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쓱싹쓱싹.
(124/170)
124화. 쓱싹쓱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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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쓱싹쓱싹.
2022.08.10.
감히 주인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시종이라니!
평범한 주인과 사용인의 관계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종의 태도는 당당했다.
여태껏 자신이 보아 왔던 나디아라면 이쯤은, 아니, 이보다 더 건방지게 굴어도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어깨를 움츠릴 게 뻔했다.
아무리 바인 후작이 되었다지만 여전히 소심하고 나약한 여자에 불과하니 대수롭지도 않은 문제였다.
예전부터 그녀를 잘 따랐던 마리와 남편에게서 빌려온 듯한 기사가 기세등등하게 양옆을 지키고 있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여긴 바인 후작가였다. 바인 후작가에서는 바인 후작가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 법을 이끌어 온 건 멀리 시집갔다가 돌아온 나디아 바인이 아니라 평생 이곳에서 일해온 자신들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용인들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인 듯해서 시종은 더욱 자신감을 얻고 턱을 치켜들었다.
“아무리 잘 모르신다지만 어찌 이렇게까지 무지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제 후작이 되셨다고 인사라도 받고 싶으셨나 본데, 저희는 바쁘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한가한 아가씨와 달리 저흰 바쁜 사람들입니다.”
시종이 질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모여 있는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자! 다들 갑시다!”
그가 당당히 걸음을 옮겨 입구로 향하자 다른 이들도 우르르 뒤를 따랐다.
다른 사용인들이 수군대던 때에도 진중하게 말을 아끼던 자들은 나디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댔지만, 결국 무리의 행렬을 따르는 쪽을 선택했다.
나디아는 그런 이들을 제지하지도 않고 가만히 그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와 카인도 침착하게 그 옆을 지킬 뿐이었다.
그 모습에 시종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거봐. 괜히 허세나 부린 거지. 자기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전 후작이 갑자기 실각하는 바람에 혼란스러웠지만, 만만한 주인이 저택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상황이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초반에 이렇게 기선제압을 단단히 해 두면 앞날은 더욱 편할 것이다.
‘이래저래 돈이나 귀중품을 빼돌릴 수도 있겠고…….’
그건 사용인들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전 후작은 재산에 무척 예민해서 감히 손을 댈 수 없었지만, 이렇게 만만한 주인이라면 부수입이 꽤 짭짤할 것 같았다.
‘집사님과 계획을 짜 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언제부턴가 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 후작이 감옥에 갇힌 후로는 특히 제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저택을 활보하던 사람인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입구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난 아직 문고리를 잡지도 않았는데?’
시종이 의아한 기분으로 눈을 껌뻑이는 사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으악!”
“아아악!”
소집 명령을 받고도 대연회장에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건장하고 거친 인상의 기사들의 손에 내던져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바닥을 구르며 신음을 흘렸고, 누군가는 밖으로 나가려던 사용인들 위로 날아와서 모여 있던 이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대연회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아이고…….”
“으으…… 내 엉덩이…….”
곳곳이 신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을 모두 내던진 기사들은 그런 사정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대연회장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바닥을 나뒹구는 자들 중에는 집사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몰골이 다른 사용인들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지, 집사님?”
시종이 당황해서 집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집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공포에 잔뜩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불안하게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종이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문은 견고하게 닫힌 채로 열릴 줄을 몰랐다.
덜컹덜컹. 몇 번이나 문고리를 흔들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초조한 표정으로 몸을 돌린 시종은 어느새 자신들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카인의 싸늘한 얼굴을 발견하고 말을 삼켰다.
뭐 하나 빠진 사람처럼 팔랑대던 사람이 무표정하니 괜히 소름이 돋았다.
시종이 당황한 기색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 뭐, 뭡니까?”
물론 말을 더듬는 바람에 그의 노력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러게. 부를 때 얌전하게 왔으면 이런 험한 꼴은 안 당했을 거 아냐.”
카인은 애써 강한 척하려는 모습이 우습다는 듯 픽 웃음을 흘리고 앞으로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멱살을 낚아채려는 듯한 손길에 시종이 놀라서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지만, 정작 카인이 붙잡은 건 그의 옆에 널브러져 있던 집사였다.
자신을 향하지도 않은 위협에 잔뜩 쫄아 버린 것이 부끄러워 시종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다리가 덜덜 떨려 더욱 민망했다.
하지만 카인은 하찮은 시종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집사를 질질 끌고 나디아의 앞에 무릎 꿇렸다.
나디아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를 향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집사. 이제 후작이 되었으니, 난 더 이상 손님이 아니지. 집사도 저택의 총책임자는 아니고. 이제 내가 뭐든 할 권리를 얻은 게 맞을까?”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모습에 집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 맞습니다.”
“갑자기 태도가 너무 달라져서 당황스럽네. 내 앞을 막아서던 패기는 어디로 가고.”
“그, 그건, 제가 큰 실례를, 요, 용서를…….”
집사가 벌벌 떨며 납작 엎드렸다.
눈도 못 마주치고 식은땀을 흘리는 걸 보니 제대로 혼쭐이 난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도대체 뭘 한 거냐는 듯 카인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수도 귀족 가문의 사용인들은 저처럼 개차반인 깡촌 출신과 달리 예의를 잘 지키는 줄 알았더니, 영 정신머리가 글러 먹었더군요. 그래서 예의가 뭔지 친히 알려드렸죠.”
