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야비한 부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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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야비한 부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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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야비한 부부가 됩시다.
2022.08.24.
“야비한 일을 내게만 맡겨도 치사한 게 아냐.”
“내가 그렇게 느끼면 치사한 거예요.”
간단하게 알테어의 말을 반박하고 나니 그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혹시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거라뇨?”
“내가 황자와 엮이면 나쁜 놈이 되는 이야기를 봤다고 했으니까.”
“아예 생각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내 뜻을 묻는 알테어의 얼굴에 어쩐지 불만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당신은 날 좀 더 믿을 필요가 있어.”
“믿고 있어요.”
“중간에 거래를 가로채 놓고 믿고 있기는.”
믿고 있다고 강조했음에도 알테어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억울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항변했다.
“알테어를 왜 안 믿겠어요. 내 남편인데요. 내가 믿지 않는 쪽은 오르카 황자인 걸요.”
“흐음.”
“알테어는 그 이야기를 직접 안 읽어서 몰라요. 거기서 오르카 황자가 얼마나 야비했는데요. 알테어는 아무 생각이 없어도, 그쪽이 정신없이 엮어 버릴지도 몰라요.”
오르카 황자를 마구 험담하자 굳어 있던 알테어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빈틈을 포착한 나는 ‘이거다!’ 싶어져서 이야기를 술술 이어 나갔다.
오르카 황자가 소설 속에서 얼마나 무자비하게 주변인을 이용했었는지 떠들고 나니 알테어가 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못 믿을 인간이면 당신도 조심해야지.”
“저요?”
“그래. 그쪽이 당신도 야비하게 엮어 버릴 수도 있잖아.”
“에이. 내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알테어 쯤이나 되는 인재여야 그쪽도 수고를 쏟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깨를 으쓱하자 알테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 당연히 진심인데요……?”
재차 확인하는 이유를 몰라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며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러니 내가 걱정하지. 그놈이 당신도 노린다는 걸 왜 몰라.”
“날 왜 노려요?”
“그거야 당연히 당신이 유능하니까 그렇지.”
“……내가요?”
유능하다니. 내가 유능하다니!
생전 처음 듣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테어의 땀을 닦아 주던 것도 잊고 눈을 껌뻑이자 그가 내 손에서 손수건을 빼내며 스스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당신은 주변은 잘 살피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군. 그놈은 분명 당신에게도 욕심 있어.”
“나 같은 사람을 그쪽이 왜…….”
“날 믿는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을 제대로 마무리하기도 전에 알테어가 단호하게 이야기를 잘라 냈다.
“나도 당신 말을 믿는 것처럼, 당신도 내 말을 믿어. 그놈은 당신을 노리고 있어. 그러니 확실히 경계해야 해.”
“……그렇게 말하면 믿는 수밖에 없잖아요.”
오르카 황자의 심중이 무엇이든, 알테어가 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기분 좋아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붉어진 뺨을 알테어도 분명히 보았는지 그가 땀을 닦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뺨이 장밋빛이 되었군.”
“칭찬에는 안 익숙해서…….”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버무리자 알테어가 눈썹을 꿈틀했다.
“방금 내가 칭찬하는 걸로 들렸나?”
“어, 음, 그런 거 아니었어요?”
아니었는데 그런 거라면 아주 민망하다.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랐던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날 보며 화르르 타올랐던 알테어의 기세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아니, 뭐, 맞지. 칭찬했어.”
“내가 착각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알테어가 헛기침하며 살며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경고의 의미도 있었어. 그놈이랑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전혀 안 가까워요.”
“알아. 그래도 가깝게 지내지 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도대체.”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주장이었지만 나는 크게 반박하지 않고 알테어를 마주 안았다.
알테어는 아주 크고 안정적이라, 그에게 폭 안길 때면 기분이 아주 좋았다.
“거래는 이미 끝났으니 어쩔 수 없고…… 앞으로 할 야비한 짓에 나도 동참해도 될까?”
귓가에 울리는 알테어의 목소리는 내용에 맞지 않게 썩 다정했다.
“이렇게 야비한 작당을 하는 부부가 또 어디 있을까요.”
나는 키득대며 알테어를 올려다보았다.
“좋아요. 같이 야비한 부부가 되어 보자고요!”
***
‘하. 기분 좋다.’
멜리사는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묵은 때를 벗겨 내며 황홀하게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매일 즐기던 일상이라 소중함을 몰랐지만, 발스테드라는 극한의 장소를 겪고 나니 이 순간이 천국에서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욕조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나오자 수건과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시녀들이 서넛은 붙어 물기를 닦아 주고 옷까지 입혀 주었겠지만, 거기까지는 호의를 제공하지 않기로 한 건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걸 내 손으로 어떻게 해?”
멜리사는 투덜거리며 어색한 손길로 물기를 닦아 내고 옷에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었다.
찝찝한 옷을 입다가 뽀송뽀송한 옷을 입으니 몸이 가벼워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감싸고 방에 들어서니 따뜻한 차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특별하지도 않은 쿠키와 빵이 전부라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음식을 보자마자 멜리사의 눈이 뒤집혔다.
