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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그대로 돌려주기. (110/170)


110화. 그대로 돌려주기.
2022.06.22.


상황을 파악한 알테어는 당장 블란을 불러들였다.

사실은 나디아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녀가 만남을 거부한다고 하니 억지로 들이닥칠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나디아의 의사였다.


‘대신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알테어는 무심하게 블란에게 명령을 내렸다.


“잡아 와.”

앞뒤를 모두 자른 명령에 블란이 어리둥절하게 눈만 껌뻑이자 알테어가 피곤하다는 듯 침음을 흘리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바인 후작가의 주치의가 있을 거다. 그놈을 잡아 와.”

“데려오라는 게 아니라 잡아 오라는 말씀이신 거죠?”

블란이 다시 한번 알테어의 명령을 확인했다.

가문의 주치의쯤 되면 상당히 콧대가 높은 인간들이라 마구잡이로 잡아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가문의 주치의는 가문 사람들의 건강 상태며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각 가문에서도 신경 써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강제로 잡아 온다면 그 가문과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바인 후작가에는 별로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지.”

“그거야 그렇지요.”

“내가 한 번 더 명을 내려야 하나?”

알테어가 날카롭게 물었다. 말을 덧붙이지 말고 얼른 움직이라는 소리였다.

블란은 알테어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이번에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명을 받았다.

명령을 받은 블란이 조용히 사라지자 알테어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리온은 나디아의 불임을 유발한 원인이 중독이라고 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해독약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독이 얼마나 까다로운 것인지는 알테어도 알고 있었다.

여러 마수를 상대할 때면 자체적으로 독을 가진 놈들도 있었는데, 이놈들의 독이 가진 성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확실한 해독약을 만들 수 없었다.

마수의 독 성분을 정확히 분석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중독으로 동료를 잃는 일이 가장 많았다.

사람이 만든 독도 마찬가지다.

그 성분과 용량을 정확히 알아야 해독약을 만들 수 있으니 나디아가 먹은 약을 만든 자가 모든 걸 실토하게 해야 한다.

알테어는 리온이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하더라도 타인이 인위적으로 만든 독을 해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리온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했다. 약을 만든 놈을 잡아들이면 그만이다.

바인 후작이 완전히 몰락해 후작가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으니 블란이라면 쉽게 그놈을 잡아 올 수 있을 테다.


‘물론 순순히 독에 대해 입을 열지는 않을 테지만…….’

입이야 열게 하면 그만이지.

알테어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



“마님!”

마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디아의 방에 들이닥쳤다.

리온의 입에서 결과는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걸 보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누구보다 심란한 나디아 앞에서 감히 시녀가 동요할 수는 없어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마리는 울음을 참느라 코끝까지 빨개진 상태였다.


“왜 그런 얼굴이야.”

나디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마리를 달랬다.

그 어른스러운 태도에 외려 마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연약하게만 보였던 우리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어엿한 마님이 되었는지.

이렇게 좋은 마님에게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건지.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마구 원망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리를 보며 나디아가 당황해서 허둥댔다.


“우, 울라고 한 소리가 아니었어…….”

“제가 지금 어떻게 안 울어요. 마님은 왜 이렇게 태연하시고요!”

마리가 답지 않게 소리를 높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사태를 만들어 낸 나디아의 숙부, 바인 후작을 잘근잘근 밟아주고 싶었다.


“진짜 그게 숙부인가요? 나쁜 놈인 줄은 알았지만 어쩜 이리 악독할까요! 나쁜 놈!”

마리가 잘하지도 못하는 욕을 마구 뱉어내며 바인 후작을 욕하기 시작하자,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디아가 놀라서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마님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어요? 어떻게요. 작위를 가져간 것만으로는 부족했느냔 말이에요.”

마리가 씩씩대며 손으로 눈물을 대충 훔쳐 냈다.

잔뜩 흥분한 마리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나디아도 점점 정신을 되찾았다.


