못지않게,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놀랐을 텐데.
오히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라고 외치며 알테어를 달래야 하는 것 아닌가?
머리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눈이 계속 나의 몸 상태를 기록한 진단서에 꽂혀 그 안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마님.”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마리가 들어섰다.
눈치 빠른 사용인인 마리는 단번에 방 안의 공기가 기묘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럽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으응…… 그게…….”
서류의 내용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떠들고 다닐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문이 퍼지면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방에서 나를 물어뜯으려고 할 테지.
그러니 멜리사가 이 서류를 알테어에게 먼저 가져온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당장 사람들에게로 달려가 ‘동네 사람들! 이것 보세요!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불임이래요!’라고 외쳤다면 상황을 수습하기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타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본 측근 시녀였다.
귀부인들의 몸 상태는 자신보다도 측근 시녀들이 더 잘 안다고들 하지 않나.
오히려 그녀가 이 서류에 담긴 내용이 헛소리라는 걸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떨림을 애써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멜리사가 내 진단서를 가져왔어. 내가…… 불임이라는데…….”
말을 제대로 끝마치기도 전에 와장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에 힘이 풀린 건지 마리가 들고 있던 쟁반을 놓친 것이다.
따뜻한 물이 담겨 있던 찻주전자며 예쁜 찻잔이 모두 바닥을 굴러 산산조각났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니 불쑥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 반응은 마치…….
“설마, 마리는 알고 있었어?”
“마, 마님…….”
마리가 나와 알테어를 번갈아 보며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치맛자락을 쥔 손은 핏줄이 도드라져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오, 오래 약을 잘못 드셔서 그런 건데, 해독약을 잘 드시면 나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반드시 나으실 거예요.”
마리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하나뿐이었다.
내가 지금 불임이라는 것.
멜리사가 가져온 이 서류가 결코 조작된 게 아니라는 것.
나는 정말로…….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위의 소리가 멀어지고 눈앞이 깜깜해져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나디아!”
알테어가 내 이름을 부르며 옆으로 넘어가려는 몸을 붙잡아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리는 드물게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끝까지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마님께서는 분명 나아지실 테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치료하면 된다고만 생각해서…….”
“언제…… 알았는데……?”
“리온 선생님이 저택에 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님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고 말씀하셔서…….”
리온의 이름을 듣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알테어의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늦은 시간 리온을 찾았는데, 그때 그 자리에 마리가 함께 있어서 이상하게 여겼던 기억.
리온과 마리가 답지 않게 당황하며 나와 알테어를 맞이하기에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해 밀회라도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니냐며 키득댔었지.
그런데 그건 두 사람이 마음이 통해서가 아니라…….
사실을 깨닫고 나자 놀랍도록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리온 선생님께서 해독약을 지어 주셨어요. 뛰어난 의사이시니 분명 효험이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내가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했는데도 계속 약을 줬던 건 불임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어.”
“치료 가능성이 있으니 그걸 불임이라고 말하기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라면 불임이 맞지.”
“마, 마님…….”
단호한 대답에 마리가 어쩔 줄 몰라 울상이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워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비오스케스 공작의 손녀와 투덕대는 알테어의 모습을 보며 얼른 그의 후계자를 가지고 싶다고, 왜 이렇게 아이가 안 들어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태평한 생각이나 했던 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상황조차 아니었고,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알테어와 결혼한 뒤 그에게 쓸모 있는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그래서 눈 밖에 나지 않고 목숨을 보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후계자를 낳아 쓸모 있는 아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알테어의 곁에 머무르며 단순히 목숨을 보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를 마음에 품어서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알테어에게 도움이 되는 일, 그가 웃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리는 ‘나을 수도 있다’라고 했다. 그건 ‘반드시 낫는다’와 천지 차이였다.
겨우 굴러가던 생각이 거기에서 뚝 끊겼다.
‘만약에 안 나으면? 이 상태가…… 계속되면?’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알테어가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나디아 에일스포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