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쿵! (113/170)


113화. 쿵!
2022.07.03.



 


‘알테어는 잘하고 있겠지……?’

나는 비오스케스 저택에 남아 있을 알테어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편지를 발견한 후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상의도 없이 도망간 거니까 화를 낼지도.’

부부끼리는 뭐든 상의해서 결정해야 한다며 알테어에게 신신당부했었는데 그걸 스스로 깨버린 게 우습기도 했다.


“확실히 비오스케스 공작가에 독수를 뻗친 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곳에 계실 때보다 해독이 많이 되셨군요.”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진찰을 마친 리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해독약은 꾸준히 드시고, 유산을 방지할 수 있는 약도 함께 처방하겠습니다.”

성심성의껏 날 치료해 주는 리온을 보고 있으니 살짝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와는 알테어에게 상황을 전혀 알리지 않고 떠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게 날 돕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어기고 알테어에게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남겨두었으니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리온을 볼 때마다 심장이 콕콕 쑤셔왔지만 나는 가슴을 펴고 당당해지려 노력했다.


‘드, 들키지 않으면 그게 진실이야.’

알테어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부인으로서 그의 좋은 점(?)은 잘 흡수해야겠지.

게다가 가장 중요한 임신 사실은 알리지 않았으니 완전한 배신은 아닌 셈이다.


“……고마워요.”

마음을 다잡고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네자 리온은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이 나옵니까.”

“어쨌든 날 고쳐주려고 노력하잖아요. 게다가 알테어와 날 갈라놓으려는 것도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고요.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날 위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잘못된 믿음에 대한 고집을 빼면 리온은 아주 좋은 사람이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군요.”

리온이 오묘한 표정으로 진료 도구를 챙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못된 믿음이라…… 부인이 가진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안 합니까?”

“안 해요.”

“고민도 안 하는군요.”

“당연하지요. 그러는 리온은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나요?”

“…….”

일말의 고민도 없었던 나와 달리 리온은 입을 떼기 망설여지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마음을 휩쓸고 있을 혼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 속의 알테어의 모습과 현실에서 내가 겪은 알테어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나 역시 처음에는 갈피를 잡기 힘들지 않았던가.

‘소설 속 알테어’를 진짜라고 믿고 수없이 경계했지만 결국 ‘내가 겪은 알테어’가 진짜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듯 리온도 그리될 것이 분명했다.


“나와 약속했죠? 이번에 알테어가 당신의 ‘시험’을 통과하면 온전히 그의 말을 신뢰해 주기로. 곧 그 약속을 지키게 될 거예요.”

“어디서 그런 확신이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알테어라는 인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거죠.”

“그는 딱히 선량한 사람 같지는 않던데요.”

“맞아요. 알테어는 선량하지 않아요. 애초에 난 리온에게 그의 선량함을 믿어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자신의 말에 동의할 줄은 몰랐는지 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그 모습이 우습게 느껴져서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알테어는 상대의 뒤통수를 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무자비하게 밟아버리는 쪽이지, 뒤에서 얍삽한 수작을 부리는 부류는 아니거든요.”

“무자비하다니…… 남편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아내도 있습니까.”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전 알테어의 그런 면이…….”

오히려 숙부처럼 얍삽한 인간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아하게 된 거고.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살짝 얼굴을 붉히자 리온이 이어질 이야기를 알겠다는 듯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정말로 그가 끝까지 부인을 내치지 않는다면 제 오판을 인정하고 에일스포드에 충성하지요.”

“약속을 지키리란 걸 알아요.”

“……그러니까 왜 중간에서 깽판이나 치는 날 그렇게 믿는, 하, 아닙니다.”

리온이 영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어째서인지 투덜대는 그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아무튼 임산부는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부인은 특히 중독된 상태라 안정이 중요하죠. 다른 일에 나설 생각은 말고 푹 쉬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어, 음, 네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니 리온이 혀를 차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을 정말 못하시는군.”

“하지만 비오스케스에 숨어 있던 문제의 독수를 찾아내야 해서…… 물론 크게 무리할 일은 없을 거예요! 카인이 돕기로 했으니까요!”

“어떻게 독수를 찾을 생각이신데요?”

“음, 우선은…….”

“우선은?”

“기다리는 거죠!”

 

***

나디아가 비오스케스 공작저를 떠나고 며칠 뒤.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요양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공작저를 넘어 수도 귀족가까지 퍼져나갔다.

부인의 병세 때문인지 에일스포드 남작이 밤잠을 못 이뤄 늘 초췌한 얼굴로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아주 틀린 소문은 아니었다.

비오스케스 공작가에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에일스포드 남작이 초췌한 몰골로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며칠 안으로 상속법 개정은 통과될 것 같은데…….”

여러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는 비오스케스 공작이 소문 속에서처럼 초췌한 에일스포드 남작 알테어를 앞에 두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 전에 자네가 먼저 죽겠군. 도대체 무슨 일인가?”

“처리할 일들이 좀 있었습니다.”

“처리할 일?”

