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또다시 재판장. (117/170)


117화. 또다시 재판장.
2022.07.17.



 


“…….”

편안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테어의 미간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소문의 진원지는?”

“번화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웬 화려한 여자가 상인들에게 떠들었다고 하는데…….”

“멜리사 바인이겠군.”

“정황상 그러합니다.”

알테어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소문의 내용은?”

“그것이…….”

“괜찮으니 전부 말해.”

머뭇거리는 블란을 향해 알테어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블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고 제가 들은 것을 모두 풀어놓기 시작했다.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은 불임이다. 후작가에 진단서가 있었는데, 후작이 실각하고 어수선한 틈에 그게 밖으로 유출되어 알려졌다. 후작은 조카를 감싸려고 그걸 감추고 있었다. 남작 부인은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도 그걸 숨기고 결혼했다.”

“그래서…… 후작의 자격도 남작 부인의 자격도 없는 사기꾼이다?”

“여, 영주님!”

차마 전하지 못한 소문까지도 알테어가 입 밖에 꺼내자 블란이 화들짝 놀라 그의 눈치를 살폈다.

블란은 그가 당장이라도 폭주해 소문을 속삭이는 자들을 찾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불안했다.

하지만 짐작했던 것과 달리 알테어는 매우 평온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린 것이 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퀭한 얼굴로 비죽 웃는 알테어 에일스포드라니.

그 기괴한 풍경에 블란은 넋이 나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드, 드디어 실성하신 건가?’

그게 맞겠지.

돌아 버린 게 아니고서야 알테어가 이런 상황에서 웃을 리가 없다.

상황이 너무 막막하니 그 대단한 알테어도 정신을 놓는구나!

블란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하는 사이 알테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부인은 원하는 걸 다 얻은 모양이군.’

알테어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나디아가 의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소문이 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 오히려 이렇게 소문이 퍼진 것이 더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녀는 리온이 자신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디아가 확신하는 거라면, 알테어도 믿을 수 있었다.

알테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디아가 회복되었다니. 정말로 다행이었다.

물론 상황을 전혀 모르는 블란은 진심으로 울상이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영주님. 곧 바인 후작을 처결하고 마님께 작위를 상속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될 텐데…… 불임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논쟁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렇다. 한바탕 논쟁이 벌어져 모두의 앞에서 진실공방이 벌어질 테지.


‘나디아가 원하는 무대가 어디인지도 확실히 알겠군.’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멜리사가 가진 카드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무척이나 대담한 수였다.

알테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

상속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공식적으로 숙부에 대한 처분이 내려져 그는 작위를 박탈당했고, 덕분에 바인 후작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이제 그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후보는 나와 멜리사, 두 사람이었다.

물론 ‘그 소문’이 아니었다면 귀족들은 평화롭게 나에게 작위를 돌려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멜리사는 수도 전역에 ‘그 소문’을 퍼트리는 것으로 ‘나디아 바인이 과연 후작이 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훌륭하게 끌어냈다.

결국 황제는 주요 귀족들 앞에 나와 멜리사를 불러 진실을 확인하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그의 결정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황제께서 직접 판단하시겠다니…… 떨리지 않으세요?”

마리가 몸을 감싼 로브의 리본을 단단히 묶어주며 덜덜 떨었다.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날이라 생각하니 늘 덤덤한 마리도 떨리는 모양이었다.


“걱정은. 진실이 우리 손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그래도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님을 마구 비난할 텐데…….”

“금세 태도를 바꾸게 되겠지. 거짓으로 시작된 비난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해.”

“마님…….”

차분하게 대답하며 마리를 달래자 그녀가 감격한 듯 울상을 지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늘 무서워하시던 분이 어쩜 이렇게 성장하셨는지!”

“그, 그렇게까지 감격할 필요는…….”

민망해서 헛기침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마차 앞에 대기하고 있던 카인이 얼른 나를 에스코트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지만, 그렇다고 지각하는 건 곤란하니 조금 서둘러야겠습니다. 준비는 되셨지요?”

“물론이에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인이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마님, 이 기사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겠습니다!”

 

***



‘다시 여기로군.’

황제의 질의는 숙부와 논쟁을 벌였던 재판장에서 열리게 됐다.

정식 재판은 아니었지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인 듯했다.

귀부인의 불임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인지, 숙부와 재판하던 때와 달리 구경꾼들의 입장은 허용되지 않았다.

오로지 작위를 누구에게 넘기는 것이 옳은가 판단할 귀족들만 참석할 수 있었다.

재판장에 도착하니 멜리사는 이미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숙부와 싸울 때 내가 섰던 고소인의 자리였다.