“마리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까지 흘리는 나디아를 보며 마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마님은 왜 이렇게 태연하세요!”

“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진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난 딱히 상관없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불임이 아니라면 아니니 좋았을 테고, 불임이라도 알테어가 아이를 못 가지는 건 아니니 크게 상관없는 일…….”

“마님!”

마리가 화들짝 놀라서 나디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설마 나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지요?”

“나쁜 생각이라니?”

“그, 밖에서 아이를 낳아오라고 한다든가, 이혼을 먼저 청하신다든가…….”

“불임이라면 그 수밖에 없잖아. 내가 싫다고 알테어에게 후계자를 갖지 말라고 해?”

“그건…… 그건…….”

무조건 나디아의 편인 마리도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초연하게 모든 것을 놓아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알테어는 나디아를 부인으로서 존중해 주고 있었다.

나디아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알테어는 분명히 그녀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리. 리온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저는 못 들었습니다. 어서 마님께 가 보라는 소리만 듣고 나왔으니까요.”

“그랬구나.”

나디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를 바라보았다.


“비오스케스 공작가를 떠나 몸을 숨겨야겠어.”

“……예?”

 

 
마리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다, 곧 나디아의 의도를 알아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를 못 가지셔도 마님은 정당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세요! 이렇게 떠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응. 나도 알아, 마리. 이건 나를 희생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차분한 나디아의 설명에 마리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우뚝 자리를 지켰다.

나디아는 이대로는 마리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곧 상속법이 개정될 거잖아. 그 후에 숙부의 작위가 박탈되어 내게 모든 것이 돌아오면, 내 후계자는 누가 되겠니? 난 아이도 없잖아.”

“그럼…… 그렇다면…….”

생각을 이어 가던 마리가 벼락을 맞은 듯 움찔하며 입을 떡 벌렸다.


“서, 설마 멜리사 아가씨가…….”

“그래. 나뿐만 아니라 그 애에게도 상속권이 생겨. 내게 자식이 없는 한 다음 후작은 그 애가 될 거고.”

“아버지가 불미스럽게 내쳐졌는데, 어떻게 그 딸에게 상속권이 있을 수 있지요?”

“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죄목은 연좌제로 처벌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마리. 법이 그래.”

“……망할 놈의 법!”

마리가 또다시 어울리지 않게 거친 소리를 내뱉자 나디아가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리가 대신 욕해 주니 내 속이 다 시원한걸.”

“원래 마님이 못 하시는 건 시녀가 대신하는 거예요.”

“그리 생각해 줘서 고마워, 마리. 그러니 내 뜻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하자.”

“떠나다니…… 저는 아직 왜 떠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멜리사 아가씨에게 상속권이 있다지만 아직 마님이 건재하신데…….”

“내가 갑자기 죽으면?”

“네?”

“내가 갑자기 죽으면 멜리사가 곧바로 작위를 잇겠지.”

“마, 마님이 왜 죽나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셔요.”

마리가 불안한 얼굴로 나디아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역시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속이 말이 아니라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디아는 마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다는 듯 잠시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 문밖을 힐끗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잔뜩 경계하는 듯한 모습에 마리의 마음에 의아함이 솟아나려는 순간.


“근처에 숙부의 끄나풀이 있는 것 같아.”

나디아가 놀라운 소리를 꺼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리온이 날 진찰했잖아. 내게 꼬박꼬박 자기가 지어준 약을 먹었냐고 묻더라고. 거르지 않고 모두 먹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지.”

“거르신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제가 직접 챙겼으니 확실해요.”

“맞아.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리온이 이상하다고 하더라고. 자기가 계산한 용량대로 약을 먹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해독이 많이 된 상태여야 하는데, 효과가 절반 정도만 먹혀든 것 같다고 말이야.”

“계산을 잘못한 것은 아니고요?”

