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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우리 집으로 가자. (119/170)


119화. 우리 집으로 가자.
2022.07.24.



“……확실히 이게 현실인 건 알겠군.”

알테어가 내 입술이 닿았던 뺨을 슬쩍 만지며 헛기침을 뱉었다.

다행히 그가 임신을 숨기고 떠나 있던 일로 화가 난 건 아닌 듯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런데…….’

알테어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그의 얼굴을 관찰하니 평소보다 안색이 안 좋은 게 느껴졌다.

눈 밑도 퀭하고 얼굴이 어두워서 아주 피곤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피부는 깨끗해서 역시나 미남은 미남이구나 싶었지만 말이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냐는 질문을 하려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고 상기된 얼굴의 블란이 들이닥쳤다.

그는 데이베드에 앉은 날 보며 감격한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곧 우당탕 내 앞으로 달려왔다.


“마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두 손을 덥석 붙잡은 블란이 금방이라도 감격의 눈물을 쏟을 기세로 날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블란보다 훨씬 들뜬 모습이었다.


“제가 소문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이제 다 끝났구나 했는데…… 이렇게 아기님을 가지시다니…… 윽!”

감격에 찬 이야기를 쏟아내던 블란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알테어에게 뒤통수를 맞고 뒷덜미가 잡혀 그대로 뒤로 끌려 나갔다.


“뭘 그렇게 난리야. 누가 보면 네가 애 아빠인 줄 알겠다.”

자신의 감격을 모두 말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운지 블란이 투덜대며 손을 내저었다.


“영주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평온하십니까? 저였으면 벌써 부인을 업고 동네 한 바퀴 돌았을 겁니다.”

“평온은 무슨…….”

알테어가 전혀 평온하지 않다는 듯 날 힐끗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블란은 그걸 미처 보지 못한 건지 답답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님이 안 계신 동안 영주님이 얼마나 죽을상이었는데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먹는 것도 잘 안 먹고…… 그러면서 또 일은 미친 듯이 하는데…….”

블란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영주님이니 버텼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쓰러지고도 남았을 겁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민망함 가득한 얼굴로 가볍게 제 머리를 털어냈다.


“저 녀석이 괜히 부풀리는 거야.”

“제가 카인입니까? 그 녀석이면 몰라도 전 언제나 객관적입니다.”

“헛소리 좀 하지 마.”

알테어가 매섭게 노려보자 블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도와 달라는 듯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아무튼 마님이 돌아오셔서 전 좋습니다. 아기님까지 함께 오셔서 더 좋고요. 이제 헛소리나 떠들고 다니는 놈들을 혼쭐낼 수…….”

“기사님!”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블란의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고개를 돌리니 마리와 카인이 한심한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블란을 쳐다보다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치가 왜 이렇게 없으세요?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방해하시면 안 되지요!”

“맞아. 눈치도 없지. 쯧쯧.”

양쪽에서 팔이 붙잡힌 블란은 반항할 새도 없이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카인이 힘내라는 듯 내게 눈을 찡긋해 보였고, 마리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알테어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블란을 끌고 나간 덕분에 공간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 상황이 어쩐지 우스워서 웃음이 터졌다.


“다행히 내 생각보다 당신의 연기력이 좋았나 봐요.”

“연기력?”

떠난 이유와 머무르는 곳까지 모두 알려 주고 공작저를 나갔으니 블란의 이야기 속에서처럼 알테어가 눈에 띄게 동요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그 나름대로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한 것이리라.


“네. 쪽지를 남기면서도 걱정했거든요. 당신 연기력이 그리 좋진 않았던 거 같은데…… 내가 소식을 전하고 나갔다는 걸 들키면 어쩌나 하고요.”

“내가 연기를 했다고 생각해?”

“아닌가요?”

“……당신 생각처럼 난 그리 연기력이 좋지 않아. 정말로 당신을 걱정했을 뿐이야.”

“그치만…… 이유도 행선지도 전부 알려 주고 떠났는데…….”

“그래도.”

알테어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어내며 똑바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도 당신이 내 눈앞에 없었잖아.”

“…….”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걱정됐어. 회복할 수는 있다지만 어쨌든 중독된 상태였잖아. 당신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거라고.”

“그렇지만 내 부탁을 들어줬네요.”

“어떻게 거절해? 부탁도 잘 안 하는 사람이 그렇게 진심으로 한 말을.”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그의 눈빛이 탐색하듯 나를 훑었다.

단지 눈길이 닿았을 뿐인데도 그가 손으로 온몸을 만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었다.


“왜, 왜 그렇게 봐요…….”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자 이번에는 정말로 손이 다가와 나의 두 뺨을 감쌌다.

알테어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들자 일렁이는 그의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건가?”

진중한 물음에 나는 안심하라는 뜻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임신했잖아요.”

“내 말은, 당신 몸이 괜찮은 거냐고. 그렇지 않아도 독으로 몸이 약해졌을 텐데 아이를 가져도 괜찮으냔 말이야. 아이를 갖는 건 여인의 몸에 큰 무리가 간다고 들었는데…….”

알테어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이 작고 연약한 몸으로 아이를 가지다니.”

