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시끄럽지 않게. (120/170)


120화. 시끄럽지 않게.
2022.07.27.



 
아바르는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분명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크게 틀어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더러운 감옥에 질색하는 딸의 팔을 잡아끌었다.


“기운 빼지 말고 진정해라.”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멜리사가 뾰족하게 대꾸했지만, 이미 오랫동안 발스테드에 처박혀 있던 아바르는 이곳의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어. 간수들도 우릴 방치할 뿐이다.”

아바르의 말대로였다.

멜리사가 한참이나 요란하게 신경질을 부려댔지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거칠게 진압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감옥 바깥은 고요했다.

간수만 조용한 게 아니었다.

발스테드에 함께 갇혀 있을 수많은 죄수도 모두 무반응이었다.

그만큼 죄수들이 이곳의 삭막함에 지쳐 의욕을 잃었단 뜻이었다.

기이할 정도의 고요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깨달은 멜리사는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날뛰는 대신에 앞날을 궁리해야 해.”

“……앞날이 있긴 해요?”

멜리사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꾸하자 아바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선 어쩌다 여기에 끌려온 건지 설명해 봐라.”

“그건…….”

멜리사는 오늘 벌어졌던 일을 모두 아바르에게 설명했다.

그가 남겨 준 진단서를 가지고 에일스포드 남작을 협박한 일이며, 그러다 일이 나쁜 방향으로 풀려 저택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자 아바르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 좋은 무기를 그따위로밖에 못 쓰다니!”

“좋은 무기는 무슨…… 결국 거짓 서류였잖아요. 나디아 그 계집애가 임신했다니까요?”

“그건 분명 진짜였어! 네가 경솔하게 그 서류를 남작에게 보여준 탓에 뭔가 대처할 시간이 생긴 거겠지.”

“사람이 하루아침에 불임에서 임신이 된다니, 그게 말이 돼요?”

“그거야 그 애는 선천적으로 불임이 아니라……!”

아바르는 생각이 짧은 딸의 연이은 반박에 혈압이 올라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여자애라 어차피 작위는 못 물려준다는 생각에 교육을 제대로 안 한 게 문제였을까?

외모나 열심히 가꾸라며 화장품과 장신구, 예쁜 옷만 줄줄이 사 줬던 지난날들이 후회되어 머리가 아찔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아바르는 열이 오르는 기분을 애써 진정시키며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마 넌 며칠 내로 여길 나가게 될 거다.”

“며칠 내로요? 오늘 당장이 아니고요? 난 하루도 여기 못 있는다고요!”

“쉿. 그게 어디 네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아바르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대는 멜리사를 보며 답답함에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어쨌든 네 죄는 발스테드에 처박힐 정도로 크지 않다. 네 경솔함을 나무라기 위해 황제가 극약 처방했을 뿐이야. 나디아 그 계집애가 후작 작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사고 치지 말라는 의미로 격리해 놓은 것이기도 하겠지.”

“정말로 나디아가 후작이 되면…….”

멜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어디로 가요? 우리 집을 뺏기는 거예요? 내 옷은요? 내 보석도 다 거기에 있는데?”

“그래. 죄다 뺏기는 거다. 죄다!”

아바르는 자신이 나디아의 것을 그런 식으로 강탈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떻게 얻은 작위인데. 어떻게 얻은 부인데.

그 작은 계집애에게 밀려나 다시 잃을 순 없었다.

비록 발스테드에 처박힌 처지이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을 거다. 아직은…….

아바르가 위험하게 눈을 번뜩이며 멜리사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아직 길은 남아 있다. 어쨌든 넌 아직 바인 후작 후보야. 나디아 그 계집애가 없어지면 네가 후작이 될 거란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무슨 말인데요?”

“당연히 그 성가신 계집애가 어떻게든 죽어 줘야 한다는 말이지!”

“죽일 수는 있고요? 이제 걘 작위도 재산도 다 가지고 있는데, 우린 아무것도 없는 개털이잖아요!”

“더 잃을 것도 없는 상황이야. 도대체 뭐가 두렵겠어. 응?”

끝까지 몰린 인간은 어디까지 무모해질 수 있을까.

아바르는 조금 전보다도 훨씬 낮은 목소리로 딸의 귓가에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멜리사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



“으어어어!”

“아앗!”

이야기를 마치고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들 나와 알테어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가장 밑에 깔린 카인이 앓는 소리를 해 댔고, 그 위에 겹친 블란은 민망한 듯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런 일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안나는 당당하게 ‘마님!’이라며 날 반겼고,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이들 사이에 끼게 된 마리는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자세를 바로 했다.


“흠흠. 이야기는 끝나셨나요? 어디로 모실까요?”

마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묻자 바닥에 널브러진 두 기사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알테어가 가볍게 혀를 차며 지시를 내렸다.


“너희는 마님을 모시고 바인 후작저로 가라.”

“영주님은 안 가십니까?”

