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종이와 꽃 사이. (112/170)


112화. 종이와 꽃 사이.
2022.06.29.



 


“바인 가의 주치의는 사고로 급사했다고 합니다. 그 날짜가 재판 하루 전이었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치의를 처리한 모양이군.”

알테어는 블란의 보고에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주치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순간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였다.

물론 알테어는 절망하지 않았다.

세상을 모두 뒤져서라도 방법을 찾으면 된다.

끝까지 방법을 못 찾을 수도 있겠지만 시작부터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알테어의 방식이었다.


“가장 쉬운 방법을 잃은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선 해독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해보도록.”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인 후작 쪽은 안 찔러보십니까?”

“거래를 하려고 들 게 뻔한 데다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신뢰할 수 없다. 해독약인 척 독약을 건넬지도 모르지. 그런 위험한 걸 나디아가 먹게 할 수는 없어.”

조카를 이런 상황에 밀어 넣은 숙부의 어떤 면을 보고 협상을 할 수 있겠나.

본디 협상은 신뢰가 있는 상대와 하는 것이다.


“저어…… 만약…….”

“그만.”

명령을 받은 블란이 바로 떠나지 않고 머뭇대며 입을 떼자 알테어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무슨 소리를 할지는 알겠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무작정 제 입을 막으실 일이 아닙니다. 중차대한 문제이니 터놓고 대책을 세워야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마님과 결혼하신 것도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그래서?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더러 아내를 버리라고?”

날카로운 눈빛에 블란이 펄쩍 뛰었다.


“버, 버리라는 말은 저도 못 합니다! 그래도 에일스포드의 미래는 중요하고, 또…….”

스스로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듯 결국 입을 꾹 다문 블란이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착한 마님께 왜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따라붙은 건지!”

“투덜거릴 시간에 몸을 움직여. 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불이 나는 걸 어떡합니까? 영주님은 어떻게 이리 태연하실 수가 있는지…….”

냉철하게 상황을 타개하는 타입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아무리 주군이라도 놀라웠다.

그러나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알테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는 제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태연해 보이나?”

단순히 한마디 했을 뿐인데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을 하고 있을 뿐, 사실은 누구보다도 크게 동요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실언했습니다. 누구보다 여유가 없으실 터인데.”

“나디아만큼은 아니겠지. 아무튼 움직여. 방법을 찾아내. 난 내 아내도, 에일스포드도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예!”

블란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굳이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는 모습에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으나 곧 무표정함을 되찾았다.

도무지 미소를 지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계신가요.”

예의를 상당히 생략한 말투며 차분한 목소리가 익숙했다. 리온이었다.


“……들어와.”

리온은 나디아의 불임을 알릴 때와 똑같이 차분한 얼굴로 들어와 알테어 앞에 섰다.


“조금 전 마님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흐린 리온이 알테어에게 엽서를 내밀었다.

얼핏 보기에도 익숙한 나디아의 필체가 새겨져 있어서, 알테어는 얼른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말린 꽃잎이 들어간 종이로 만든 우아한 엽서는 따스한 질감과 달리 싸늘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 일로 머리가 복잡해져 잠시 휴식이 필요합니다. 기한을 약속드릴 수는 없지만, 마음이 정리되면 돌아오겠습니다. 나디아.]

가는 곳도 밝히지 않고, 귀환 예정일도 밝히지 않은 나디아의 메시지에 알테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리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짧은 엽서를 한참이나 읽고 있는 알테어를 유심히 관찰하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대로 부인이 안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툭 던진 말에 알테어의 시선이 리온을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리온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은 누구보다 귀부인의 의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후계자를 낳을 수 없다니, 이대로 떠날 생각인지도 모르죠. 영주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니…… 윽!”

리온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알테어가 한 손으로 리온의 목을 제압해 벽에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어떤 식으로 비난하든 태연하게 반응했던 알테어가 이토록 격렬하게 대응한 건 처음이라 리온은 다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주한 남자의 시선이 당장이라도 제 목을 꺾어버릴 듯 사나워서 더욱 놀라웠다.


“할 말과 못 할 말은 잘 구분해야지, 의사.”

“못 할 말이었습니까?”

그러나 리온은 쉽게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럴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에일스포드에 오겠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왜 내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부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당신 스스로에게 화를 내셔야죠.”

“…….”

단호한 지적에 알테어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리온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리온은 알테어의 손을 밀어내고 소란에 구겨진 옷을 정돈하며 고개를 떨군 알테어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가 사라졌으니 제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겠군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리온이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는 순간에도 알테어는 미동조차 없었다.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리온은 알테어의 반응을 떠올렸다. 자신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몇 번이나 엽서를 읽으며 넋이 나간 것 같았던 모습이 꼭…….


‘충격받은 것 같았지.’

리온 스스로 세워두었던 알테어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무너지는 듯했지만, 그는 완전히 경계를 풀진 않았다.

