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난 인내심이 강해.
(122/170)
122화. 난 인내심이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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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난 인내심이 강해.
2022.08.03.
오르카 황자와 비오스케스 공작이 반갑게 호의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전하. 재판장에 계신 줄은 몰랐는데요.”
“워낙 떠들썩한 일이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하. 확실히 흥미로운 사건이었지요.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 밖으로 나돌다가 수도에 오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요.”
“그러게 계속 수도에 계시라니까요.”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귀한 인연을 많이 얻게 되거든요.”
차분한 오르카 황자의 말에 비오스케스 공작이 뒤늦게 떠올렸다는 듯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동부에서 에일스포드와 인연을 얻으셨다고 했지요. 확실히 이런 인재와의 연을 얻을 수 있다면 여행을 멈추기 힘들겠습니다.”
“예. 재미를 알아 버려서요. 그런데 혹 남작과의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오르카 황자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리자 비오스케스 공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나누고 있던 참입니다. 이야기 나누세요.”
“그럼 기꺼이.”
오르카 황자가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인사하고 따라오라는 듯 알테어에게 눈짓을 보냈다.
알테어는 거부하지 않고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은 재판장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복도 끝에 섰다.
“큰형님을 사절로 보낸 건 그쪽의 수인가?”
부드럽고 유약한 황자 행세를 하던 오르카의 눈빛이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알테어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겁니까?”
“확인차 물어본 겁니다. 정말로 그런 건가 싶어서. 뭐, 그쪽의 수가 맞다면, 이유 없이 큰형님을 사절로 보낸 건 아닐 테고…….”
오르카 황자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적이 뭡니까?”
“그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뭐…….”
오르카 황자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알테어의 말처럼 목적을 짐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작 같은 사람이 원수를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지요.”
“그건…… 당신도 그렇게 할 테니까?”
존칭 없이 다소 무례하기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오르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회피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사람이라고 했잖습니까.”
“별로 전하와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만.”
“싫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겨우 그런 소리를 하려고 찾아온 겁니까?”
알테어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오르카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오르카는 귀찮음이 덕지덕지 붙은 알테어의 얼굴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하려고 했던 말, 내게 하세요.”
“…….”
지루하게 오르카의 이야기를 흘려듣던 알테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매서운 맹수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오르카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전 바인 후작이야 끝장났다지만 그 딸은 곧 풀려날 텐데……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무슨 짓을 벌일지 걱정됐던 거 아닙니까? 위협의 칼날이 남작 부인, 아니, 바인 후작에게 향하기 전에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을 테고.”
오르카 황자가 정확히 알테어의 심중을 짚었다.
나디아에게는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신세 진 것에 대해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했지만, 진짜 목적은 멜리사 바인을 치워 버리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진단서를 들고 찾아와 협박하는 걸 보면 멜리사 바인은 앞뒤 생각 없이 달려드는 여자인데, 그런 여자가 궁지에 몰렸으니 무슨 일을 벌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치밀한 상대보다 더 무서운 게 생각 없는 상대였다.
치밀한 상대의 수는 예측해서 대처할 수 있지만, 생각 없는 상대는 어디로 튈지 몰라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발스테드에서 전 바인 후작을 만나 쓸데없는 조언까지 듣게 될 테니 더욱더 골칫거리였다.
알테어는 늘 이기는 싸움을 계획하는 타입이었다.
이런 상대와 싸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 치워 버리는 것인데…….
‘쉽게 생각하면 사람을 써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만…….’
알테어는 이번 사례를 통해 수도 귀족들이 얼마나 가십에 휘둘리는지 파악했다.
멜리사가 급사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나디아와 알테어를 범인으로 지목할 것이다.
뒤처리를 완벽하게 해서 진실을 묻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입까지 틀어막을 수는 없는 법.
자신이 살인자라며 쑥덕대는 소리를 듣는 건 개의치 않았으나 나디아까지 그런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알테어는 비오스케스 공작에게 부탁해 멜리사 바인을 멀리 시집보낼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제대로 된 혼처를 찾아 줄 생각은 없었다.
호의를 베푸는 척, 외적으로 평판은 좋지만, 사실은 속 빈 강정인 사람을 찾아 시집보낼 작정이었다.
전 바인 후작이 나디아에게 최악의 혼처를 아주 좋은 혼처인 것처럼 속여 시집보낸 것처럼 말이다.
그 ‘최악의 혼처’였던 남자가 알테어였으니 스스로 세우기엔 썩 우스운 계획이었다.
‘허영심 강한 멜리사 바인은 너만은 구제해 주겠다고 구슬리면 제 아버지도 기꺼이 버리겠지.’
비오스케스 공작이라면 조건에 맞는 남자를 찾아내서 주선까지 해낼 수 있을 터.
그런데 그 역할을 3황자가 대신한다고?
알테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내가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만난 건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필요한 사람을 추천해 드리죠. 공작께선 수도 인맥은 확실하지만, 지방 인맥은 나보다 못합니다.”
오르카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뭐, 공작께서 시간을 들여 찾으신다면 충분히 찾겠지만…… 그 여자는 금방 나올 테니 공백이 생기겠죠. 남작 같은 사람은 그 짧은 위험도 피하고 싶겠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당당하게 찾아와 말을 건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 알테어는 다소 질린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같은 분은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진 않을 테죠.”