그녀는 품위 없이 우다다 달려가 입 안으로 쿠키와 빵을 마구 쑤셔 넣었다.
급하게 먹느라 목이 메어 컥컥대면서도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
발스테드에서 먹을 걸 제대로 먹지 못해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다과는 많으니 천천히 먹어. 차도 같이 마시고.”
“켁!”
정신없이 다과를 입에 밀어 넣던 멜리사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움찔했다.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해대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친절하게도 멜리사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세상에. 배가 고팠구나.”
다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디아였다.
“어, 언제부터 여기에…….”
“처음부터 있었어.”
그랬는데 전혀 보지 못했다.
다과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전혀 없었던 거다.
천한 빈민가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을 나디아 앞에서 보였다는 생각에 멜리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게졌다.
“다과를 더 가져오라고 할까?”
그러는 와중에 나디아가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어 멜리사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됐어!”
그녀는 민망함에 벌게진 얼굴로 제 등을 두드리는 나디아의 손을 쳐내고 찻잔에 가득 찬 차를 마구 들이켰다.
“앗, 뜨거!”
물론 그것도 너무 뜨거워서 반쯤은 뱉어 내고 말았지만 말이다.
멜리사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 나디아의 치맛자락을 더럽혔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꽤 쌤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묵직한 기척과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마가 엉망이 됐군. 뜨거운 물에 다치진 않았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알테어였다.
‘세상에!’
나디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세심하게 그녀의 치마를 살피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겨우 진정됐던 멜리사의 얼굴이 더욱 벌게졌다.
나디아 이 계집애에게 우스운 꼴을 보인 걸로도 모자라 에일스포드 남작에게까지 민망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니.
당장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긴 왜 죽어. 살아야지.’
멜리사는 무너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잡으며 당당하게 허리를 세웠다.
“호들갑은. 그냥 물이 튄 것뿐이라고요.”
남편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비아냥도 알테어의 날카로운 눈빛이 제게 닿자마자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멜리사는 휙 고개를 돌려 무서운 시선을 회피하며 그나마 만만한 나디아를 쿡 찔렀다.
“보여줄 게 있다며? 그래서 따라온 건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의 초상화를 가져왔어.”
나디아가 멜리사 앞으로 슥 그림을 밀어 놓았다.
멜리사는 관심 없는 척 눈동자만 슬쩍 돌려 그림을 쳐다보았다가, 그림 속 남자의 수려한 외모에 놀라 후다닥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이, 이 남자라고? 네가 찾아온 신랑감이?”
“응. 어때? 외모는 괜찮은 것 같은데.”
“그, 뭐, 나쁘진 않네.”
멜리사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그림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림에서 시선을 전혀 떼지 못했다. 외모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티 내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잘 아는 터라 멜리사는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물론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점에서 태연함을 가장하는 건 틀려먹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크흠. 그, 뭐 하는 사람이야? 집안은? 작위는 있어? 재산은 또 어떤데?”
우르르 쏟아지는 질문에 나디아가 빙긋 웃었다.
“북부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집안의 차남이야. 차남이지만 집안이 부유하니 웬만한 건 모두 누리면서 살 수 있겠지.”
“지방 귀족이라고?”
멜리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치켜뜨자 나디아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대꾸했다.
“어차피 수도에서는 지내기 힘들잖아. 사람들의 날 선 시선을 보면서 지낼 수 있겠어?”
“흥. 누, 누가 날 그렇게 본다고.”
반박하긴 했지만 나디아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수도 사교계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는 처지이니, 수도의 소문이 퍼지지 않은 지방에서 자리를 잡고 편히 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지방 귀족들은 지방에서 입김이 강해 거의 왕이나 다름없이 지낸다고 하니까…….
멜리사의 머리가 빠르게 상황을 계산했다.
어차피 아버지가 찾아가라고 한 남자도 지방 출신이었다.
문제는 그 남자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거다.
생김새는 괜찮은지, 재산은 좀 있는지, 뭐 그런 조건들 말이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멜리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디아와 알테어의 시선을 느끼고는 헛기침하며 그림을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나는 그리 급하지 않다’는 걸 주장하고 싶어서였다.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다 믿어? 말만 번듯하게 하고 사실은 이상한 놈인 줄 어떻게 알겠냐고.”
“날 못 믿니?”
“당연하지! 우리 아버지가 널 시집보낼 때도 널 속여서…… 크흠.”
코웃음 치다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까지 꺼내 버린 멜리사가 서둘러 말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네 말만으로는 신뢰성이 없으니 내가 직접 알아보겠어.”
“응. 당연히 그래야지.”
찔리는 구석이 있다면 당황했을 텐데 나디아의 반응이 매우 태연해서 멜리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정말 나한테 좋은 혼처를 찾아왔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 계집애는 어디까지 호구인 거지?
‘물론 이 계집애가 호구라서 나쁠 건 없지만.’
아직 소문을 알아보기 전이지만 벌써 기분이 좋아져서 멜리사가 씩 웃었다.
스스로의 기분에 취해 있느라 자신을 향한 알테어의 서늘한 눈빛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이 그녀의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