카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댔다.
“곱게 자란 수도 출신이라 시골뜨기의 거친 방식에 좀 놀란 모양입니다. 연약도 하셔라.”
자신들을 차례로 훑는 시선에 입구 쪽에 몰려 있던 사용인들이 움찔했다.
늘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니던 집사가 저렇게 설설 길 정도면 아주 험한 방식으로 혼쭐이 난 모양인데, 자신들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핏기가 싹 가셨다.
사용인은 주인의 재산이나 다름없어 처벌도 마음대로 내릴 수 있었다.
심하게 매질을 당해 죽어도 가문의 일로 처벌했다고 변명하면 흐지부지 넘어가곤 했다.
새로운 주인이 소심하고 유약하다고 생각해서 배짱을 부렸던 사용인들이 불안함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카인의 말은 결정타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의를 모르는 놈들이 아주 많네.”
“히익!”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가씨!”
그때 사람들 틈에서 몇몇 사용인들이 튀어나와 나디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가씨! 저희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마, 맞습니다! 얼마 전에도 찾아뵙고 용서를 청하려 했는데 만나 주지 않으셔서…… 하지만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습니다!”
“저, 저도요!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시종이 나서서 사용인들을 선동할 때 머뭇대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자 마리가 코웃음을 흘렸다.
“여기에 아가씨가 어디 있지?”
“그, 그만 실례를! 후, 후작님! 주인님! 부디 선처를!”
바짝 엎드린 자들이 ‘후작님!’이라고 외치며 선처를 구했다.
사정을 모르고 지켜보면 퍽 애처롭게 보이는 모습에 마리는 순간 걱정스러워졌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먹었다지만, 여린 나디아가 흔들려서 애초의 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아가 침묵하자 희망을 발견한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릎을 꿇었다.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던 시종도 어느새 태세를 전환해서 슬그머니 그들 틈에 섞였다.
“후작님!”
“주인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나디아는 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용서를 구하던 자들의 눈이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나디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좋은 때가 있기 마련이지. 대세가 기운 후에야 마지못해 무릎을 꿇는다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법이야. 그렇지 않아?”
나디아는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사용인들의 얼굴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자들을 전부 해고하겠어. 추천장은 당연히 써줄 수 없고…… 대신 이들의 명단을 만들어 수도의 귀족 가문에 모두 돌리도록 해. 주인을 우습게 보는 놈들이니 고용하시면 큰일이라고 말이야.”
평생을 귀족 가문에 봉사하며 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 자들이었다.
추천장을 써 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다른 귀족 가문에도 죄인으로 고지한다면 앞날이 막막했다.
“그, 그건 저희 모두 굶어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는 소리입니다!”
“추천장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앞길을 완전히 막는 것만큼은……!”
사용인들이 손을 싹싹 빌었지만 나디아는 단호했다.
“그럴 수는 없지. 바인 출신의 사용인들이 다른 곳에 고용되었다가 문제를 일으키면, 다들 왜 미리 이상한 놈이라는 걸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내 탓을 할 텐데, 너희들의 무얼 믿고 그냥 두겠어?”
귀족들끼리 나쁜 사유로 해고된 사용인들의 이름을 공유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한 번에 많은 리스트가 전달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고, 그 사실을 사용인들 앞에서 직접 알리는 일도 흔치 않았지만 말이다.
“다들 자신이 여태까지 했던 행동들을 잘 알 거야. 스스로의 행동에는 책임을 져야지. 그게 어떤 것이든.”
확고한 나디아의 말투에 사용인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여전히 소심하고 유약한 줄로만 알았던 아가씨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자신들은 모두 망했다고.
절박한 상황에 사용인들은 이제 자신들끼리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괜히 우릴 선동해서는!”
“좋다고 동조한 게 누군데 내 탓이야!”
“다들 닥쳐! 우린 다 망했다고! 이럴 때가 아니란 말이야!”
그 소란이 우스워서 나디아는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예전에는 이런 인간들이 뭐가 무섭다고 늘 기죽은 채로 눈치를 봤던 걸까.
나 자신은 조금만 달라졌을 뿐인데, 주변의 모든 것은 크게 변화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
나는 소란스러운 대연회장을 등지고 밖으로 나섰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지 기사들이 입구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복도를 걸어가자 마리가 감격했다는 듯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멋지셨어요! 언제 이렇게 대범해지신 거예요!”
“대범해? 내가?”
“그럼요. 하나도 안 떨고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그놈들을 쳐내셨는걸요!”
“그랬구나.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다…….”
“네? 그렇게 보였다면이라니…….”
마리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려서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보였다.
아직까지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실은 엄청나게 떨었어. 안 그런 척하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치마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리도 덜덜 떨리고 있다구.”
울상이 되어 마리에게 매달리자 그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제가 알던 나디아 아가씨이시네요. 어쩐지 더 좋아요.”
“뭐가……? 내가 여전히 소심한 인간인 게……?”
“그걸 알고 스스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신다는 게요.”
마리가 기특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후작님께서 노력하신 만큼 저도 힘낼게요. 반드시 훌륭한 사용인들을 찾아서 바인 저택을 아름답게 유지하겠어요!”
“응.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마리가 바인 후작저의 시녀장을 맡아 줬으면 좋겠거든…….”
“제, 제가요?”
그녀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