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떨어져서 지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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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떨어져서 지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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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떨어져서 지내야 할지도.
2022.07.31.
방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자 안나가 키득대며 조르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속이 시원했어요, 마님! 저희가 바인 저택에 머무를 때 저 집사가 아주 못되게 굴었거든요.”
주인이 우습게 보이면 그 주인을 모시는 사용인들의 처지가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귀족이라 대놓고 심통을 부릴 수 없었겠지만, 안나나 마리에게는 거리낌 없이 툴툴댔을 것이다.
“나 때문에 너희가 고생 많았겠구나.”
미안함을 담아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마리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얼른 안나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저희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사람들인가요? 절대 안 밀리고 같이 못살게 굴었으니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맞아요! 절대 지지 않았어요!”
안나도 주먹을 불끈 쥐어 허공에 휘두르며 마리의 말에 동조했다.
확실히 두 사람이 바인의 사용인들의 텃세에 주눅 들어 침울해진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
그들과 맞서 당당히 싸우는 두 사람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응. 두 사람은 절대 안 졌을 거야. 하지만 고생한 것도 사실이지. 수도에 온 뒤로 일이 많이 생겨서 다들 고생 많았어.”
처음 수도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
그저 마석을 잘 팔아 봐야겠다는 생각밖에는…….
하지만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더니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난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방 안을 살펴보았다.
내가 다시 이 저택을 ‘우리 집’이라고 부를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았지만, 우선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긴장이 풀려 소파에 편안히 몸을 기대자 마리가 웃으며 말했다.
“우선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응. 그래야지.”
블란을 힐끗 바라보니 그도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제 복잡하게 꼬여 버린 오해를 풀 시간이었다.
***
별채까지 다녀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마리가 생각보다 빠르게 리온을 데려왔다.
마리의 발이 이렇게 날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온이 나섰다.
“저택이 소란스러워 오신 걸 알았습니다. 곧 부르실 거라 생각하고 본관에 와 있었지요.”
“소란스러웠나요?”
“기사까지 끼고 정문을 지나 당당히 쳐들어왔다면서요. 당연히 소란스러워지지요.”
리온이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며 자연스럽게 진찰을 시작했다.
늘 하던 루틴 같은 일이라 진찰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여전히 몸이 약한 상태라 신경 써서 기력을 끌어 올리는 약을 써야겠지만 말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리고 제게 할 말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리온이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블란을 바라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택에서 쭉 머무르던 카인이 아니라 블란이 함께인 것을 보고 뭔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제 본론이구나.’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리와 안나에게 눈짓했다.
자리를 피해 달라는 의미를 알아차린 마리가 얼른 안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문이 굳게 닫히자 나와 블란, 리온만 자리에 남았다.
“내가 예전부터 리온의 오해를 풀고 싶어 했다는 건 잘 알 거예요. 그래서 에일스포드에서부터 계속 조사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블란을 쳐다보니 그가 앞으로 나서서 말을 이었다.
“의사 선생의 부모를 죽인 범인을 잡았습니다.”
“……!”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온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그의 두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블란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에일스포드 인근에서 용병 생활을 하던 자인데, 갑자기 큰 의뢰를 해결해 거금이 생겼다며 마을에 정착한 뒤 가게를 차렸다고 합니다.”
“……그자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 시기가 사건이 있던 날과 비슷하고, 또…… 술에 취해 마을 사람들에게 사람 죽인 의뢰로 큰돈을 벌었다면서 무용담을 늘어놨다고…….”
뻔뻔한 범인의 행적에 리온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르르 떨리는 두 손에는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심문했더니 자기가 한 일이 맞다고 자백도 했습니다. 그자에게 살인을 청부한 자는 대금으로 지급된 어음을 통해서 역추했는데, 에일스포드 남작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자와 공모한 흑막이 있었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남작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자라면…… 그때 범인이 했던 말은…….”
“우리 영주님도 어렸을 때부터 암살자들을 여럿 마주했죠. 그분이 죽으면 작위며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수 있는 후보들이 많았으니까요. 용병이 ‘차기 에일스포드 남작’의 뜻에 따라 죽어 달라고 했다는 건……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겁니다.”
블란이 지난날을 떠올리며 질린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범인은 모처에 잡아 뒀으니 원하면 대면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켜 놨으니까, 궁금한 걸 물어보면 다 대답해 줄 겁니다.”
“…….”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원수를 찾게 된 탓인지 리온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 낯짝을 한번 보긴 해야겠습니다.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고요.”