카인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 손만 들어 묻자 알테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오스케스 공작께 신세를 졌으니 제대로 감사 인사를 올려야지. 뒤따라 합류하겠다.”

“아. 그런 거라면…….”

확실히 비오스케스 공작에게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 역시 함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입을 떼자, 알테어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해.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많이 놀랐으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거야. 공작께서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실 테니 다음에 인사를 드려도 돼.”

확실히 멜리사의 돌발 행동으로 놀란 건 사실이지만, 알테어가 걱정하는 것처럼 심각한 상태도 아니었다.

게다가 급히 바인 저택으로 떠날 때 인사조차 없이 떠나는 실례를 범했으니, 지금이라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게 맞다.

하지만 마리까지 내 팔을 살짝 잡아끌며 알테어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마님. 영주님의 말대로 하셔요. 얼른 저택에 돌아가서 의사 선생님께 상태도 봐 달라고 하시고요. 마님은 괜찮으셔도 아기님은 연약하시잖아요.”

마리는 내가 지금 무엇을 가장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염려에 입을 꾹 다물고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매만지자 알테어가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 의사 선생에게 전해야 할 말도 있지. 블란이 ‘그놈’을 확보해 놨어.”

“아……!”

‘그놈’이라면 리온의 부모님을 죽인 범인!

나는 알테어의 의도를 조금 더 확실히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아직 알테어에 대한 오해를 풀지 않았으니, 그와 다시 마주하기 전에 그걸 정정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네요. 그 문제는 제가 잘 해결해 둘게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불태우자 알테어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뭐든 열심히 일하라는 소리로 알아듣는 거야? 당신은 절대로 나서지 마. 전부 블란에게 맡겨. ‘그놈’ 상태도 별로 안 좋고…….”

“상태가 안 좋아요?”

도대체 얼마나 상태가 안 좋길래?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황급히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뭐, 그렇게 안 좋은 건 아닌데.”

어쩐지 당황한 듯한 알테어의 모습에 블란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안 좋은 건 아니라뇨. 아주 사람을 곤죽으로…….”

“입.”

물론 블란의 중얼거림은 알테어의 짧고 굵은 경고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나는 모두의 염려를 받으며 편안하게 마차를 타고 바인 후작가로 돌아왔다.

떠날 때는 별채에서 몰래 나섰지만, 돌아올 때는 당당히 정문으로 본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이제 정말 여기가 내 집이라니.

아직은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아서인지 기쁘다는 감정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두 기사의 든든한 호위를 받으며 저택을 활보하니 숙부를 따랐던 사용인들이 의문과 경계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힐끗댔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 저택도 대대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네.’

다들 바인 후작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곧장 날 외면하고 숙부의 편에 붙었던 사람들이라 ‘우리 집’에서는 더 일하게 할 수 없었다.

저택을 싹 정리하는 일로 한동안 분주해질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내가 쓰던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그곳이 이제 멜리사의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방향을 틀었다.

멜리사의 눈치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 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방에 별로 발을 들여놓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나는 후작 부인의 방을 선택했다.

숙부는 오래 전 부인을 잃고 재혼하지 않았기에, 그가 작위를 받은 뒤에도 어머니가 쓰던 후작 부인의 방은 주인이 없었다.

그러니 숙부나 멜리사의 흔적 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후작 부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집사가 문 앞에서 나를 가로막은 탓이었다.


“여긴 못 들어가십니다. 손님이 감히 발을 들일 곳이 아닙니다.”

“손님?”

뻣뻣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 집사를 보며 카인이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누구 보고 손님이래?”

“손님이 아니면 뭐지요? 바인 후작가는 손님의 방문을 허락한 적도 없습니다. 그만 나가 주십시오. 후작께서 부재하실 때는 집사인 제가 저택의 총 책임자입니다.”

당당한 태도에 카인이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으나 엄밀히 따지면 집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아직은 공식적으로 후작 작위를 받기 전이니까 손님이라면 손님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아예 모르지는 않을 텐데.’

숙부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테고, 멜리사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걸까?

오늘 재판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아직 수도에 퍼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사용인들을 모두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생각에 잠겨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으니 블란과 카인이 어떻게 할까요-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날뛰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곧 현실을 마주하게 될 인간이니 여기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없지만…….’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그럼 소란스럽지 않게 해결하면 되지.

나는 빙긋 웃으며 카인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을 조용히 잡아 가둘 수 있을까요? 시끄럽지 않게요.”

“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집사가 놀라서 펄쩍 뛰었지만 나는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인이 신나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감히 바인 후작저에서 이게 무슨…… 읍!”

카인이 장담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집사의 입을 틀어막고 그를 질질 끌어냈다.

소란 하나 없이 아주 조용했다.

블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후작 부인의 방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나는 차분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며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 텐데.’

집사도 예전의 내 모습을 아니까 당당하게 앞을 가로막았던 거다.

하지만 난 이제 예전의 소심한 나디아 바인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대담한 행동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어쩐지…….’

내가 알테어를 닮아 가는 것 같다. 그게 참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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