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문 열어! (126/170)


126화. 문 열어!
2022.08.17.



 


“넌 그놈의 성질머리부터 죽여야 해.”

“뭐라고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 주겠다더니 다짜고짜 험한 말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멜리사가 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아바르가 이럴 줄 알았다는 양 쯧- 하고 혀를 찼다.


“이것 봐라. 지금도 바로 흥분해서는!”

“그런 소리를 듣고 누가 가만히 있어요?”

“지금은 예전처럼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될 때야! 조금 더 진중하고 치밀하게 행동해야 겨우 만회할 수 있을까 말까라고.”

아무리 머리가 백지 같은 멜리사라도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불리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멜리사가 그럼 어떡하라는 거냐는 듯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아바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혼자는 아무것도 못 해. 우선 조력자를 구해야 한다.”

“조력자요? 지금 우리 꼴을 보세요. 재산도 작위도 다 잃은 우리를 누가 돕겠어요?”

멜리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버지가 1황자 쪽에 도움을 청하라고 해서 연락했지만 한 번도 답이 오지 않았다고요.”

“흥. 그놈은 그럴 종자였어. 인상이 야비한 게 믿을 놈은 아니었지.”

얼마 전까지는 1황자를 향해 ‘왕이 될 상이십니다!’라든가, ‘온화하고 총명한 인상이십니다!’라며 온갖 아부를 해댔던 아바르의 놀라운 태세 전환에 멜리사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아바르는 황당함으로 가득 찬 딸의 눈빛을 싹 무시하고 제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속법이 개정되어서 나디아 그 계집애는 득을 봤지만, 반대로 엄청난 손해를 본 사람들도 있다. 손위 누이가 있는 귀족 가문의 장남들은 하루아침에 물려받을 게 없어진 셈이잖느냐?”

그런 자들은 상황을 이렇게 만든 나디아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터.


“그런 놈들에게 접근해서 손을 잡으면 된다. 나디아 그 계집애가 사라지면 네가 재산과 작위를 받게 될 테니까, 이번 상속법 개정으로 권리를 잃은 놈에게 바인의 작위와 재산을 함께 누리자고 하면 되지.”

아버지의 입에서 계략이 술술 흘러나오자 멜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머리 굴리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는 그녀가 듣기에도 계획이 썩 그럴듯했다.


“생각해 둔 사람이 있어요?”

“아무래도 큰 걸 받으려다 밀려난 사람의 상실감과 분노가 크겠지.”

“큰 거요?”

“그래. 큰 거.”

아바르가 손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수도 사교계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 별안간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갔다.


“이제야 알겠구나. 왜 비오스케스 공작이 그 계집애 부부와 손을 잡은 건지.”

“비오스케스 공작……?”

“그래. 공작에겐 손녀뿐이라 재산과 작위가 먼 친척에게 넘어갈 예정이었거든.”

“……!”

소심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귀족들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던 나디아가 어떻게 비오스케스 쪽의 줄을 잡았나 했더니!


“그럼 그 비오스케스 공작의 먼 친척과 손을 잡으면……?”

“그래. 이제야 너도 머리를 굴리는구나!”

아바르가 흐뭇하게 웃으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먼 친척이라는 자가 니세르 지방에 살고 있다고 했지. 시골 출신이 공작이 되는 거냐면서 다들 수군수군했던 기억이 있어.”

“니세르는…… 완전히 촌구석 아니에요?”

멜리사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촌구석 출신과 결혼하라는 말씀이세요?”

“네가 지금 촌구석 출신이니 뭐니 가릴 처지냐? 이민족이래도 결혼해서 집안을 일으켜야지!”

“집안은 내가 말아먹었나…….”

멜리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엄밀히 말해 일을 저지른 건 아버지인 아바르였다.

꼭 자신이 잘못해서 집안을 말아먹은 것처럼 다그치니 아주 억울했다.


“아무튼 나가자마자 니세르로 가서 공작의 먼 친척과 접촉해라. 시골 촌구석 출신이니 어수룩하겠지. 부족한 너라도 잘 꼬드길 수 있을 게야.”

“니세르까진 어떻게 가요? 한 푼도 없는데.”

“바인 후작저로 가서 집사에게 도움을 청해라. 내 명으로 왔다고 하면 여비를 내어줄 거다. 사용인들은 아직 우리 편이야.”

 

***



‘아버지는 여비만 챙기라고 했지만…….’

멜리사는 겨우 여비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저택에 두고 온 자신의 수많은 옷과 장신구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멜리사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런 꼬질꼬질한 몰골로 니세르에 간다면 아무리 어수룩한 시골 청년이라도 꾀어낼 수 없을 것 아닌가?

평소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가야 상대를 쉽게 꾀어낼 수 있을 거다.

장신구를 뇌물로 찔러 주면 더 회유가 쉬울 테고 말이다.


‘그러니 집사에게 전부 챙겨 달라고 해야겠어.’

멜리사의 머릿속은 금세 행복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니세르에 도착해 비오스케스 공작의 후계자가 될 뻔했던 먼 친척을 찾아가면,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자태에 홀딱 반해 제 손짓 하나에 벌벌 떠는 추종자가 되겠지.

