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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안타깝지만……. (109/170)


109화. 안타깝지만…….
2022.06.19.


곧장 불려온 리온은 다소 심각한 얼굴이었다.

늘 알테어에게 야박한 사람답지 않게 그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찔리는 구석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알테어는 리온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자리를 비워 주지. 편하게 이야기 나누도록 해.”

“같이 있어도 돼요.”

“알아. 당신은 괜찮겠지만, 저쪽이 안 괜찮아 보여서.”

알테어가 그제야 리온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리온이 민망하다는 듯 크게 헛기침하며 나와 알테어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님의 상태를 미리 알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딱히 영주님에겐 지킬 의리가 없었던 터라, 마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상황이 들통났으니 사과는 하지만 그다지 미안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괘씸한 의사라며 당장 벌을 주거나 쫓아내도 할 말이 없는 뻔뻔한 태도였으나, 알테어는 의연하게 리온의 태도를 흘려 넘겼다.


“아내를 위해 한 일인 걸 알아. 탓하지 않을 테니 제대로 진찰하고 치료하도록.”

“뭐어…….”

벌을 받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통 정도는 들을 줄 알았는지 리온이 신기하다는 듯 평온한 알테어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알테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방을 나설 뿐이었다.

알테어는 떠났지만, 어깨에는 아직 그가 붙잡았던 감각이 머물러 있었다.

묘한 기분에 무게감이 느껴지는 어깨를 매만지고 있으니 리온이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 알게 되셨습니까?”

“숙부의 금고에서 내 진단서가 발견되었거든요.”

“숙부라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리온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곧 자연스럽게 내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문의 의사가 처방한 약을 오래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마리에게 들은 거겠군요. 맞아요. 어릴 적부터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제가 판단하기로는 일종의 중독 증상이었습니다. 무슨 약을 썼는지 알아내서 해독하면 되는데, 문제는 무슨 약을 썼는지 모호하다는 거였죠. 그래서 마리 양을 통해 가문의 의사가 쓴 약을 알아보려 했습니다.”

“알아냈다면 벌써 해독약으로 치료가 되었을 텐데, 마리가 계속 약을 올렸던 걸 보면 못 알아낸 모양이네요.”

마리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약을 올렸다.

이제 몸 상태가 괜찮으니 약을 끊어도 될 것 같다고 말했을 때는 그래선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

그때는 마리가 내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한다며 웃어넘겼었는데, 이리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따로 진료를 못 보았으니 그사이에 나아졌을 수도 있지요.”

불친절하지만 묘하게 희망을 주는 말이었다.

정확한 진단으로 냉정하게 날 치료해 주었던 리온과는 별로 안 어울리는 태도라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더니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아실 텐데.”

“심각할 게 뭐가 있나요. 불임이라면, 나만 아이를 못 가지는 것뿐이에요. 알테어는 문제없잖아요.”

잠시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온이 곧 의미를 알아차린 듯 헛웃음을 흘렸다.


“왜요? 불임이라고 밝혀지면 그놈이 밖에서 애라도 만들어 오겠답니까? 아니면 부인을 쫓아내고 다른 아내를 들이겠다고 하던가요? 역시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니었…….”

“아니에요! 알테어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나는 리온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재빨리 알테어를 변호했다.


“나만의 생각이에요. 알테어에게, 또 에일스포드에 후계자는 아주 중요하거든요. 나는 알테어도 에일스포드도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남편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애를 만들어 오거나 이혼당해도 그러려니 하겠다?”

“상황이 그렇다면 그리해야지요.”

“허.”

내가 침착하게 대꾸할수록 리온은 더욱 얼굴이 구겨졌다.


“정말이지 당신네 귀족들 사고방식은 이해가 안 됩니다. 좋아하면 끝까지 붙어 있으면 되는 것을, 가문이 뭐고 또 재산이며 작위가 뭐라고. 내 부모님도 당신네들 그 알 수 없는 사고방식에 휘말려서 세상을 떠났지.”

리온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나는 그제야 리온이 아직도 부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대 남작 부부의 죽음에는 발하일 일가가 연관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1황자가 엮여 있었고.

하지만 1황자를 처벌하는 대신 황실의 체면을 지켜주기로 황제와 약조했으니 평생 그의 죄가 드러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요란하지만 않을 뿐 나와 알테어는 원수에게 복수를 한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이 덮여 버린다면 리온은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알테어를 의심할 것이다.

