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생색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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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생색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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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생색내고 싶어서요.
2022.08.14.
시녀장은 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이 맡는 게 보통이었다.
그만큼 주인과 저택을 잘 아는 경험 많은 시녀가 맡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 사용인들과 비교하자면 집사에 버금가는 실세 중의 실세다.
마리는 아직 20대이니, 사실 시녀장을 맡기에는 젊은 나이였다.
‘아마 그래서 놀랐겠지.’
“부담스러운 제안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마리만큼 내가 신뢰하고, 또 바인 후작저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집사 역할을 맡길 사람도 없어서 시녀장이 되면 마리의 역할이 아주 클 거야.”
두 손을 잡고 진지하게 부탁하자 마리가 심경이 복잡한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마리의 고민이 끝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시녀장이 되면 후작님을 곁에서 모실 수가 없는 건가요?”
“응?”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리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다시 질문했다.
“후작님을 위해 일하는 건 제 의무이고, 후작님을 곁에서 모시는 건 제 기쁨이죠. 시녀장으로서 일하라 하시면 당연히 일하겠지만, 곁에서 모실 수 없는 건…….”
마리의 얼굴에 우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젊은 나이에 시녀장으로 승진하는 건 아주 큰 기회인데, 기뻐하기보다는 우울해하는 게 어쩐지 우스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일이 많아질까 봐 우울한 게 아니라 날 곁에서 모실 수 없어서 걱정이라니.
“아무래도 난 운이 좋은 것 같아. 이렇게 날 위하는 사람이 곁에 많으니까.”
“전 우울한데 웃으시다니요…….”
“그래도 기쁜 걸 어떡해.”
나는 헛기침하며 웃음을 수습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날 아끼는 마리의 마음은 알겠지만, 측근 시녀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나와 멀어지는 게 아니잖아. 오히려 더 끈끈하게 날 돕는 거지.”
“그럼 측근 시녀의 자리는…….”
“우선 안나가 있으니 그 애에게 맡길까 싶어.”
“안나 양이요?”
마리가 더욱 놀라운 사실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나 양은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측근 시녀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게 아주 많아요. 자리를 물려주기 전에 확실히 교육해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해야겠네요.”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부탁이라니요. 명령만 내리시면 저는 무엇이든 하지요. 아주 오래전부터 후작님의 사람이었는걸요.”
마리가 웃어 주자 마음이 한결 놓였다.
“무리한 걸 부탁하는 게 아닐까 걱정 많이 했거든.”
“무리하다뇨. 수도 귀족 가문의 최연소 시녀장이 되는 일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죠. 절 믿고 맡기신 후작님께서 손가락질받지 않으시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리라면 걱정 없는걸.”
특히 마리는 수도의 사정에 밝으니 어렵지 않게 저택을 꾸려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결 마음을 놓자마자 복도 끝에서 안나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귀부인의 시녀라기에는……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나와 마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철저한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안나는 그 상태 그대로 뛰어와 헥헥 대며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마님! 아니, 후작님!”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요란하게…….”
마리가 익숙한 듯 안나의 요란함을 지켜보는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손님이 왔어요!”
“손님?”
이제 막 작위를 물려받은 터라 아직 저택이 어수선해 손님이 방문할 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물론, 친목을 도모하고 싶다며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는 여럿 날아들었지만, 모두 거절할 상태였다.
거절을 받고서도 물러나지 않고 저택을 방문할 정도로 주위 눈치를 안 볼 만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안나가 정답을 알려 주었다.
“황자님이세요! 에일스포드에도 오셨던 그 3황자님이요!”
‘확실히 그 사람이라면 주위 눈치는 안 보겠지만.’
이렇게 찾아올 만한 일이 따로 있었던가?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로 알테어를 찾아오신 거래? 알테어는 지금 훈련 중인데.”
정확히 말하면, 본인의 훈련은 아니고, 카인이 붙잡은 숙부의 끄나풀을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잔뜩 의욕에 불타오르는 알테어를 보고는 카인마저도 끄나풀 소년의 명복을 빌었을 정도였다.
“그게…… 영주님이 아니라 후작님을 만나러 오셨대요.”
“응? 나?”
당연히 알테어를 만나러 온 줄 알았는데 문을 두드린 대상이 나라니.
더더욱 의문스러웠다. 괜히 불길해서 달갑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수도 한복판에서 황자를 쫓아낼 수는 없지.’
에일스포드라면 핑계를 대며 돌려보내는 것도 고민해 봤겠지만, 여긴 황실의 영향력이 강한 수도니까 한발 물러나 잘 대접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알테어가 아니라 날 찾는 거면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른다.
둘이 만나면 소설에서처럼 음흉한 쪽으로 일이 흐르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선은 응접실로 모셔.”
한숨이 푹 나왔다.
***
“후작.”
응접실로 들어서자 오르카 황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예전에는 적당히 예의는 갖췄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홀로 친근감을 느낀 건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편하게 바뀌어 있었다.
물론 이쪽은 친근하게 대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전하.”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오르카 황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얼굴을 살폈다.
도대체 왜 이러나 싶어 눈을 껌뻑이자 그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아하니 후작은 전혀 모르고 있군.”