“예. 저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진 마십시오. 입을 열게 하느라 그놈 상태가 별로 좋진 않아서. 뭐, 의사 선생님이시니 더한 꼴도 많이 보셨겠지만 말입니다.”
리온이 굳은 입매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리온을 보니 괜히 나까지 손발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 역시 아주 충격적이었지.
리온이라는 인재를 에일스포드로 끌어들이기 위해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던 거지만, 진실을 마주하고 충격받은 그를 보니 동지애가 솟아났다.
도대체 부와 권력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소중한 이들을 잃었어야 했단 말인가.
참으로 씁쓸했다.
***
수도를 떠돌던 소문에 대한 진실은 밝혀졌지만, 재판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아직 결론 내릴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만장일치로 에일스포드 남작 부인 나디아에게 차기 바인 후작의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렸고, 황제 역시 거부하지 않고 귀족들의 결론을 받아들였다.
제국 역사 최초로 여성 후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최초의 사례는 역사에 기록되기 마련이니, 제국이 살아 있는 한 수백 수천 년이 흐른 뒤에도 오늘의 사건이 회자 될 터였다.
알테어는 황제가 귀족들의 결정을 승인하는 시점에 재판장으로 돌아왔다.
소란스럽게 웅성대던 귀족들이 알테어의 등장에 주목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에일스포드 남작. 남작 부인은, 아니, 바인 후작은 괜찮은가?”
아직 공식 문서로 작위를 승인하진 않았지만, 황제는 나디아를 ‘바인 후작’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확고한 결정이라는 뜻이었다.
알테어 역시 능청스럽게 ‘바인 후작’을 운운하는 황제의 말을 받았다.
“우선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 바인 후작을 먼저 저택으로 보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큰 문제가 없다니 다행이군.”
황제도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은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사교계에 늘 말이 떠돈다는 건 알고 있네. 다들 한가하게 타인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소란을 키우지.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그럴까.”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다들 말의 무서움을 깨닫고 신중해지기를 바라겠네. 한가하게 가십을 만드는 대신에 나라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영지 운영에 힘써야 하지 않겠나? 응?”
뼈가 있는 말에 귀족들이 움찔했다. 민망해 헛기침하는 자들도 있었다.
황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질린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오늘 결론 내려야 할 문제는 모두 해결된 듯하니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
귀족들이 황제를 따라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황제가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를 떠나자마자 비오스케스 공작이 알테어에게 다가와 손을 덥석 붙잡았다.
“축하하네, 남작! 일이 잘 해결되었군!”
“공작께서 마음 써 주신 덕분입니다.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동안에도 굳게 저희를 지지해 주셨죠.”
“뭐. 너무 의도가 보이는 헛소문이었지. 멍청한 놈들이나 그런 소문에 휘둘리는 거야.”
알테어와 비오스케스 공작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다 나른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민망함을 견디지 못한 그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걸 보고 비오스케스 공작이 흥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감당하지도 못할 이야기는 왜들 퍼트리는 건지.”
“덕분에 누구를 가까이해야 하고, 누구를 멀리해야 할지 확실히 알았으니 좋은 계기였습니다.”
알테어가 후다닥 떠나는 귀족들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쳐다보자 비오스케스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그걸 구분하는 건 중요하지. 이제 수도 사교계에서 활발히 활동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오늘부터는 바인 후작저에 머무르는 건가?”
“예. 그리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는 무슨. 서로를 도운 거지. 앞으로도 자주 볼 테니 계속 서로를 돕자고.”
“물론입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에일스포드는 어찌하나?”
비오스케스 공작이 다소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부인이 후작이 되었으니 한동안 수도에서 머물러야 할 것인데, 그렇다고 자네가 영지를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고. 부부가 떨어져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군.”
비오스케스 공작의 말이 맞았다.
바인은 후작 작위를 가진 수도의 유력한 가문이었고, 에일스포드는 마석 광산을 가진 부유한 땅이라 어느 한쪽도 버려둘 수는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나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것이다.
알테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 환한 미소가 아니었던 터라 비오스케스 공작이 얼른 목소리를 높이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뭐, 물론 자네들이라면 지혜롭게 해결하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전 후작의 사람을 쳐내고 새로운 사람을 들이려면 분명 내 힘이 필요할 거야.”
“사람이라면 저도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비오스케스 공작과의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뒤에서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공작은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3황자!”
최근 두문불출하던 오르카 황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