이후 알테어가 리온의 부모를 죽인 진짜 범인을 찾아내어 끌고 오더라도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겠지.

그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진찰 결과를 들은 뒤에는 결과에 동요해서 제대로 진실을 전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온.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 진찰 중인데요. 부인의 상태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내 상태보다 훨씬 중요해요. 당신의 부모님을 죽인 자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뭐라고요?”

내 몸을 살피던 리온이 행동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소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짧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생각보다 연관된 선이 높거든요.”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숙부의 뒤를 캐다가 내 부모님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것, 그리고 그 의혹에 선대 남작 부부의 죽음도 엮여 있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오랫동안 비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려면 1황자의 이름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황제는 이 사실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나는 리온은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리온의 성품을 믿었다. 그는 결코 이 사실을 밖으로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설을 읽은 자의 오만이라면 오만이었으나…….

리온은 에일스포드에 큰 도움이 될 인재다.

반드시 묶어 두어야 하고, 그러려면 알테어에 대한 의심과 의혹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모든 전말을 전하자.’

알테어와 상의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역시 동의하리라고 확신했다.

만약 리온이 내 예상과 달리 밖으로 말을 발설하려고 한다 해도, 알테어는 충분히 그걸 막을 능력이 있었다.


“처음부터 모두 말할게요.”

그러니 나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썩 태연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리온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리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붉게 달아올랐다가, 새파랗게 질려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리온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알테어는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신중하게 하려는 것인지 진찰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중이었다.

알테어의 곁에는 마리도 초조하게 제자리를 맴돌며 함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마리는 나디아가 온 것으로 생각하고 반색했지만,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리온이었다.

물론 기척으로 상대의 존재를 진즉에 알아차렸던 알테어는 태연하게 그를 맞이할 수 있었다.


“나디아는?”

“뭐…….”

리온이 알테어의 질문에 얼버무리며 마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쪽은…… 얼른 가서 마님을 모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심상치 않은 말에 마리는 사색이 되어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걸음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윗사람인 알테어가 한자리에 있었는데도 예를 갖추는 걸 잊었을 정도였다.

다행히 알테어는 마리의 무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진찰 결과는?”

“결과에 따라 영주님의 행동이 달라집니까?”

“……그래야겠지.”

“어떤 식으로요?”

“그건 네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진찰 결과나 말해.”

“원하신다면.”

리온이 묘하게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타깝지만 마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

“약을 쓰기도 힘든 상황이고요.”

“…….”

생각보다 훨씬 단호한 말에 알테어가 그만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과를 기다리며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괜찮다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혀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알테어가 깊은 침음을 흘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디아는? 충격받았을 텐데.”

알테어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 나디아를 향한 걱정인 게 놀라웠는지 리온이 다시 고개를 들며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였다.


“후계자 걱정부터 하실 줄 알았는데요.”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확실히 알겠군. 아직까지 네 원수를 잡아 오지 못한 내 탓이겠지만.”

알테어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나디아에게 달려갈 기세였으나, 리온이 자연스럽게 그의 동선을 막았다.


“뭐 하는 거지?”

“마님께서 안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시죠. 이런 상황에서 부인이 남편 얼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못 볼 이유가 뭔데. 비켜라.”

알테어는 리온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그를 가볍게 밀어냈다.

하지만 리온이 가볍게 밀려나며 꺼낸 말은 무시하지 못했다.


“마님의 뜻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안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

알테어가 가던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운 채 이를 바드득 갈고 몸을 돌렸다.

무시무시한 기운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리온은 태연하게 알테어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그 말이 거짓이었다간…….”

“제가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의사로서 환자에 대한 거짓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놈이라 생각했으니 영주님, 당신을 적대적으로 여기는 날 에일스포드에 둔 거 아닙니까?”

리온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답답했지만 나디아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게 맞다.

그게 맞지만…….

알테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리 강한 힘으로 내리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고급스러운 탁자가 엉망으로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리온은 제 몇 달 치 임금보다도 비쌀 것 같은 탁자가 쓰레기로 바뀌는 순간에 입을 떡 벌리며 나디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이런 상황은…… 생각을 못 해 봐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던 나디아의 모습과 조용히 분노하는 알테어의 모습을 겹쳐보니 정말로 이렇게 다른 남녀가 어찌 부부가 되었나 싶어졌다.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나디아의 눈빛은 확실히 눈앞의 이 남자와 비슷했다.


‘부부는 부부라 이건가?’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주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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