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네 무능함이 널 죽이겠지. (116/170)


116화. 네 무능함이 널 죽이겠지.
2022.07.13.



 
태연한 척 나를 조롱하고 있었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는 바람에 그다지 품위는 있어 보이지 않았다.


‘사실 품위라는 건 늘 없었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기다려. 내가 네 주제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멜리사가 쿵쿵대며 걸음을 옮겼다.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밖으로 가서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요!”

마리가 당황한 척 멜리사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거칠게 팔을 휘둘러 마리를 밀어냈다.


“앗!”

마리가 맥없이 바닥을 나뒹굴자 멜리사는 더욱 기세등등해져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거의 감금된 채로 시간을 보냈으니, 탈출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잔뜩 신이 났는지 발걸음이 매우 경쾌해 보였다.


‘어휴. 그게 함정을 향해 가는 걸음인 줄도 모르고.’

멀어지는 멜리사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으니 열연을 펼친 마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뿌듯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제가 바닥을 나뒹굴기까지 했으니 마님께서 일부러 자극한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마리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다치진 않았어?”

멜리사가 워낙 우악스럽게 팔을 휘저어 댔기에 마리가 다치진 않았는지 걱정부터 들었다.

그러나 마리는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휘휘 내젓더니 자신의 튼튼함을 과시하기라도 하려는 듯 두 팔에 불끈 힘을 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의 시녀는 바닥을 나뒹구는 정도로는 다치지 않으니 걱정 마셔요.”

“마리…… 갈수록 안나를 닮아가는 것 같아…….”

바른 시녀의 모범이었던 마리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입을 떡 벌리며 감탄 아닌 감탄을 꺼내자 마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안나 양은 쾌활해서…… 저도 모르게 물들었나 봅니다. 자중하겠습니다.”

“아, 아냐!”

마리가 생각지도 못한 사죄를 건네서 나는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싫다는 게 아니라 보기 좋다는 거였어! 마리는 항상 어깨에 힘을 주고 있으니까. 종종 이렇게 편안한 모습을 보여 주면 기쁜걸. 물론 늘 안나처럼 어수선하다면 곤란하겠지만…….”

마리가 안나처럼 푼수 같은 행동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안 어울려.’

말로 꺼낸 적도 없는데 내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잘 알겠다는 듯 마리가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마님…….”

“알았어. 더는 상상 안 할게.”

대신 다른 상상을 해 본다.

지금쯤 멜리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하는 상상.


‘숙부님께서 완전히 몰락해서 멜리사 역시 아군을 많이 잃었지.’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끝없이 구애하던 신사들도 멜리사를 외면해 사교계에서도 고립된 상태라고 들었다.


‘그럼 귀족의 인맥은 활용할 수 없으니…….’

길바닥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가게에 걸어 들어가 비싼 물건을 구경하며 점원에게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봤어?’라며 이야기를 던지기만 해도 며칠 안에 소문이 쫙 퍼질 거다.

후작가에 진단서가 남아 있었다더라, 실각한 후작은 조카를 끝까지 지켜 주려고 했는데 그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진실이 드러났다더라, 자격도 없는 자가 후작이 되는 건 말도 안 되지 않을까.

그렇게 번화가에 퍼진 소문은 금세 귀족가로 흘러갈 것이고,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레 멜리사에게 접근하겠지.

그때 멜리사는 눈물을 쏟아 내며 나의 결함을 모두에게 떠들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건 소문이 진짜일 때나 가능하겠지만.’

멜리사가 진실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야기는 거짓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마음껏 움직여 봐, 멜리사.’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창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마님!”

아직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지만, 카인의 뿌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추격전을 벌인 끝에 상대를 잡아낸 모양이었다.

숙부에게 동조해 무서운 독을 쓴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나만 위험한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하마터면 아이까지 유산할 뻔했다.

나는 흉흉한 기세로 몸을 돌려 카인이 붙잡아 온 상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모습에 맥이 빠져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어린애?”

확실히 어린애였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청소년인 듯했다.

한참 추격전을 펼칠 때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체구도 성인보다 작았다.


“어린놈이 발이 아주 날래던데요.”

카인이 상당히 고전했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며 상대를 바닥에 내던졌다.

밧줄로 꽁꽁 묶인 상대는 완전히 제압당해 이를 바드득 갈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자 카인이 한숨을 내쉬며 발로 그의 상체를 짓눌렀다.


“윽!”

“제대로 제압했으니 묻고 싶은 걸 물으시면 됩니다, 마님.”

“네. 수고했어요, 카인.”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카인이 더욱 기세등등하게 소년의 가슴을 짓눌렀다.

덕분에 소년은 잔뜩 찡그린 채로 맥없이 버둥거리기만 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소년과의 거리를 좁혔다.

내가 갑자기 가까워질 줄은 몰랐는지 소년은 물론이고 카인까지 놀라서 소리를 높였다.


“마, 마님! 제압하긴 했지만, 너무 가까이는 안 가시는 게…….”

“매일 사탕을 가져다주던 그 애구나.”

“……예?”

내가 알은체하자 카인이 놀라서 눈을 끔뻑댔다.


“아는 놈이신가요?”

“공작저에 머무를 때도 계속 약을 먹었는데, 내가 쓴 걸 못 먹으니 마리가 공작가 시녀에게 부탁해 사탕을 받았거든요. 매번 이 녀석이 사탕을 가져다줬죠.”

