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놀아났군. (118/170)


118화. 놀아났군.
2022.07.20.



 


‘어라……?’

눈을 질끈 감으며 요란하게 바닥을 구른 것에 비해 아픔이 크지 않았다.

아니, 크지 않다기보다는…….


‘전혀 안 아파!’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서서히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방청석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건지 알테어가 나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분명 멀리 있었는데 어떻게 알테어가 여기에?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가?

얼떨떨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알테어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디아, 당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알테어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잊고 있던 존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기꾼! 불리해지니 남편 품에 숨는 거야?”

멜리사는 알테어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분노에 찬 얼굴로 내 배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정말로 그녀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내가 임신한 척 분장해 모두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남은 건 몰락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집요한 멜리사의 공격은 알테어의 방어 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알테어는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나를 보호하며 멜리사를 가볍게 밀어냈다.


“악!”

알테어의 가벼운 손길에 멜리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고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나뒹굴기까지 한 멜리사가 수치심에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 처량한 모습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단순하게 물리적으로 맞서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폐하! 저 계집애는 진료를 거부하면서 감히 높으신 분 앞에서 눈속임하려는 겁니다! 확인을 막는 남작도 한패가 분명해요!”

멜리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알테어를 노려보았다가 그의 싸늘한 눈빛에 흠칫 어깨를 떨며 다시 황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폐, 폐하…….”

웅성거리는 귀족들과 바들바들 떨면서 애원하는 멜리사의 모습에 황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와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소란으로 남작 부인도 놀랐을 테니 진찰을 한번 받아 보는 게 좋겠군.”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작 부인의 상태를 걱정해서 제안한다는 듯한 유려한 화법이었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알테어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다소 놀란 탓에 배가 당기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황제는 지체하지 않고 재빨리 사람을 보내 황궁의를 불러왔다.

갑작스럽게 호출받았는데도 황궁의는 차분한 태도로 나타나 나를 의자에 앉히고 신중하게 진찰을 시작했다.

최근 몸 상태가 어떠한지, 달거리는 언제부터 없었는지 같은 기본적인 질문도 잊지 않았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진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멜리사는 거짓말을 확신한다는 듯 삐딱하게 서서 날 노려보면서도, 차분하게 진찰받는 내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건지 초조하게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채였다.

한참이나 이어진 진찰 끝에 결론을 내린 건지 황궁의가 뒤로 물러나 황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래. 남작 부인의 상태는 어떠한가?”

수군대던 귀족들은 물론이고 알테어도 다소 긴장된 얼굴로 황궁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황궁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남작 부인은 확실히 임신한 상태입니다.”

차분한 결론에 조용했던 재판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임신이 맞대!’라든가 ‘그럼 헛소문이었던 건가?’라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황궁의는 소란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진찰해 보니 임신 초기라 안정이 중요한 시기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운 상황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태아가 많이 놀랐을 겁니다. 폐하께서 호의를 베푸시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 임신 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건 나도 잘 알지. 아이를 여럿 얻었으니까.”

황제가 재판을 시작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꾸하며 나와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축하하네. 상속법이 개정되었으니, 아이가 딸이든 아들이든 확실한 후계자를 얻은 셈이지.”

“감사합니다, 폐하.”

알테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황궁의의 말대로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부인이 많이 놀랐으니, 허락하신다면 어서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아아. 그렇지. 안쪽에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네. 그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다 안정되면 돌아가도 좋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알테어가 예를 갖춰 인사하자 황제가 어서 안내하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황궁의는 황명에 따라 예를 갖춰 우리를 재판장 밖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기 직전, 경악에 찬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멜리사가 황급히 우리 앞을 막아섰다.


“자, 잠깐만요! 뭐, 뭔가 착오가!”

“착오?”

싸늘한 목소리는 나나 알테어가 아니라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누가 보아도 무거운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급박한 상황에 내몰린 멜리사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에게 호소했다.


“네! 오, 오진입니다! 아, 아니면…… 미리 이야기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애는 불임이 확실하다고요! 분명히…… 확실하게……!”

“오진……? 미리 이야기되어 있어……?”

멜리사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황제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횡설수설하던 멜리사도 뒤늦게 황제의 분노를 알아챈 건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지만, 뱉어낸 말을 수습하긴 늦은 시점이었다.


“남작 부인을 진찰한 자는 황궁의인데 그의 능력을 의심하나? 황실이 그리 허술할 거 같아?”

“그, 그것이 아니오라…….”