“내가 저택에 지낼 때부터 쭉 관찰한 것이라 다를 리가 없대. 그래서 리온이 의심하기로는, 내가 수도에 온 이후 해독약을 먹긴 했지만, 동시에 독도 섭취한 것 같다고…….”

“세상에.”

마리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바인 후작가에 머무를 때는 아주 조심했어. 먹는 것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잖아. 조리 과정도 마리가 직접 관찰했고.”

“네. 그리했어요.”

“하지만 비오스케스 공작가에 온 뒤로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잖아?”

“그럼…… 설마…….”

“이곳에 숙부가 심어 둔 자가 있는 모양이야. 그자가 내게 약을 먹게 한 거고. 아마 우리가 선전포고하고 비오스케스 공작가로 왔으니 그때부터 마음먹고 나를 없애기로 하신 거겠지.”

“그, 그래서 저택을 떠나셔야 한다는…….”

“그래. 이제 상황을 이해했지? 멜리사는 몰라도 숙부님은 치밀한 사람이야. 우리가 적이 된 순간부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날 없앨 작정이셨던 게 분명해.”

나디아의 설명에 마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결 차분해진 눈빛이었다.


“그럼 위험한 놈이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낫겠네요.”

“응. 그리고…….”

“네. 그리고요?”

“알테어에게는 우리 계획은 알리지 않으려고 해.”

“……네? 그럼 영주님께 알리지 않고 떠나시겠다고요? 그럼 그 위험한 놈은 어찌 잡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알테어에게 공유하고 도움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

몸을 피하고 있을 만한 안전한 장소도 그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당연한 의문을 담은 눈빛에 나디아가 다소 머쓱하다는 듯 웃음을 흘리자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가를 지키고 있어야 할 카인이었다.


“……?”

마리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카인은 그런 마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디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이동하시죠. 후작가로 모시겠습니다.”

“후작가라니…….”

나디아는 혼란스러워하는 마리를 향해 빙긋 웃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거기에 있으면 나쁜 놈은 물론이고 알테어도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전혀 모르지 않을까? 후작가를 지키라고 보낸 카인을 내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보안은 확실해.”

“네. 이번에는 무조건 마님 편을 들기로 했습니다. 빚이 있으니까요.”

“아, 아뇨! 마님, 카인 경. 애초에 왜 영주님께 계획을 안 밝히시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아. 원래 적을 속이려면 우리 편까지 속이라고 하잖아. 그게 확실하지. 알테어가 침착하면 이곳에 숨어든 나쁜 놈도 이상한 걸 눈치챌 거야. 알테어가 연기가 뛰어나진 않으니까…….”

나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알테어는 비오스케스 공작의 믿음을 얻기 위해 날 두고 상황을 시험했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리온의 믿음을 얻기 위해 알테어를 시험하려고 해. 리온의 믿음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거든.”

“물론 그분은 뛰어난 의사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마리. 에일스포드에도 그렇지만, 내게도 리온이 꼭 필요해. 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리온의 말로는 당장 안정을 취하고 해독에 집중해야 유산하지 않을 거래.”

“……아이? 네? 아가씨, 아니, 마님, 아이라니…….”

“리온은 알테어가 불임인 아내를 내칠 거라고 굳게 믿고 있거든. 아내가 사라지면 고민도 없이 다른 여자를 들일 거라고. 하지만 난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신하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오해를…….”

“자, 잠깐만요, 마님! 아, 아, 아, 아이라니…… 웁!”

카인이 당황해서 허둥대는 마리의 입을 틀어막으며 빙긋 웃었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영주님을 속여 먹을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떠들다가 날려 버릴 순 없으니까.”

“예전에 카인은 발하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날 위험에 던져둔 죄가 있어서…… 기꺼이 내 편이 되기로 했어, 마리.”

“그럼요. 무조건 마님 편입니다, 저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단순히 죄를 갚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듯 카인이 즐겁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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