“제가 뭘 모르고 있나요?”
“뭐. 남작 입장도 이해는 됩니다. 후작에겐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니 혼자 해결하려고 했겠지.”
“……사람을 앞에 두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하시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소심하게 항변하니 황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그러지 맙시다. 도와주러 온 거니까. 오늘 저녁에 멜리사 바인이 석방될 예정인데, 그 여자를 쉽게 보내 버릴 수를 가져왔습니다.”
“……그걸 왜 전하께서.”
“왜겠습니까. 후작과 남작에게 줄을 대고 싶어서지. 내가 줄은 썩 잘 잡는 편입니다.”
오르카가 씩 웃으며 탁자 위에 봉투를 하나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 싶어 오르카를 바라보니, 열어 보라는 듯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봉투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안에 든 건 한 남자에 대한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였다.
서류에 따르면 남자는 국경에 가까운 곳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북부 귀족의 차남으로, 번듯한 외모를 자랑하는 초상화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내가 내용을 모두 살핀 걸 확인했는지 오르카 황자가 입을 열었다.
“멜리사 바인의 남편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훌륭하죠? 그녀도 혹할 겁니다. 물론 뒤에서 이 남자에 대해 알아보겠지만, 소문으로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순 없을 거예요. 그쪽 가문에서 워낙 정보 통제를 확실히 해 놔서.”
갑자기 중매쟁이를 자처하는 오르카 황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엔 아주 훌륭하다니.’
“사실은 썩 훌륭한 신랑감이 아니란 뜻인가요?”
“네. 워낙 바람둥이라 숨겨둔 애가 셋이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북부는 아주 심각한 남성 중심의 문화이니 그쪽으로 시집가면 제대로 목소리 내기가 힘들겠죠. 남편 허락 없이는 집 밖으로도 못 나갑니다. 물론 지방의 문화를 잘 모르는 자들은 그리 심각한 줄 모르더군요.”
하지만 오르카 황자는 직접 제국 곳곳을 누비며 두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봤다.
수도에 떠도는 이야기보다야 그의 이야기가 더욱 정확할 것이다.
“또 영지는 상당히 부유해 보이지만 사실은 실속 없는 상태죠. 수년째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상황입니다. 그나마 봐줄 만한 얼굴도…… 뭐, 초상화는 상당히 미화가 들어가는 법이잖습니까? 취향이 다소 이상한 변태라는 소리도 있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최악의 신랑감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을 골라왔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멜리사 바인과 썩 어울리는 남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자들끼리 만나야 더 큰 행복이 만들어지는 법이죠. 이보다 더 나은 혼처는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남작에게 전해 줘도 만족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미 알테어와 거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모양인데…….
“왜 곧장 알테어를 찾지 않고 제게 이걸 주시는 거죠?”
“생색내고 싶어서요.”
“네?”
“남작은 분명 나랑 거래했다는 이야길 안 할 것 같았거든요. 후작은 날 불편해하니까.”
불편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으니 오르카가 그걸 알아챈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그 사실을 지적당하니 조금 민망해 헛기침이 절로 나왔다.
“남작과 거래하긴 했지만, 그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이득인 방향을 발견하면 분명 그쪽을 택할 거라, 좀 더 신의 있는 쪽에게 알려 두고 싶었습니다. 내가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후작은 나나 남작과는 조금 다른 부류니까 신의가 중요하죠?”
알테어가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나 역시 그런 선택을 할 테니까’라는 생각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이 영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훗날 내게 신의로 보답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이걸 안 받아도 됩니다. 이렇게까지 사촌을 쳐낼 생각이 없어도 거절할 수 있겠고.”
오르카 황자가 내 선택이 궁금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내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받을 건가요, 후작?”
***
그 시각.
오르카 황자와 나디아가 자신의 미래를 두고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멜리사 바인이 발스테드에서 석방되었다.
“악! 짜증 나!”
간수가 거칠게 발스테드 밖으로 자신을 떠밀어내자 멜리사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문은 이미 굳게 닫힌 후였다.
멜리사는 분해서 발을 마구 구르며 몸을 휙 돌렸다.
발스테드에서 막 나온 데다 몰골까지 엉망인 멜리사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흘러나와 코를 틀어막으며 헛구역질하는 자들도 있었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할 때는 전혀 마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매정한 태도에 멜리사가 더욱 분노해서 눈을 부라렸다.
“뭘 봐? 구경났어? 다들 꺼지지 못해?!”
평소라면 멜리사의 호통에 귀족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구경꾼들이 우르르 흩어졌을 테지만, 지금의 멜리사에게는 전혀 위압감이 없었다.
“누구더러 꺼지라 마라야?”
“더럽고 냄새나는 너나 꺼져!”
오히려 자극받은 구경꾼들이 발끈하며 온갖 이물질을 멜리사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악! 아악!”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몰골이 쓰레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멜리사는 마구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사람들이 야박하게 굴수록 마음속의 분노가 더욱 커져 갔다.
‘이게 다 그 계집애 때문이잖아! 내가 왜 이따위 꼴을 당해야 해?’
바인 후작저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으며 쿵쿵 걷는 멜리사의 머릿속에 제 아비가 신신당부했던 이야기가 선명하게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