수도의 콧대 높은 신사들도 멜리사를 찬양했으니 그깟 시골 청년쯤이야.

지금은 제가 이런 엉망진창인 몰골이라도 금세 처지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바인 후작저에 도착한 멜리사의 눈앞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활짝 열린 바인 후작저의 대문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꾀죄죄한 몰골을 한 사람들-물론 그들보다 더 꾀죄죄한 멜리사가 할 말은 아니었다-은 하나같이 작은 짐보따리를 든 채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누군가는 눈물을 훌쩍이다 결국 통곡하며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멜리사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정원사, 마부, 풋맨, 시종, 그리고 집사까지.

저택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왜 이러고 있단 말인가?

멜리사는 황급히 집사를 향해 뛰어갔다.

거지꼴을 한 여자가 갑자기 자신 쪽으로 달려들자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질려 있던 집사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가, 더러운 몰골 아래에 숨겨진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메, 멜리사 아가씨?!”

놀란 외침에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멜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기억 속 멜리사는 늘 아름답고 화려한 아가씨였는데, 지금 모습은 빈민가 거지래도 믿을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에 담긴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멜리사는 수치심에 벌게진 얼굴로 애써 그들을 무시하며 집사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새 후작이 저희를 모두 쫓아냈습니다.”

“뭐? 모두?”

“예. 하나도 빠짐없이 해고됐습니다. 추천장도 안 써주고, 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귀족가에 뿌리겠답니다!”

집사가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푹 내쉬다 희망에 찬 눈빛으로 멜리사를 보았다.

오랫동안 아바르와 멜리사를 위해 일했으니,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멜리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영 엉뚱했다.


“그럼 난 어쩌란 말이야?”

“예?”

“아버지가 집사에게 여비를 받으랬단 말이야!”

“여, 여비요?”

지금 급히 쫓겨나느라 숨겨 뒀던 귀중품들도 죄다 저택에 두고 나오게 된 자신에게 여비 타령을 하는 건가?

황당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멜리사는 그런 집사를 앞에 두고 마구 발을 구르며 그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 안에는 내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가득 남아 있는데, 다들 이렇게 쫓겨나면 내 귀중한 물건들은 어찌 찾아? 어?”

사용인들이 얼마나 대책 없이 쫓겨났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도 멜리사는 그들의 처지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자신의 것을 찾을 길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화를 쏟아낼 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집사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가씨랍시고 공손히 모셨다니.’

충성했던 지난날이 허무했다.

집사는 발을 구르며 분노를 토해 내는 멜리사를 싸늘하게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자신을 두고 미련도 없이 떠나는 집사의 모습에 멜리사가 놀라서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제 갈 길을 가야지요.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일거리를 어찌 찾아야 할지도 고민해야 하고요.”

“뭐? 그럼 난 어쩌라고? 내 물건 찾아 주고 가!”

당당한 요구에 집사가 픽 하고 비웃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저도 쫓겨난 처지인데 그걸 어찌 찾아 드립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멜리사는 당황해서 우물거리다 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여비라도 주고 가! 나 니세르로 가야 해.”

“여비요? 니세르?”

집사가 코웃음을 흘리며 제 팔을 붙잡은 멜리사의 손을 쳐냈다.


“상황 파악 좀 하십시오, 아가씨. 전 이제 당신 사용인도 아닌데 왜 당신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뭐, 뭐어? 이 건방진!”

멜리사가 악에 받쳐 소리쳤지만, 집사는 그런 소란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는 듯 삐딱한 얼굴로 혀를 차며 그대로 멀어질 뿐이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저 건방진 자식을 얼른 붙잡아야지!”

물론 다른 사용인들도 길길이 날뛰는 멜리사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다들 제 살길이 급한 상황이라, 더 이상 자신들에게 급료를 주지 못하는 아가씨의 투정을 받아 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멜리사는 우르르 멀어지는 사용인들의 걸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그러는 사이에 몰골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이, 이게 뭐야……?’

멜리사는 쌩하니 사라진 사용인들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용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이 조금씩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끼이익.

조력자라고 믿었던 사용인들이 사라졌으니, 이대로 문이 닫히면 바인 후작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머리로 무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멜리사는 잽싸게 발을 놀렸다.

조금씩 닫히는 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타이밍을 완전히 맞추지 못했다.


“악!”

닫히는 문 사이에 딱 끼어 버린 멜리사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사람을 죽일 셈이야? 문 열어! 얼른!”

문에 껴서 버둥거리는 와중에도 목청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의 등장을 알아챌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이 저택의 새로운 주인, 나디아도 있었다.

***

나는 쩌렁쩌렁 울리는 멜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대문으로 향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후작저로 올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리 요란하게 소란을 피울 줄은 몰랐다.


“직접 안 만나셔도 되는데요. 제가 쫓아낼까요?”

곁을 지키던 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내가 모든 걸 가졌고, 그 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난 후작이고, 그 애는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피할 이유는 없지.”

오히려 혼쭐을 내주기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