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내에게는 뭐든 양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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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아내에게는 뭐든 양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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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아내에게는 뭐든 양보할 것.
2022.08.21.
당당하게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오자 문에 낀 채로 버둥대는 멜리사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죽겠다며 소리를 질러대는 멜리사의 반항에도 꿈쩍 않고 대문을 닫은 채로 유지할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멜리사의 반항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기사들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문에 낀 채로 버둥대던 멜리사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악!”
멜리사가 바닥에 구르며 흙먼지가 피어났다.
동시에 오래 묵은 듯한 악취가 코를 찔러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마도 멜리사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 듯했다.
옆을 지키던 마리가 내게 얼른 손수건을 건넸고, 나는 손수건으로 코를 가려 흙먼지와 냄새를 막았다.
요란했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엉망인 몰골에 흙먼지까지 뒤집어쓴 멜리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지켜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멜리사의 눈빛에 적의가 잔뜩 서렸다.
“내놔!”
다짜고짜 뭘 내놓으라는 건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자 멜리사가 이를 바드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애가 움직일 때마다 코를 막은 손수건을 뚫고 냄새가 흘러 들어와 괴로울 지경이었다.
‘발스테드에서는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더니.’
고작 며칠 감옥에 갇힌 걸로 이런 꼴이니 오래 수감된 숙부의 꼴이 어떨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엉망이 된 숙부의 몰골을 그려 보는 사이 멜리사가 쿵쿵대며 내 앞까지 다가왔다.
“내 옷! 내 장신구! 내…… 아무튼 내 물건 전부 내놓으라고!”
멜리사가 길길이 날뛰자 풀풀 피어나는 냄새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리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마리가 나섰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멜리사 양. ‘내 물건’이라니요?”
“너……!”
‘아가씨’라는 호칭도 없이 ‘멜리사 양’이라는 부름에 그 애가 울컥한 듯 입을 열었다가, 당장은 원하는 걸 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숨을 골랐다.
“못 들었어? 내 옷과 장신구가 아직 저 안에 있잖아. 그건 내놔야지.”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멜리사 양. 저 안에는 멜리사 양의 물건이 하나도 없어요.”
침착한 마리의 대꾸에 멜리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야? 난 내 옷과 장신구를 가져간 적이 없다고! 설마 내 물건을 전부 버린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바인 저택에 있는 물건은 어떤 것도 처분하지 않았습니다. 후작님의 소중한 재산인 걸요.”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안도의 숨을 내뱉던 멜리사가 곧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후작님의 소중한 재산?”
“네. 후작님의 재산이지요.”
“무슨 헛소리야. 그건 내 재산이지! 전부 내가 고심해서, 내 손으로 직접 구입한 것들이라고!”
“그러셨겠지요. 하지만 구매대금은 전 후작께서 처리하셨던 걸요.”
“그거야 당연하지. 돈은 아버지가 내는 게 맞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여전히 소리를 높이는 멜리사의 모습에도 마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미소를 지은 채 대꾸했다.
“그간 멜리사 양께서 사용하셨습니다만, 물건을 구매한 비용은 전부 후작가에서 지급했으니 후작가의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멜리사 양께서 개인 재산으로 사들인 물건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없었습니다만.”
“그……!”
멜리사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멜리사는 아주 평범한 귀족 영애였다.
우아한 귀족 영애들은 스스로 노동해서 돈을 버는 걸 아주 천하게 여겼으므로, 멜리사는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다.
욕심 많은 숙부는 딸에게 개인 재산을 떼어 주지도 않았다.
그러니 멜리사는 개인 재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내놔! 난 여전히 ‘바인’이야! 후작이 되었으면 네가 날 보살펴 줘야지 않겠어? 우리 아버지가 갈 곳 없는 널 거둬 줬었잖아. 안 그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해 낸 주장이 겨우 그거라니.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으니 마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후작님이 불임이라며 모함해 사교계에서 매장하려고 했으면서 보살펴 달라고요? 당장 쫓아내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도 감사히 여기셔야죠!”
마리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틀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들어가시죠, 후작님. 사죄라도 할까 싶어 모시고 나온 건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그건 기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런 일에 시간을 버리면 후작님의 귀한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아냐, 마리. 멜리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네?”
당장 제 말에 동조할 줄 알았던 내가 고개를 젓자 마리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멜리사. 네 말이 맞아. 숙부께선 날 아주 잘 보살펴 주셨지. 그러니 나 역시 그분이 내게 했던 것처럼 널 대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사람의 도리지.”
“그, 그래! 사람이라면 보답을 잊어선 안 되는 거야.”
멜리사가 한결 안심한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면서 내가 긍정적으로 자신을 받아줄 줄은 몰랐는지 얼떨떨한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고 사는 건 피차 괴로울 것 같아. 감정이 많이 상한 상태잖아. 그래서 네게 혼인을 주선할까 해.”
“호, 혼인?”
“응. 네가 발스테드에 있는 동안 고민을 좀 해 봤거든. 그러다 혼인이라는 방법이 생각났지 뭐야. 숙부도 내게 좋은 혼처를 주선해 주어서 오늘 내가 이렇게 잘될 수 있었잖아. 네게도 그 부분을 보답하고 싶어.”