“미리 이야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더욱 황당하군. 감히 황궁의가 외부인의 꼬임에 넘어 갔다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한쪽의 편을 들며 조작했다는 건가?”

황제가 눈을 부라리자 멜리사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 저는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런 말이 아니면!”

황제가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치며 분노를 토해냈다.

임신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수군대던 귀족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어느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싸늘하고 무서운 침묵이 재판장을 가득 채웠다.

황제의 분노를 정면으로 마주한 멜리사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다가,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저는…… 그러니까, 제 말은…….”

“닥쳐라! 촉새같이 떠들어대는 꼴을 더는 못 봐주겠군.”

황제가 멜리사의 변명을 듣는 것도 피곤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여봐라. 아무래도 저 애는 아비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다. 나란히 발스테드에 넣어 주도록 해라.”

“바, 바, 발스테드라뇨!”

최악의 감옥에 자신을 처넣겠다는 소리에 멜리사가 활어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멜리사가 반항할 틈도 없이 황제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그녀를 양쪽에서 잡아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폐, 폐하! 이건 분명 음모입니다! 확실히 불임입니다! 나디아 저 계집애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고요!”

끌려 나가는 순간에도 멜리사는 버둥대며 헛소리를 떠들어댔다. 그녀는 도저히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두 눈에 서린 절박함에 황제는 피곤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재판장을 채운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모두가 헛소문에 놀아난 셈이로군.”

황제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소문에 휩쓸린 귀족들이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토해냈다.

황제의 시선뿐 아니라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는 걸 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경솔하게 소문을 믿었는지 후회하는 듯했다.

후회한다고 해서 경솔했던 행동들이 모두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끝까지 제 주장을 고수하던 멜리사를 생각하면 한참 양반일지도.


‘게다가 이런 상황이면 다들 미안해서라도 내가 후작이 되는 문제를 적극 찬성하겠지.’

나는 황제가 귀족들을 신랄하게 질책하며 멜리사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었다.


‘남은 건…….’

나는 곁에서 나를 지탱한 채 묵묵히 걷고 있는 알테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충격받은 게 분명한 남편을 어떻게 달래느냐인데…….’

굳은 알테어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 내기 힘들어 더욱 긴장되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



“그럼 편히 안정을 취하십시오.”

황궁의가 나와 알테어를 남겨둔 채 공간을 떠났다.

재판 도중 참석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쉴 수 있도록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둔 모양인데, 그리 크진 않았지만 필요한 것은 모두 있어서 안정을 취하는 데는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데이베드에 앉아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나를, 정확히는 내 배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끝까지 침묵이 이어질 기세라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알테어.”

이름을 부르자 알테어와 시선이 마주쳤다.

딱딱하게 굳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조금 전까지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멜리사와 맞섰던 용기가 거짓말처럼 작게 쪼그라들었다.


“많이 놀랐죠……?”

“…….”

“그, 그게……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아니 숨겼다면 숨긴 건데…….”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변명도 멋지게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임신한 걸 알았다면 알테어는 절대로 날 보내 주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 일은 꼭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건데…….”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굳어 있는 알테어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화났어요? 응?”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알테어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까치발을 들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게 싫을 정도로 화가 난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다소 초조한 얼굴로 바닥을 살폈다.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다……라뇨. 그냥 까치발을 한 건데.”

“황궁의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조심해야 하는 시기라잖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게 까치발도 안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을걸요…….

하지만 알테어가 워낙 진지하게 바닥을 살피는 바람에 뒷이야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우선 앉아. 앉아서 이야기해.”

알테어는 이보다 신중할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나를 다시 데이베드에 앉히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날 한 대 때려 줬으면 좋겠군.”

“네?”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으니까.”

“어어…… 때, 때려 줄까요……?”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가볍게 주먹을 쥐어 흔들자 알테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혀 내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그래. 쳐.”

“네, 네에? 저, 정말로 치라고요?”

“그래.”

“어, 어떻게 알테어를…….”

물론 내가 있는 힘껏 알테어를 친대도 전혀 타격이 없겠지만…….

이 잘난 얼굴에 어떻게 주먹을 날린단 말인가.

하지만 알테어는 정말 한 대 맞아서 이 현실을 실감하기 전까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그,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알테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뺨에 부딪힌 건 내 주먹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쪽.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알테어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얼빠진 그 얼굴에 민망해서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어, 어떻게 때려요…… 그래도 이걸로 실감이 날 거 같아서…….”

버벅대며 이어지는 말에 알테어의 얼굴도 덩달아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이 작은 공간의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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