걱정 가득한 알테어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임신 소식을 들은 알테어의 반응을 여러 번 상상해 봤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에 없었다.

사실을 숨겼다며 화를 내거나, 그런 것도 잊을 정도로 크게 기뻐하거나.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아이 자체보다 날 더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왠지 속이 간지러워져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그렇게 안 약해요. 알테어가 워낙 튼튼한 사람만 보고 살아서 그런 거지.”

“마리나 안나와 비교해도 당신은 약해.”

“아닌데…….”

“맞아. 그러니까 이제는 더욱 내 눈밖에 둘 수 없겠군. 계속 지켜봐야 마음이 놓이겠어.”

알테어가 단호하게 말하며 두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범인을 잡았어. 그 의사 선생의 부모를 죽인 놈.”

“정말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자 알테어가 희미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의심 많은 의사 선생도 믿을 만한 증거들을 꽤 확보했으니 오해는 풀 수 있을 거야.”

“다행이에요. 리온을 계속 곁에 둘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 그런데…….”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꼬리를 흐렸다. 다소 심통 난 얼굴이었다.


“그 의사 선생을 곁에 두는 게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아니라 당신과 에일스포드에 중요해요. 아, 이젠 아기가 생겼으니까 내게도 중요하고요. 리온의 해독약이 아니었다면 난 정말 소문 속의 여자처럼 살았을 테니까…….”

이젠 내게도 은인인 셈이다.


“내 의무를 다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너의 의무……?”

“네. 아내로서의 의무요. 알테어에겐 아이가 꼭 필요했잖아요.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있어서 기뻐요.”

“내가 원하는 것…….”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알테어가 더욱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뭔가 찜찜하다는 얼굴이었다.


“알테어?”

“아.”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걱정스럽게 알테어를 부르자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느껴졌다.


“아무튼 내 말은, 이젠 당신이 멀리 떠나 있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야.”

“그렇네요. 그럼 제가 다시 공작가로…….”

“그럴 필요가 있나?”

“네?”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조금 전의 찜찜한 표정은 모두 떨쳐버린 채 씩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대로 당신 집에 있으면 돼.”

“그대로…… 내 집에요?”

“그래. 바인 후작가. 이제 그곳이 당신 집이잖아.”

멜리사 바인은 황제의 진노를 사 발스테드로 갔다.

이제 바인 후작이 될 사람은 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가 작위를 받을 테고, 작위와 함께 가문의 재산도 딸려올 테니 알테어의 말처럼 바인 후작저가 내 집이 될 것이다.


‘내 집이라니.’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부모님의 걱정을 한몸에 받았지만, 동시에 사랑도 듬뿍 받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구박받으며 추억이 퇴색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시 아름다운 이야기로 과거의 어둠을 지워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집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 집이죠. 알테어의 집이기도 해요, 거긴.”

단호한 내 말에 잠시 얼떨떨하게 있던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렸다.


“맞아. 내가 실수했군. 확실히 거긴 우리 집이지. 에일스포드가 내 집이지만 당신 집이기도 한 것처럼.”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얼굴로 알테어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우리 집’에서 편히 쉬고 있어. 귀찮은 문제는 이제 내가 해결하고 오지. ‘우리 집’이니까 내게도 그 귀찮은 문제를 해결할 의무가 있지. 안 그래?”

 

***



“악! 이거 놔! 감히 어딜 만져?”

깊고 어두운 발스테드 감옥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이 소란에 항의할 법도 했지만,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의지를 잃은 죄수들은 그럴 기력조차 없는 듯했다.

단 한 사람, 목소리의 주인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 바인 후작, 아바르 바인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설마 이 목소리는?’

“멜리사? 설마 네가 여기 온 게냐?”

아바르가 놀라서 외쳤고, 그에 대한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갇혀 있던 공간의 문이 열리고 엉망인 몰골의 멜리사가 떠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악! 레이디를 이딴 식으로 취급하다니! 죽고 싶어?!”

안으로 집어 던져진 멜리사가 마구 악다구니를 써댔다.

아바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밀려오는 현실감에 사색이 되어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다.


“멜리사! 네가 왜 여기로 끌려와! 어? 너,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아버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던 멜리사가 제대로 씻지 못해 거지꼴이 된 제 아버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좀 떨어져요. 썩은 내가 나잖아요.”

“하. 그따위가 뭐가 중요해!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몰라요!”

멜리사는 제 팔을 붙잡아 흔드는 아바르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주저앉으려다, 바닥에 오물이 가득한 걸 깨닫고 질색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잖아요! 나디아 그 계집애가 불임이라면서요!”

“그래! 그걸 이용해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게 다 판을 짜 놨단 말이다!”

“짜 놓긴 뭘 짜 놔요? 나디아 바인이 임신했다고요! 아버지가 이상한 정보를 줘서 나까지 여기에 끌려 왔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임신이라니? 나디아 바인 그 계집애가 임신할 수 있을 리가…….”

“황궁의가 황제 폐하 앞에서 직접 진찰했단 말이에요. 그 계집애가 임신이라고, 제가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요! 이제 어쩔 거예요? 여기서 어떻게 나가요? 난 여기서 하루도 못 있겠다고요!”

절규나 다름없는 멜리사의 목소리가 발스테드를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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