당장은 아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놀라서 그런 반응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성을 되찾으면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아내를 쳐낼 것이 분명하다.

지난날 제 부모님을 죽였던 것처럼.

나디아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고, 알테어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고 설득했지만, 리온은 의심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죽어가던 아버지가 분명 새로운 영주님이 범인이라고 말했다. 뇌리에 박힌 그 유언 같은 이야기가 리온에게는 무엇보다 강렬한 동기였다.

우선 적의 가장 깊은 곳에 침투했으니 중요한 약 개발만 끝나면 복수를 할 거다.

그런데 계속 그의 강렬한 동기를 흔드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믿을 수 없어.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서 의문은 계속 피어났다.

과연 내 생각이 맞는 건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알테어의 반응과 장담하던 나디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우선은 부인을 고치는 일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있다. 에일스포드가 아니라 바인이다.

그렇게 리온이 목적지를 정하고 다급히 걸음을 옮기는 그때, 방 안에 홀로 남은 알테어도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알테어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바로 나디아가 남긴 엽서였다.

엽서에 담긴 내용도 당연히 그를 흔들어 놓았지만, 묘한 직감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엽서의 질감이었다.


‘종이가 미묘하게 두꺼운데.’

겉으로 봐서는 전혀 티 나지 않지만, 직접 만져보니 일반적인 압화지보다 두꺼운 게 느껴졌다.

물론 아주 미세한 차이라 알테어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만져본다 하더라도 쉽게 알아챌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와중에 재판장에서 종이의 차이를 집어냈던 나디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혹시……’라는 생각과 함께 묘한 확신이 그의 뇌리에 꽂혔다.

알테어는 엽서를 노려보며 잠시 고민하다 그대로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포를 뜨듯 종이 끝을 붙잡아 떼어내자 신기하게도 간단히 층이 나눠지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이런 식으로 분리할 수 있게 만든 엽서임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조심스레 손을 놀리던 알테어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얇은 종이를 두세 겹 더 벗겨내니 마침내 엽서보다 작은 크기의 쪽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디아의 진짜 메시지였다.

[발견했나요?]로 시작하는 쪽지에 알테어는 그만 긴장이 풀려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만약 알테어가 숨겨진 쪽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 진짜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시험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나디아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알테어가 반드시 이 쪽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신뢰한 것이다.

알테어가 이 미묘한 두께 차이를 알아차릴 것이라고, 이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탐색하리라는 신뢰.

그 신뢰가 느껴져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지는 듯했다.

알테어는 손에 든 메시지가 나디아 그 자체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을 파묻었다.

압화지에 남은 것은 말라버린 꽃이라 향취가 남아 있을 리 없는데도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킨 알테어가 천천히 이어진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쪽지를 읽는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

[알테어라면 분명 발견했겠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는 걸 전혀 몰라요. 마리조차도요. 그러니 이 쪽지를 읽고 나면, 아무것도 읽지 못한 것처럼 행동해 주세요. 부디 당신의 연기력이 내 생각보단 훌륭하기를…….

비오스케스에 숙부님의 끄나풀이 있는 것 같아요. 리온의 계산으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거짓말하지 않을 사람이니 그의 판단을 믿어요.

하여, 잠시 공작저를 떠나 안전한 곳에서 해독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리온이 공작저를 떠난대도 붙잡지는 말아 주세요. 날 치료하려고 자리를 비우는 것일 테니까요.

끄나풀의 정체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지만, 피신한 곳에서 안전히 찾아볼 작정입니다. 알테어는 움직이지 말아요. 상대가 들켰다는 걸 알아채고 도망칠지도 모르니까요. 카인이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어서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메시지에서 ‘카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알테어는 나디아가 어디로 몸을 숨겼는지 알아챘다.


‘바인 후작가로 간 모양이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적의 중심으로 들어가 숨겠다는 전략인가. 나쁘지는 않다.

[많이 걱정되겠지만 날 믿고 맡겨 주세요. 알테어는 항상 나를 많이 도와줬고, 그건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번 일은 내 손으로 해결하고 싶어요. 그래야 바인 후작가를 손에 넣더라도, 또 앞으로 만나게 될…… 아무튼 모두에게 스스로 떳떳할 것 같습니다.

날 믿는다면 절대로 나서지 마세요. 대신 리온의 부모님을 살해한 자의 정체를 알아내 줘요. 이번 기회에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꼭 부탁할게요.]

다급하게 쓴 메시지인지 뒤로 갈수록 글씨가 흐트러진 게 느껴졌다.

늘 차분하고 꼼꼼하게 글씨를 쓰는 나디아를 알기에 이런 흔적조차 간지럽게 느껴졌다.

나디아가 드물게 강한 어조로 믿어 달라고 했으니 믿어 주는 수밖에 없는데, 걱정되는 마음은 이미 후작가로 달려가고 있다.


“당신…… 날 피 말려 죽일 셈이야……?”

알테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쪽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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