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꼴이 우스워. (115/170)


115화. 꼴이 우스워.
2022.07.10.



“카인은 반대인가요?”

“물론 반대입니다. 말이 통하는 상대도 아니고, 대면했다가 괜히 무슨 험한 일을 겪으시려고요.”

당연한 걸 뭐 하러 묻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멜리사를 밀착 감시하며 그녀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듯했다.

어떤 사람과도 유연하게 잘 어울리는 카인이 이런 반응이라니.

멜리사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일이에요.”

카인이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리와 리온도 카인의 편인 것 같았다.

설득할 사람이 셋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잠시 머리가 아득해졌지만, 나는 차분하게 내 생각을 풀어 놓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멜리사를 쳐낼 명분이 없어요.”

“바인 후작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쳐낼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그건 우리 생각이지요, 카인. 사람들의 생각은 안 그래요. 멜리사는 재판장에서 확실히 보여 줬어요. 모든 일은 숙부 혼자 꾸몄고, 자기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요. 지금 사람들 눈에 멜리사는 나쁜 아버지를 둔 철없는 딸일 뿐이죠.”

그런 사람을 내치면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힐 수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다.

비난이 호의로 바뀌는 건 아주 오래 걸리지만, 호의가 비난으로 바뀌는 건 하루아침에도 가능했다.


“멜리사를 무작정 쫓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간 겨우 끌어모은 동정의 시선을 잃을 테죠. 약자라고 생각해 동정을 베풀었는데, 제가 강자가 되어 멜리사를 일방적으로 내친다면…….”

“큰 반감을 불러오겠군요.”

카인이 조금 상황을 이해하겠다는 듯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요. 사람들은 동정을 베풀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게 큰 배신감을 느낄 거예요. 나는 끝까지 완전무결한 피해자로 남은 채 멜리사를 쳐내야 해요. 그러려면 그 애가 숙부처럼 나쁜 사람이 되어 주어야겠죠.”

“뭐…… 조금만 부추기면 언제든 나쁜 짓을 할 만한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카인이 턱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상황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멜리사를 부추겨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염두에 둔 바가 있었다.


“난 그 애를 부추기는 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웃으며 여유롭게 말하자 카인은 비로소 내게 계획이 있음을 알아채고는 눈을 반짝였다.

신뢰로 가득 찬 시선을 받으니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멜리사는 무기를 하나 가지고 있죠. 그걸 마음껏 사용하도록 기회를 주면 어떨까요?”

“무기라면…….”

“그 애는 내가 불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진단서도 있으니 확실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아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고요. 기회만 생기면 내가 하자 있는 인간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열심히 이야기를 퍼트릴 거예요.”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카인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도 해답을 찾은 듯했다.


“불임은 귀부인에게 아주 큰 불명예죠. 특히 나처럼 아직 후계자를 낳지 못한 여인에겐 치명적이에요. 남작 부인으로서 실격인 건 물론이고, 상속법이 개정된다고 하더라도 후사를 이을 수 없으니 후작으로서도 자격 미달인 셈인데…….”

“하지만 마님은 이미 임신하셨지요. 소문이 명백한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실 수 있습니다.”

“맞아요. 그러니 멜리사가 실컷 소문을 퍼트리게 두었다가, 내가 직접 나서서 헛소문인 걸 밝히면 돼요.”

거기다 헛소문 때문에 충격받은 남작 부인이 유산할 뻔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까지 살짝 얹어준다면 멜리사는 완벽한 가해자가 될 것이다.

자신의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했던 카드가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는 결과로 돌아온다면…….


‘그 애는 아주 큰 좌절감을 느끼겠지.’

그리고 나는 좌절에 빠진 멜리사를 이 저택에서 깨끗하게 쳐낼 수 있는 것이다.


“조력자를 만나 내가 자격을 잃으면 자신이 후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을 테니 잔뜩 몸이 달았을 테죠. 조금만 속을 잔뜩 긁어 주면 밖으로 뛰쳐나가 신나게 소문을 퍼트릴 거예요.”

“…….”

“어때요? 이제는 멜리사와 대면하는 걸 말리지 않을 거죠?”

카인과 마리, 리온을 차례로 바라보니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 아닌가?


“그렇게 결정되었으면 가죠. 낚시하러.”

낚아야 하는 대상은 당연히 멜리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배를 매만져 보았다.

손으로 만지면 확연히 부푼 것이 느껴지지만,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티가 나지 않는 상태였다.

멜리사는 그리 눈썰미가 좋은 편이 아니니 충분히 속아 넘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낚으려면 좀 더 풍성한 드레스를 입는 게 좋겠지?”

마리를 돌아보며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멜리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즐거운 듯했다.


“마침 떠오르는 옷이 있네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님!”

 

 

***

마리가 준비해 준 옷을 입고 카인의 뒤를 따라 비밀통로를 걸으니 치마가 걸리적거려 불편했다.


‘이런 옷은 평소에 잘 안 입는단 말이야.’

워낙 간소하게 입다 보니 이렇게까지 치마가 풍성한 드레스는 오랜만이었다.

멜리사가 즐겨 입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애와 나는 취향이 완전히 달랐으므로 내겐 아주 어색했다.

