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정리 정돈은 깔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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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정리 정돈은 깔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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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정리 정돈은 깔끔하게.
2022.08.07.
알테어가 자연스럽게 내게 몸을 기대며 무게를 실었다.
감당하기 힘든 무게에 살짝 비틀거리자, 그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며 거리를 살짝 벌리고는 내 안색을 살폈다.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졌지만 멀어진 온기가 아쉬워 알테어를 바라보니 그가 찡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이 버릇도 고쳐야겠군.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어.”
“위험한 상황이요?”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아무리 내가 미덥지 않아도 그렇지…… 이런 걸로는 안 넘어져요. 알테어 하나쯤은 감당할 수 있다고요.”
여태까지 넘어진 적이 없어서 당당히 말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알테어를 보니 설득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아래로 내 모습을 살피는 눈빛이 ‘당신이 나를……?’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고집쟁이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머리가 번뜩였다.
“그럼…….”
나는 웃으며 조심스럽게 알테어의 품을 파고들어 그를 꼭 껴안았다.
“알테어가 날 감당해요.”
먼저 다가가는 게 아주 민망했지만, 생각해 보면 왜 항상 알테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건지 후회가 됐다.
나는 항상 상대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살피는 아이였다.
혹시라도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상대가 매정하게 날 내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심한 아이, 소극적인 아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어.’
멀리 떨어져 상처받지 않을 타이밍을 재다 소중한 것을 많이 잃었다.
이제는 내가 먼저 나서는 일도 하나씩 해 보고 싶었다.
내가 상대에게 문을 열기 두려운 만큼 상대도 두려움을 안고 내게 문을 열어 줬을 터.
평소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움직인 탓에 심장이 쿵쿵댔다.
알테어도 내가 먼저 다가와 안길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지 당황한 듯 굳어 있었다.
몸 쓰는 일에는 당할 자가 없다며 자부하던 알테어가 두 손을 어찌할 줄 몰라 어정쩡한 자세로 굳은 걸 보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요? 나 감당하기 힘들어요?”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려 하자 알테어가 어정쩡하게 허공을 휘젓던 양팔로 나를 마주 안았다.
“그럴 리가. 언제든 감당할 수 있어.”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등을 쓸어내리자 몸이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몸을 완전히 알테어에게 기대고 편안하게 숨을 토해냈다.
든든하게 나를 지탱해 주는 익숙한 향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알테어에게는 숲을 지키는 거대한 고목 같은 향기가 났다.
수도의 신사들처럼 세련되고 화려한 향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나는 깊이를 모를 포근함에 묘하게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공작님께 인사는 잘 드렸나요?”
“……응.”
하지만 알테어는 나처럼 편안하지 않았던 건지 돌아오는 대답에 묘한 공백이 있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도 어딘가 뻣뻣했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어 알테어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눈이 마주친 탓인지 열심히 등을 쓸어내려 주던 알테어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불편해요?”
“……아니.”
“불편하잖아요.”
“그…….”
내가 알테어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그는 나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알테어가 아주 편한데…….”
어쩐지 침울해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니 알테어가 곤란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는 당신은 내가 편하기만 해?”
“네?”
“난 당신을 보면 매일 불편해.”
“부, 불편하다고요? 내가?”
충격적인 말에 입을 떡 벌리자 알테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당신의 작은 움직임에도 신경 쓰여서 반응하게 돼. 아마 이게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나를 바라보는 알테어의 눈빛에 열망이 가득했다.
그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분명히 빨개졌을 내 얼굴을 보며 알테어가 픽 웃고는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니까 침울해야 할 쪽은 당신이 아니라 나라고.”
“그, 그런 이유면 별로 안 침울해도 될 거 같은데…….”
“……?”
“그게…… 나도 알테어랑 같으니까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알테어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재판장에서처럼 다급하게 떨어지는 어린애 같은 입맞춤이 아니었다.
나는 알테어의 두 뺨을 감싸고 서로의 안이 모두 맞닿을 때까지 파고들었다.
서툴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내 행동에 굳어 있던 알테어가 조금씩 화답하기 시작해 입맞춤은 금세 깊어졌다.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더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알테어가 아쉽다는 듯 쉽게 떨어지지 않고 다시 내게 다가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치 심통 난 강아지 같은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테어가 오히려 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너무 아프게 물었나?”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조, 좋았어요!”
알테어가 민망할까 봐 얼른 좋았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나도.”
“네?”
“나도 좋았다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알테어의 말에 다시 얼굴이 뜨거워졌다.
“할 거 다 해 놓고 왜 부끄러워하지?”
“할 걸 다 하는 거랑 부끄러워하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요.”
“뭐. 보기에 나쁘진 않지만.”
