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꼬리잡기. (114/170)


114화. 꼬리잡기.
2022.07.06.



 


“보고해.”

짧게 명령하는 알테어를 바라보는 블란의 표정이 미묘했다.

자기 상관이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블란은 알테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튼튼하고 강한 남자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할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진심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빛나던 잘난 얼굴이 썩 초췌해 안쓰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디아가 비오스케스 저택을 떠난 후 알테어는 쭉 이런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나디아를 찾으라거나, 그녀를 고칠 의사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 의아했다.

평소의 알테어였다면 나디아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바로 저택을 뛰쳐나가 스스로 그녀의 행방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알테어는 그렇게 하는 대신 오래전의 사건에 대해 강력하게 조사를 지시했다.

수도에 오느라 잠시 지체되었던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였다.

블란은 ‘이럴 때가 아닌 거 아냐?’라고 생각하면서도 분주하게 알테어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나디아의 행방이 궁금할 사람은 알테어 아니겠나.

큰 계획이 있어 이런 명령을 내린 듯하니 블란은 괜히 그의 속을 긁는 대신 분주하게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보고하라니까.”

이번에도 돌아오는 건 피곤함에 젖은 명령이라 블란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알아 온 내용을 전하기 시작했다.


“……네. 보고하겠습니다.”

에일스포드에서 시작된 조사의 방향은 이랬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생각한 자들은 발하일과 그 아버지였다.

선대 남작에 이어 알테어까지 세상을 떠나면 당장 그들 집안에 작위와 영지가 돌아가게 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가정이었다.

당연히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갑자기 찾아온 행운 아닌 행운에 잔뜩 탐욕을 부렸을 뿐, 사전에 일을 계획적으로 벌인 정황은 없었다.

원래 그럴 만한 머리가 없는 인간들이기도 하니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블란은 조금씩 범위를 확장했다.

상속 순위를 따져 차례로 행적을 조사했지만 모두 수상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수사 방향을 잃고 잠시 조사 속도가 떨어졌던 것이 수도로 떠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도에 와서야 보험 설계의 존재가 드러났다.

당시에는 생각도 못 했지만, 정황을 정리해 보니 발하일 부자는 보험 설계자와 손을 잡고 선대 남작 부부를 불태워 죽인 원흉이었다.

어린 알테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모님의 보험금을 비롯한 남작가의 재산들이 발하일 부자 손에 들어갔으니 그들의 계획은 큰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그런데도 꼬리가 잡히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접선해 온 보험 설계자의 계획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기만 했을 뿐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리온의 부모를 죽이라고 지시한 범인의 정체도 조금 가까워진다.


“안전하게 보험금을 받으려면 의사가 반드시 ‘화재 사고’가 사망 원인이라고 말해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선대의 주치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보험금을 타려는 자는 어떻게든 그가 침묵하도록 만들어야 했고요.”

“죽음보다 확실하고 쉬운 침묵은 없지.”

“예. 상대는 확실하고 쉬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역시 보험설계자의 계획이었다는 건가?”

“그가 매수한 놈을 찾아냈습니다. 에일스포드 인근에서 활동했던 용병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이 생겼다며 자리를 잡고 가게를 열었다더군요.”

“에일스포드 인근에서 활동했다면 마수 잡는 일을 했을 텐데, 갑자기 큰돈이 생길 만한 의뢰는 많지 않지.”

마수 사냥을 주 수입원으로 삼았던 에일스포드가 괜히 가난했던 게 아니다.

용병들에게도 마수 사냥은 그리 큰돈이 되는 의뢰는 아니었다.


“예. 시기 역시 미묘해서 신경이 쓰였는데, 흔적을 쫓아 보니 수도의 갤러리에서 발행한 어음으로 돈을 찾은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피곤함을 담은 알테어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수도의 갤러리에서 발행한 어음이라니.

보험 설계에 대해 몰랐다면 선대 남작 부부의 죽음과 이 어음의 관련성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흉악한 살인자가 오랫동안 정체를 감추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연결고리가 유실되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놈도 수도에서 보험 설계가 문제 되어 난리가 난 걸 알고는 황급히 재산을 정리해 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우습게도 정착한 마을에서 꽤 평판이 좋았는지 다들 그가 떠나는 걸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가 흉악한 살인자인 줄도 모르고요.”

“악인은 놀랍도록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지. 놀라운 일도 아니군.”

“뭐. 그거야 그렇지요.”

“그래서,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우선 데려왔습니다. 낯짝이 궁금하실 것 같아서요.”

뿌듯하게 웃는 블란의 모습에 알테어가 비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의 낯짝에는 관심 없어. 내가 관심 있는 건 그놈의 입에서 나올 진실뿐이다.”