“어…… 그럼 그 사탕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네요. 약을 먹을 때마다 확실하게 독을 먹이려면, 내가 약과 함께 먹는 무언가에 손을 쓰는 게 제일 편했을 테니까요. 사탕이라니. 말 그대로 달콤한 독약이었네.”

독이 든 줄도 모르고 사탕을 와그작 씹어 먹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순간 머리가 아파졌다.


“왜 날 해치려고 했니?”

숙부의 사주를 받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기꺼이 동참했다면 이유가 있었을 터.

정말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거라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헛웃음을 흘렸을 뿐이었다.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돈을 받았으니 하는 거지.”

“돈? 그게 이유야? 고작 그것 때문에 사람을 해쳐?”

“고작? 너같이 풍족한 귀족한테나 고작이겠지.”

소년이 적의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내 옷차림을 훑었다.

평소보다 화려하고 풍성한 옷차림을 확인한 소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굶어 죽어. 병도 치료 못 해.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둘 뿐이라고.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돈이 필요하다는데 그게 왜 고작이야?”

“네가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건 괜찮다는 뜻이야?”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너희 귀족들도 우리 같은 천한 것들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잖아.”

“그렇구나. 네 생각은 그런 거로군.”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니 마리가 걱정스러운 듯 내 곁으로 다가왔다.


“마님. 처분은 기사님께 맡기시죠. 조심하셔야 하는 시기이니 험한 일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냐. 내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편리하게 떠넘길 수는 없어.”

독수를 쓴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이후의 일까지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마리의 말처럼 임신 중이니 험한 처벌은 안 내리고 싶은데…….’

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간적으로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정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독을 먹이며 나도 힘들었다고.

그렇게 사죄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안 하는 게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어떻게든 불쌍한 척을 하며 자비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년은 절대 굽히지 않고 살벌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카인도 그런 모습이 썩 놀라웠는지 흥미롭다는 듯 묘한 콧소리를 냈다.


“마님.”

내가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카인이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시녀 아가씨의 말대로 귀한 몸이시니 험한 벌을 내려 업을 쌓는 건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미신일 뿐이라지만 굳이 불길한 일을 할 필요가 없지요. 물론 영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지체 없이 목을 베었을 테지만…….”

서늘한 카인의 시선이 소년의 목을 향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눈빛이 살아 있다.

다시 한번 카인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이놈을 에일스포드 기사단에서 쓰고 싶습니다. 이리저리 굴리며 훈련하다 보면 머리에 찬 괴상한 생각도 조금쯤은 달라지겠지요.”

“그냥 죽여! 자비는 필요 없…… 윽!”

카인은 별다른 대꾸 없이 반항하려는 소년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소년은 허공에 두 다리가 뜬 채 버둥댔다. 숨이 막히는지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자비라니. 넌 이게 자비로 보이나? 에일스포드 기사들은 마수를 잡는다. 실력 없는 놈은 마수의 발톱에 찢겨 죽어. 네가 그렇게 바라는 대로 죽을 수 있다. 누구의 손도 더럽히지 않고, 네 무능함이 널 죽이게 될 테지.”

“으윽!”

늘 물렁물렁하던 카인이 싸늘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낯설면서도 ‘이게 에일스포드의 기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기사의 의무 앞에서는 이렇게 진지해지는 거겠지. 알테어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런 기사의 선택이라면 신뢰할 수 있었다.

카인의 선택을 신뢰하기로 한 것은 내 선택이니, 곧 나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럼 이 소년은 카인에게 맡기지요. 혹시라도 이 녀석이 친절하게 사탕을 건네도 먹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하. 그건 정말 조심하는 게 좋겠네요.”

카인이 유쾌하게 웃으며 소년의 주머니를 마구 털었다.

그러자 내가 쓴 약을 먹은 뒤에 항상 찾았던 색색의 사탕이 마구 튀어나와 바닥을 굴러다녔다.


“아. 그러지 말고 이 사탕을 이놈에게 먹일까요? 이런 놈의 후사는 없는 쪽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닐지…… 아, 이건 여자에게만 통하는 건가? 잘 주워 놨다가 의사 선생에게 물어 봐야겠네요.”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와 너스레를 떠는 카인을 보고 있자니 심각했던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나뒹구는 사탕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한 알을 밟아 보았다.

그러자 사탕은 맥없이 부서져 가루만이 바닥에 남았다.

비로소 모든 골칫거리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



“여,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블란이 바닥을 구르듯 서둘러 안으로 튀어 들어왔지만, 알테어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왜? 놈이 결국 입을 여는 대신 자결하는 걸 택했나?”

알테어가 직접 추궁했지만 사주를 받고 리온의 부모를 죽인 놈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을 말해도 죽은 목숨, 입을 다물어도 죽은 목숨이라는 걸 아는지 끝까지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했다.


‘어차피 그놈이 돈으로 교환한 어음을 확보했으니 자백까진 필요 없지만.’

거기다 마을 주민들에게 술에 취한 그놈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라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다는 증언도 확보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술에 취해 헛소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부모님이 죽는 순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리온이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 자가 범인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터였다.

그러나 블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놈은 증거를 들이대니 결국 자백했는데…….”

“그럼? 상속법 개정이 불발되었나?”

“그럴 리가요. 그건 오전에 통과되었습니다. 번화가에 호외도 돌았는걸요.”

“그럼 도대체 뭐가 큰일이지?”

“아! 그게……!”

잠시 다른 길로 샜던 블란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수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불임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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