남은 자리는 피소인의 자리뿐이니 나는 자연스레 그곳에 설 수밖에 없었다.

멜리사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이 승리했다는 양 코웃음을 흘리며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정식 재판이 아니니 자리는 중요하지 않은데.’

대수롭지 않게 멜리사의 시선을 받아넘기니 그녀가 오히려 분개해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게 보였다.

모든 행동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반응하다니. 참으로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들이 모두 왔으니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황제는 삐딱하게 턱을 괴고 앉아 나와 멜리사를 쳐다보았다.

나를 향한 시선에 묘하고도 날카로운 의심이 담겨 있는 걸 보니 멜리사가 퍼트린 소문이 진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문이 워낙 구체적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황제는 먼저 멜리사에게 질문했다.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이 불임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멜리사는 황제의 시선에 긴장한 것인지 어깨를 움츠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께서 금고에 진단서를 두셨는데, 거, 거기에 분명히 적혀 있었습니다. 나, 나디아가 불임이라고요.”

“그럼 바인 후작, 아니, 아바르 바인은 조카가 불임인 걸 알면서도 다른 집안에 시집을 보냈다는 건가?”

“그, 그건 나디아가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빌었기 때문일 겁니다! 부, 불임인 게 알려지면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는데, 그, 그렇게 되면 평생 독수공방하다 늙어 죽게 될 테니까요!”

“확실히 불임이라는 건 치명적이지…….”

황제가 동의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그 진단서는 어디에 있지?”

“그, 그게…… 집안이 혼란스럽던 찰나에 유실되어서…… 소, 소문도 그래서 퍼지게 된 겁니다!”

차마 알테어를 협박하러 갔다가 진단서를 빼앗겼다고는 말할 수 없었겠지.

나는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말을 꾸미는 멜리사가 우스워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모두가 조용히 질의에 집중하는 와중에 웃음을 흘리니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황제 역시 할 말이 있느냐는 듯 내게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고 기꺼이 발언 기회를 가져왔다.


“모두 헛소리입니다, 폐하.”

“흥.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을걸?!”

멜리사는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목소리를 높이며 황제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진단서는 없지만, 의사의 진찰을 받으면 금방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공정한 진단을 위하여 황실의 의사를 불러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 소문이 진실인지는 의사에게 진찰받으면 금방 밝혀지겠지.”

의사의 진단은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증명이었다.

멜리사가 이토록 당당하게 의사를 불러올 것을 주장하자 한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직 결과가 나오기 전인데도 다들 수군대며 적의에 찬 눈으로 날 보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하나, 남작 부인? 진찰받겠나?”

황제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제안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거절할 수 없는 일방적 명령이었다.

하지만 나는 명령에 따르지 않기로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폐하. 제 상태는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황궁의는 과중한 업무로 바쁜데, 저 같은 사람을 진찰하느라 시간을 써서는 안 되지요. 모든 시간을 폐하와 황가를 위해 써야 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폐하!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진찰을 거부하는 겁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는 거지요!”

멜리사가 의기양양해져 목소리를 높였다.

날 향하는 황제의 눈빛 역시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진찰을 거부하는 건가, 남작 부인?”

“진찰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오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불임이 아닙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바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건…….”

나는 조심스럽게 마리가 단단히 묶어 준 로브의 리본을 풀었다.

그러자 온몸을 두르고 있던 로브가 아래로 떨어지며 내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늘은 몸의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는 디자인의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었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을 때는 전혀 티가 나지 않지만, 이렇게 딱 붙는 옷을 입으면 배가 부른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는 되었다.


“허억!”

자리를 잡고 앉은 귀족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멜리사 역시 부풀어 오른 배를 확인한 건지 손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며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어, 어어……? 왜, 왜 배가…….”

나는 그런 멜리사를 무시하고 황제를 향해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임신을 한 몸입니다. 불임이라는 것은 임신하지 못한다는 뜻인데, 이렇게 임신했으니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이라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불임이 아닙니다, 폐하.”

“허허…… 확실히 그 모습은…….”

황제마저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확실하게 소문이 파괴될 것이라고는 이 자리의 어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재판장에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건 요란하게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니…… 알테어가 멍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서프라이즈!’

나는 알테어를 향해 빙긋 웃으며 입 모양으로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너무 큰 서프라이즈였는지 알테어는 석상처럼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배, 배에…… 그래…… 배에 뭘 넣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게 분명해…….”

그때 고소인석에 있던 멜리사가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횡설수설하더니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사기꾼! 배에 뭘 넣은 거야? 당장 빼지 못해?!”

번뜩이는 멜리사의 두 눈에 광기가 가득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멜리사가 나를 덮쳤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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