그 진실이 있어야 나디아를 맞이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알테어의 모습에 블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심문하시려고요?”

“그래.”

“다른 일도 많으신데, 그냥 제가 해도 됩니다.”

“아니. 내가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

알테어가 담담하게 대꾸하며 블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놈을 어디에 데려다 놓았는지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알테어는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 후 줄곧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일을 벌인 녀석들에게 속 시원하게 복수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험설계자 드윈호퍼와 그의 높은 선인 1황자에 대한 처분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났고, 그들에게 동조한 발하일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나마 발하일은 알테어의 계략에 반역죄를 뒤집어쓴 채 발스테드에 들어가 있었지만, 만약 부모님의 죽음에 깊이 연관되었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를 치워버리진 않았을 거다.

그런 와중에 온전히 제 손으로 처리할 수 있는 관련자가 나타났으니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알테어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블란은 어깨를 으쓱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며 그 용병 놈의 명복을 빌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은 이상했지만, 블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테어가 직접 심문한다면 그놈은 죽는 것보다 더한 공포를 체험하게 될 테니 응당 명복을 빌어 줘야 하지 않겠나.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싹싹 빌게 될걸.’

블란은 벌써 오싹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테어와 같은 편이라 너무도 다행이었다.

***

몸에 좋은 약은 왜 항상 쓰고 맛이 없는 걸까.


“으으…….”

죽을상을 하고 약을 모두 비웠더니 마리가 달콤한 사탕을 건네주어 나는 얼른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온이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씁니까?”

“원래 쓴 걸 잘 못 먹어요. 해독은 얼마나 남았나요?”

“최대치로 양을 늘렸으니…….”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며 리온을 바라보니 그가 다소 부담스러운 듯 내 시선을 휙 피했다.


“……이대로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 사흘 안으로는 독기를 모두 빼낼 수 있을 겁니다.”

“사흘!”

“뭐, 계산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그때 가서 다시 진찰을 해 봐야 합니다. 푹 쉬며 컨디션 조절을 잘했을 때를 기준으로 계산한 거니까요.”

“그래도요. 기약이 없었는데 어떻게든 가시권에 들어왔잖아요. 무조건 푹 쉴 거예요.”

기쁜 마음에 사탕을 오도독 씹어 먹으니 리온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당연히 좋지요.”

“해독약을 끊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몸이 워낙 약하니 임신 내내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충격에도 유산할 수 있어요. 아이를 낳는 일도 쉬운 게 아닙니다. 출산하다가 죽는 사람도 여럿 봤고…….”

불길한 이야기를 우르르 쏟아내던 리온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리도 내 얼굴을 보고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는 듯 팔꿈치로 리온의 옆구리를 강하게 쿡 찔렀다.

나는 희미하게나마 웃으려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 마리. 나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리온은 의사로서 걱정되는 걸 말한 것뿐이야. 그게 현실이잖아.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힘이 돼. 마리도, 리온도, 그리고 또…….”

알테어도.

나는 벌써 그리워지는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진심으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수많은 불확실함이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이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모든 것을 나 혼자만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감히 이 부담감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알테어가 모든 과정에서 든든하게 날 지지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리온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든 걱정에 벌벌 떨면서 이상한 곳에서 낙천적이시군요. 뭐, 벌벌 떠는 것보다야 낫습니다만…….”

그가 신기한 생물 보듯 나를 관찰하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마님!”

속삭이듯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인이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다급하게 들이닥친 카인을 향해 마리가 질책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카인은 아직 입을 떼지 않았지만 그가 다급하게 들이닥친 것만으로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멜리사를 찾아온 사람이 있구나!’

그리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은밀하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 방으로요. 최대한 티가 나지 않도록 경계를 느슨하게 풀었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더군요.”

“예상대로네요. 누구인지는 파악했나요?”

“아직입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요. 지금 그 여자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현장을 급습하면 어떨까 싶은데, 먼저 마님의 허락을 구하려고 서둘러 왔습니다.”

“급습이라……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궁지에 몰린 상대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 좀 더 확실하게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럼 대화를 마치고 떠나면 그때 뒤를 밟아볼까요?”

“그러다 놓치면 어떡하죠?”

“놓친다고요?”

내 질문에 카인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픽 웃음을 흘렸다.


“마님. 저는 누구도 놓치지 않습니다. 제가 항상 누구의 등을 보며 뒤따라가는지 아시잖습니까.”

카인의 앞에는 항상 알테어가 있다.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정도라면, 웬만한 실력자는 눈을 감고도 뒤를 쫓을 수 있을 터.

근거 있는 자신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카인은 그가 떠나길 기다렸다가 뒤를 밟아 줘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붙잡아 오지요.”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멜리사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그 여자와 이야기를요?”

카인이 잔뜩 얼굴을 구기며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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