조금 전 들었던 말을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주며 알테어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 여자를 치워 주는 대가로 바라는 게 뭔지 말해 주십시오.”
“남작에게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도 거슬리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1황자가 사라지고 나면 남는 건 2황자다.
그만 사라지면 3황자 오르카는 황제의 유일한 후계자가 된다.
지금 상황에서 오르카의 ‘거슬리는 사람’이라면…… 답은 분명했다.
알테어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르카의 요구가 2황자를 제거해 달라는 것이라면, 그건 들어주기 힘들었다.
“전 황제 폐하의 사람입니다.”
1황자를 죽이는 일에 동의해 주는 대가로 충성을 맹세했다.
뒤에서 후계 구도에 영향을 주는 행동을 한다면 약속을 어기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오르카는 동요하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폐하의 동향도 모르고 있을까요.”
오르카가 빙긋 웃은 뒤 주먹으로 가볍게 알테어의 가슴을 두드렸다.
“길게 봅시다, 남작. 난 인내심이 강합니다. 아버지의 세대가 저물고 그다음 세대가 오면…… 그때 거래의 대가를 받죠.”
“먼 훗날 제가 그럴 능력이 없으면 어쩌시려고요.”
미래는 늘 불확실한 법이었다.
알테어가 그 점을 지적하자 오르카가 별 우스운 이야기를 다 듣는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입니까. 남작은 분명 승승장구해 지금보다 더 대단한 인간이 되어 있을 텐데. 그때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거래이니 내겐 오히려 남는 장사입니다. 이건……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지.”
확신이 담긴 눈빛이었다.
알테어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오르카를 마주했다.
오르카 황자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확신을 가진 사람은 싫어하지 않는다.
“전하의 기대가 어긋나 대가를 못 받는다고 해도 내 잘못은 아닙니다. 투자에는 리스크가 있기 마련이니.”
알테어가 먼저 손을 내밀자, 오르카가 빙긋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물론입니다. 뭐, 내 투자는 실패한 적이 없지만.”
흔들림 없는 두 남자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바인 가문의 몇몇 사용인들이 나를 찾아왔다.
물론 마리가 입구에서 모두 깔끔하게 쫓아냈지만 말이다.
“다들 꼬리에 불붙은 고양이처럼 안절부절못하던걸요?”
“내가 당당하게 저택에 들어왔으니,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 서둘러 상황을 수소문한 모양이네.”
재판장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이야기를 들은 각 가문의 사용인들이 발 빠르게 소문을 퍼다 날랐을 것이다.
사용인들 사이의 네트워크는 놀라울 정도로 촘촘하고 빨라서 각 가문의 소문이 매우 빠르게 공유되곤 했으니 말이다.
“흥. 이제 와 비굴하게 굴어봤자 우습게 보일 뿐인데 말이에요.”
나와 함께 오랜 시간 바인 후작저에서 박대당한 마리가 싸늘하게 코웃음을 흘리다, 평온한 내 표정을 보고 설마 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모두를 용서하고 받아줄 생각은 아니시지요?”
“내가 그럴 것 같아?”
“마님은 마음이 너무 약하시니까요. 나이 지긋한 사용인들이 울면서 매달리면 마음이 흔들리실지도 몰라요.”
“음. 예전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젠 아냐. 소심하고 유약한 나디아 바인은 이 세상에 없는걸!”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맞서 싸울 의지를 불태웠지만, 마리는 여전히 불신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작은 주먹을 불끈 쥐셔도 전혀 신뢰가 안 가요, 마님…….”
그러나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걱정스러운 눈치는 아니었다.
“뭐. 영주님께서 계시니 걱정 없지만요.”
“나보다 알테어를 더 믿는 거야? 마리는 내 전속 시녀면서.”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자 마리가 요령 좋게 웃으며 나를 달랬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에서는 영주님께서 훨씬 더 믿음직한걸요. 게다가 부부는 하나이니, 제가 영주님을 믿으면 마님을 믿는 것과도 같아요. 아, 이젠 마님이 아니라 후작님이라고 불러야겠죠?”
후작님. 아주 낯선 부름이었다.
살면서 ‘후작님’이라고 불리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너무 신기해.”
“저도요. 돌아가신 후작님과 후작 부인께서 아주 대견해 하실 거예요.”
“그러셨으면 좋겠다.”
돌아가신 부모님 이야기에 분위기가 절로 무거워졌다.
마리가 실수했다는 듯 어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게 먼저였다.
잊을 만하면 문을 두드리던 사용인들이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연 것이라 생각한 마리가 매섭게 입구를 노려보았다가, 들어선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영주님! 오셨군요!”
알테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내 곁으로 다가오자 마리는 차를 준비해 오겠다며 후다닥 자리를 비워 주었다.
“알테어. 잘 마무리하고 왔어요?”
“응.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알테어를 맞이하며 묻자, 그가 짧게 대답하고 나를 꼭 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디어 걱정 없이 둘만 있을 수 있겠군.”
“아, 알테어?”
당황해서 두 손을 어쩌지도 못하고 허둥대자 알테어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픽 웃었다.
그의 숨결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