“예. 집안 사정이라. 공작께서 마음 쓰실 일은 아닙니다.”

“사람 몰골이 이런데 마음이 안 쓰이겠나?”

비오스케스 공작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용인들도 다들 자네 눈치만 보고 있다네. 자네가 제어 못 하는 기운을 평범한 사람들은 못 견뎌. 지금 내게도 느껴질 정도인데…….”

대놓고 사람을 공격하는 기운은 아니지만, 알테어 주위로 불안정한 기운들이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기운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검의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는 평정심이 아주 중요했다.


“부인이 아프다더니. 그것 때문에 그런 건가? 내가 유능한 의사를 보내주지. 황제 폐하의 병도 돌보는 의사이니 도움이 될 거야.”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 부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더 말하지는 않겠지만…….”

걱정 가득한 비오스케스 공작의 시선을 받으며 알테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던 일이 있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보겠습니다. 상속법 개정 직후 바인 후작을 처리하는 문제와 아내의 상속 절차는 제가 직접 마무리하지요.”

“그, 그렇게 하게…….”

초췌한 몰골에 비해 말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비오스케스 공작은 다소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알테어가 몸을 돌려 걷는 와중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뒤늦게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긴 자네 방이니 내가 나가야…….”

이곳은 알테어의 방이었다. 상대를 찾아온 쪽은 알테어가 아닌 비오스케스 공작이었고.

그러니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건 이쪽이었다.

하지만 비오스케스 공작이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온 공간을 울렸다.

생각에 잠겨 걷던 알테어가 눈앞의 벽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박치기해버린 탓이었다.


“…….”

알테어 정도의 경지에 이른 기사가 벽을 못 보고 부딪히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입을 떡 벌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반사적으로 마나를 둘러 몸을 보호한 건지 애꿎은 벽이 박살 나 있었다.


 


“……괜찮나? 황제 폐하의 병도 돌본다는 그 의사는 자네 부인이 아니라 자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은데.”

비오스케스 공작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복도 끝에서 기묘한 시선이 알테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알테어는 몸에 묻은 먼지를 무심히 툭툭 털어내면서도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누구인지 모를 그 끄나풀도 다음 행보를 보여줄 차례였다.

***



“소문이 비오스케스 공작저 너머 다른 귀족가에까지 퍼질 정도면, 이제 독수를 쓴 자도 내가 그곳에 없다는 걸 확신했을 거예요. 다음 지령을 받기 위해서 분명 숙부님과 접촉을 시도하겠죠.”

카인은 나의 짐작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바인 후작은 발스테드에 갇혀 있습니다. 거긴 아무나 쉽게 접촉할 수 없는 곳인데요.”

“그러니 오히려 접근할 방법이 한정적이지요. 발스테드가 어떤 경우에 면회를 허용하는지 알고 있나요?”

“그거야…….”

“투옥된 자가 아프면 직계가족이 의사를 대동하고 만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감옥에 갇힌 자를 국고로 치료하지는 않을 테니 원한다면 너희 돈으로 죄수를 치료하라는 뜻이죠.”

“그럼……?”

카인이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짐작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마 숙부의 지병을 핑계로 발스테드에 가겠죠. 그러자면 숙부의 유일한 가족, 멜리사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요.”

“그럼 이제 그 끄나풀이라는 자가 그 여자를 찾아오겠군요!”

“맞아요. 가만히 앉아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셈이죠.”

“이야…… 저택을 나서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감탄하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카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스스로 자신감을 느끼자!’라고 늘 생각하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대단하다는 눈빛을 받으면 여전히 민망했다.


‘평생을 가도 이런 건 안 익숙해질 것 같아.’

태연하게 다른 사람의 찬양을 받는 사람들이 새삼 신기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 여자의 주위에 대한 경계를 평소보다 더욱 철저히 하겠습니다. 이미 개미 한 마리 제대로 얼씬 못하게 차단하고 있지만요.”

카인이 다소 장난스럽게 경례하며 의지를 불태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곤란하죠. 오히려 평소보다 느슨하게 경계를 풀어 주세요. 상대가 안심하고 멜리사를 찾아올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 그렇군요. 경계가 너무 철저하면 그쪽에서 오히려 의심하고 접촉을 꺼릴 수도…… 한 수 배웠습니다, 마님! 이렇게 총명한 마님을 부인으로 얻다니, 시골 촌뜨기인 우리 대장님은 무슨 복이 있어서!”

그냥 두었다가는 낯 뜨거운 찬양이 계속 이어질 기세라 나는 서둘러 카인의 등을 떠밀었다.


“그, 그러지 말고 얼른 가서 일해요!”

“네? 아직 할 말이 한참이나 더 남았는데요! 아직 마님을 향한 저의 존경심을 반의반의 반의반도 못 표현했습니다!”

떠밀려 밖으로 나가면서도 쉴 새 없이 종알대는 카인의 모습에 머리가 띵해졌다.

정말이지, 알테어가 왜 제 기사들을 피곤해하는지 백번 이해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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