“후작님!”
내 이야기에 마리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녀는 나와 오르카 사이에 오갔던 거래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 내가 정말로 멜리사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까지 호구는 아니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오르카 황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내가 그의 제안을 받지 않더라도 알테어가 분명 받아들였을 테니까.
오르카 황자에게 빚을 지는 사람이 알테어가 아니라 내가 되는 쪽이 더 나았다.
물론 알테어가 소설에서처럼 미친 악역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오르카 황자와의 접점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오르카 황자에게도 분명히 이야기해 뒀어. 당신과 거래한 건 알테어가 아닌 나라고. 그러니 보답도 내가 하겠다고.’
그 말을 들은 오르카 황자는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었지만 내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어 내 손에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아주 엉망진창인 남편감’이 들어와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자, 멜리사. 상대의 초상화도 이미 받아 두었어. 내가 보기엔 괜찮던데, 네 눈에도 분명 흡족할 거야.”
마리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녀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멜리사에게 길을 터 주었다.
평소라면 끝까지 날 설득하며 길을 막았겠지만, 내가 이렇게 태연하게 나오니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한 듯했다.
나와 마리의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가늠하던 멜리사는 곧 생각을 정리했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턱을 가볍게 치켜들었다.
“뭐. 네 뜻이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 정도는 들어 볼게. 물론 상대의 조건이 별로면 확실히 거절하겠어. 그렇게 되면 귀한 내 시간을 쓰게 만든 거니까, 그 시간에 대한 비용을 줘야 해.”
괜찮은 남편감이면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게 아니면 거절하고 돈을 받겠다는 심산이었다.
멜리사다운 이기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나는 멜리사를 잘 알고 있었다.
오르카 황자가 가져온 남편감은 아마 그녀의 마음에 쏙 들 것이다.
“그렇게 할게. 그러니 우선 들어가자.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지.”
“크흠.”
스스로도 엉망인 몰골에 대한 자각은 있었던 건지 멜리사가 헛기침하자 마리가 대충 손짓해 그녀를 불렀다.
“……안내하지요, 멜리사 양. 이쪽으로.”
***
“뭐 하러 그 여자에게 그런 호의를 베푸셨어요?”
멜리사가 신나게 목욕을 즐기는 사이 마리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건지 안나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평생 거지꼴로 살게 해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응. 하지만 그 꼴로 집 안을 돌아다니면 가구에 이상한 냄새가 밸 거야. 내 코도 불쌍하고.”
결국 멜리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내 말에 분이 좀 풀린 건지 안나가 “그건 그렇네요!”라며 키득댔다.
“그런데 정말 그 여자에게 좋은 혼처를 소개해 주실 거예요?”
“가문의 혼사를 챙기는 것도 가주의 역할이지.”
“그거야 그렇지만, 그 여자는 가문 사람도 아닌 걸요. 죄를 지어 쫓겨난 후작의 딸이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마리에게라면 몰라도 가볍게 팔랑대는 안나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어 대충 둘러대며 웃자 그녀의 표정이 더욱 아리송해졌다.
‘귀부인의 마음까지 읽는 측근 시녀가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겠어.’
하지만 그런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안나와 멜리사의 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별다른 기별도 없이 문이 열렸다.
이런 식으로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알테어뿐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그가 있었다.
“나디아.”
막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건지 날 부르는 알테어의 머리 끝이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훈련한 뒤에는 꼭 깨끗하게 씻고 날 찾아오는 사람이 이렇게 급히 걸음하다니.
뭐, 이유가 알 것 같았지만 말이다.
“오르카 황자가 다녀갔다지? 조금 전에는 멜리사 바인을 저택으로 들였고.”
“응. 맞아요. 오르카 황자가 선물을 주고 갔답니다.”
“……그건 원래 내가 받기로 한 거야.”
“안타깝지만 내가 먼저 받아 버렸어요.”
알테어의 얼굴이 불만으로 찡그려지자 안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그를 훈계했다.
“영주님. 선물을 뺏겼다고 심통 내시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아내에게는 뭐든 양보하셔야죠!”
“안나도 그렇다고 하잖아요, 알테어.”
생각지도 못한 든든한 아군의 등장에 힘을 얻고 어깨를 으쓱하니 알테어가 싸늘하게 안나를 흘겨보았다.
“그 선물이 뭔 줄 알고…… 정신 사나우니 나가.”
“욕심쟁이인 게 들켜서 민망하시니까 딴소리는.”
안나가 투덜대며 대충 인사하고 밖으로 나서자 알테어가 푹 한숨을 내쉬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으로 알테어의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오르카 황자가 좋은 사람을 추천해 줬더라고요. 멜리사를 그와 결혼시키려고 해요.”
“당신이 직접 나서서 그럴 필요는 없었어. 야비한 방법은 내가 알아서…….”
“야비한 건 알테어에게 맡기고 나만 깨끗하게 있으라고요?”
이어지려는 말을 끊고 분명하게 묻자 알테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건 너무 치사해요. 난 야비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치사한 사람이 되는 게 더 싫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