하지만 ‘멜리사 아가씨에게 밀리면 안 돼요!’라며 열심히 나를 꾸민 마리는 지금의 차림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뒤를 따라 걷는 동안 마리가 작게 콧노래를 불렀기에 그녀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었다.


‘뭐, 마리가 즐겁다면 됐지.’

이렇게 화려하고 풍성한 옷에는 좀 더 당당한 태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평소보다 어깨를 더 활짝 펴고 앞으로 걸으니 괜히 용기가 차올랐다.

멜리사가 머무르고 있는 방에 도착하자 카인이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아직 ‘손님’은 떠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음. 대화가 끝나길 기다려 줄 필요는 없겠지.”

문을 두드려 방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굳이 그런 배려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대로 문을 벌컥 열어 버렸다.

내가 이런 돌발 행동을 할 줄은 몰랐는지 카인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카인 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멜리사와 문제의 남자도 아주 놀란 듯했다.

반사 신경이 어찌나 좋은지, 멜리사와 마주 앉았던 남자는 나와 카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인도 재빨리 나를 지나쳐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나도 후다닥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창가로 다가갔다.

물론 그 둘처럼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대담한 행동은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별안간 벌어진 대낮의 추격전에 정원사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게 보였다.

절대 상대를 놓치지 않겠다던 자신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런 걸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카인의 움직임이 남자보다 훨씬 가볍고 빠르게 느껴졌다.


‘와아.’

속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치니 어째 카인의 걸음이 더욱 빨라진 듯했다.


“뭐, 뭐, 뭐, 뭐야?!”

여유롭게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으니 등 뒤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멜리사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다.


“가, 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여긴 내 집이야! 당장 꺼져!”

“글쎄. 여기가 너희 집인가, 멜리사?”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으니 멜리사가 더욱 분노해서 발을 마구 굴렀다.


“야! 그럼 아니란 소리야?”

“아. 그래. 너희 집이구나. 아직은.”

“허? 아직은? 곧 아니게 될 거라는 소리야?”

“당연하지. 상속법이 개정되면 숙부님은 작위를 박탈당할 거야. 후작위는 내게 돌아올 거고, 이 집도 내 것이 되겠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지.”

“흥. 상속법 개정? 겨우 그따위 것을 믿고 이러는 거였니?”

멜리사가 가소롭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코웃음을 흘렸다.


“여성도 작위를 상속받을 수 있다니 아주 놀라운 일이지. 네가 그 혜택을 누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도 하자 없는 사람에게나 그렇겠지. 너 같은 건 자격이 없어.”

“내가 왜 자격이 없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멜리사가 오히려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네 남편이 말 안 했어?”

“뭘?”

“어머.”

멜리사가 눈을 크게 뜬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직…… 말을 안 했나 보네? 난 네가 사실을 알고 내게 싹싹 빌러 온 줄 알았는데.”

“내가 왜 네게 싹싹 빌겠어?”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는 네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모를 거야, 나디아. 지금 네 처지가 어떤지도 모르고 이리 꼿꼿하게. 하하.”

키득대던 멜리사가 재미있어 죽겠다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도 네 남편이 의리는 있구나? 당장에 널 내칠 줄 알았는데.”

멜리사가 한결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숨을 깊게 토해냈다.

그 모습이 마치 승리를 거머쥔 여왕님 같았다. 아마 스스로도 그런 기분에 취해 있겠지.


‘사실 정말로 꼴이 우스운 건 너인데.’

그런 현실을 까맣게 모르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에 자극을 받은 건지 멜리사가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언제나 날 비웃지.”

“내가? 너를?”

“그래! 귀하신 레이디라며 다들 떠받들어 주니 콧대가 높아졌겠지! 나도 바인인데,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나도 후작의 손녀로 당당하게 여길 드나들었는데, 너희 아버지가 후작이 되자마자 여기서 쫓겨나서……!”

확실히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가족을 중시해서 결혼한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지 않고 바인 저택에서 머무르게 했다.

후계자를 제외한 자식들을 혼인하자마자 내보내는 다른 집안과 분위기가 달라서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멜리사가 어째서 나만 보면 늘 적대적으로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시에는 멜리사와 나, 모두 후작의 손녀였으니 썩 동등한 대우를 받았었다.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인데 그걸 특별 대우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꼴이라니.


‘……순수한 할아버지의 호의가 오히려 나쁜 욕심을 심어 줬구나.’

“멜리사. 난 한 번도 널 비웃은 적 없어.”

“흥. 말이야 그렇게 하겠지. 그런데…….”

멜리사는 코웃음을 흘리며 내 말을 대충 흘려 버리고는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걸’ 알고 싹싹 빌러 온 게 아니라면, 도대체 날 왜 찾아왔어?”

“숙부님이 실각하면 너 역시 갈 곳이 없어지잖아. 지난날 내게 함부로 대했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면 이 저택에 계속 머무르게 해 주겠다고, 그 말을 하려고 왔어. 이건 순수한 호의이니 받아도 돼.”

“뭐? 사과하면 저택에 계속 머무르게 해 주겠다고? 순수한 호의?”

속을 긁으려고 일부러 고압적인 자세로 관용을 베푸는 척하자 예상대로 멜리사가 씩씩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할 소리를. ‘그 사실’이 알려지면 너 따위는 후작이 되지도 못해. 주제를 알고 지껄여야지, 나디아. 넌 항상 네 주제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게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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