알테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덕분에 소파에 앉은 알테어의 무릎 위에 내가 아이처럼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렇게 앉는 건 처음인데, 서로의 시선이 평소보다 훨씬 가까워서 알테어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 달아오른 얼굴이 도무지 식을 줄 몰랐다.
벌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알테어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손으로 헝클어진 내 머리를 빗겨 주었다.
조용히 알테어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으니 그가 입을 열었다.
“저택에 도착해서 다시 진찰은 받았나?”
“네. 문제없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은 블란과 함께 범인을 만나러 갔어요.”
“그렇군. 저택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알테어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바인 저택 내부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새 재판장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퍼져 나온 모양이에요. 내가 새로운 주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동요하는 것 같아요.”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 줄 생각인가?”
마리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제가 그렇게 무른 사람처럼 보여요?”
“당신을 죽이러 온 놈도 안 죽였다며.”
“아. 그 사람이요.”
카인을 통해 숙부의 끄나풀을 죽이지 않고 기사단에 넣기로 한 사실을 들은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기사단의 주인이 알테어이니, 그렇게 결정이 난 이상 알테어가 모르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내가 사람 죽이는 일을 망설이는 걸 알고는 카인이 묘책을 제안해 줬어요. 기사단에서 구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과장이 섞인 말이라고는 생각하지만요.”
“으음.”
내 말에 알테어가 애매하게 반응해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설마 그게 진짜라고요? 기사단 훈련이 죽는 것보다 힘들어요?”
“보통은 아니겠지만…… 내 아내를 해치려고 한 놈에게는 특별 훈련 코스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이 아주 싸늘했다.
도대체 무슨 훈련 코스를 계획 중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놈 아주 큰일 났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참. 에일스포드에는 언제 돌아가죠?”
기사단 이야기를 꺼내니 자연스레 에일스포드가 걱정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벌써 에일스포드에 돌아가 영지를 보살피고 있어야 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귀환이 훨씬 늦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후작 작위까지 받게 되어 돌아갈 날을 기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숙부의 아래에서 엉망이 된 후작가를 제대로 정비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파벨이 잘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주인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은데…….”
게다가 정비가 끝난 후에도 맘 편히 에일스포드로 떠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후작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면 수도를 마냥 비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일이 잘 풀린 것은 좋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득해졌다.
알테어는 그런 고민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우선은 후작가를 정비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이후의 일은 그때 생각해. 당신 머리는 모든 걱정을 담을 만큼 크지 않으니 내게 나눠 담아.”
알테어의 말에는 어떤 복잡한 문제도 간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끈거리려던 머리의 두통이 멀리 달아났다.
“응. 알았어요.”
나는 복잡한 머리를 싹 비우고 가장 가까운 일만 남겨두었다.
우선은 후작가를 정비하는 일부터!
***
바인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대연회장에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새로운 바인 후작가의 주인, 나디아 바인 후작의 소집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
“맞아. 주인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일이야 종종 있다지만, 쫓겨나듯 저택을 떠났던 그 소심한 아가씨가 후작이 되다니.”
“유서 깊은 바인 후작가가 어찌되려고!”
그들의 말처럼 바인 후작가는 유서 깊은 명문가였다.
그러다 보니 대를 이어 바인 후작가에서 일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후작가의 오랜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한탄하며 바인의 미래를 걱정했다.
개중에는 침묵을 지키며 진중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소수일 뿐이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느껴져 사용인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과연 새로운 후작 나디아 바인이 입구에 서서 사용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나디아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마리가 코웃음을 흘리며 크게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다들 후작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뭘 하는 거지?”
벼락같은 외침에 사용인들이 그제야 우르르 예를 갖췄다.
오랫동안 자신들이 무시하던 아가씨를 보고 예를 갖춰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이다.
나디아는 모두가 제게 인사를 올리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여 있는 사용인들을 지나쳐 가장 선두에 이르자 마리의 반대편에서 나디아를 지키던 카인이 얼른 의자를 가져왔고, 나디아는 우아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대연회장에 모인 사용인들의 면면을 확인한 나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용인들은 모두 모이라고 했는데.”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충 눈대중으로 보아도 인원이 아주 적었다.
사용인들의 겨우 절반 정도만 이 자리에 나온 듯했다.
나디아의 의문에 사용인들 틈에서 누군가가 투덜댔다.
“다들 할 일이 있습니다.”
말을 꺼낸 자는 나디아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디아의 처지가 뒤바뀌었던 시절에 그녀를 싸늘하게 무시하던 시종으로, 집사의 측근이라 사용인들 사이에서 기세가 대단한 자였다.
자신을 향한 나디아의 시선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모양인지 시종이 코웃음까지 흘리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쉬면 저택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으니, 이렇게 갑자기 소집 명령을 내리시면 모두 못 모이는 게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