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장례식과 난봉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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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장례식과 난봉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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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장례식과 난봉꾼.
2022.08.31.
1황자가 죽었다.
나와 알테어는 황궁에서 날아온 급보에 서둘러 검은 예복을 갖춰 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장례식은 매우 간소하게 치러졌다.
물론 황실이 주관하는 장례라 일반 귀족들의 장례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차기 황제감으로 여겨지던 황자를 기리는 자리라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장례식을 두고 귀족들은 늘 그랬듯 수군대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황자가 황제를 대리해 해외 사절로 떠날 때는 ‘상속법 개정과는 별개로 1황자야말로 황제가 생각하는 후계자!’라며 추켜세우던 사람들도 태도를 싹 바꾸었다.
다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황제의 마음이 1황자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장례식이 소박했던 것이다.
황궁에 출입할 수 없는 일반 제국민들이 떠나는 황족을 기릴 수 있도록 제국 전역에 조문소를 세우는 것도 생략했을 정도였다.
아주 노골적인 박대였다.
“도대체 언제 폐하의 마음이 이리 식으신 거랍니까?”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분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소.”
1황자의 관 위에 국화를 놓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작게 수군댔다.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뻔했다.
“그럼 이제 2황자가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감이겠죠?”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황제의 뜻에 따라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귀족들은 어쩌면 1황자의 죽음도 황제의 뜻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후계는 결국 폐하의 마음에 달린 일이지만, 답은 2황자시겠지요. 오랫동안 폐하를 곁에서 보필했으니 말입니다.”
“하긴. 3황자께서는 요양하시느라 오래 수도를 비우고 지방을 떠돌아다니셨으니까요.”
당사자인 2황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그는 세상을 떠난 형님의 관을 옆에서 지키며 조문하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역시 ‘드디어 내가 첫 번째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반면 함께 옆을 지키고 있는 3황자는 표정을 읽기 힘들었고, 황제는 아예 장례식에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나와 알테어가 관에 꽃을 바칠 차례가 되었다.
“바인 후작. 에일스포드 남작.”
2황자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반가운 얼굴로 나와 알테어를 맞았다.
“두 사람이 와 주어 형님께서도 고맙게 생각하실 겁니다.”
“고맙게 여기시다니요. 당연히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려야지요.”
알테어가 특유의 서늘한 얼굴로 2황자의 말에 대꾸했다.
얼핏 들으면 겸손하게 자신의 의무를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1황자를 죽음의 길로 인도한 자가 알테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배웅이 아니라 일을 잘 마무리했다는 확인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장례가 마무리되면 한번 자리를 마련해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남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다른 귀족들을 대할 때는 그래도 형님을 기리는 척이라도 하더니.
알테어를 마주하자 얼른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는지 2황자가 성급하게 만남을 청했다.
그런 모습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이 헛기침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2황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예전부터 남작과는 꼭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자리가 적절치 않으니 추후에 이야기 나누시죠.”
알테어가 ‘이런 자리에서 무슨 헛소리냐. 닥치고 조문객이나 맞이해라’는 뜻으로 말을 돌렸지만…….
“그렇다면 내가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2황자는 의도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반가워했다.
‘이쪽도 그다지 황제의 재목은 아닌 것 같네.’
그간 1황자에게만 향했던 시선이 2황제에게 꽂히게 될 테니, 무관심이라는 방패 속에 잘 숨어 있던 2황자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나게 될 터.
오늘이 그 시작이라면, 2황자의 스타트는 썩 좋지 않았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알테어에게만 제안하는 걸 보니 우리 둘 중에서 실세가 누구인지는 잘 아는 듯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며 실속을 챙기고 있는 건 3황자 쪽이었다.
그는 가족을 읽은 슬픔에 잠긴 황자의 모습을 제대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제 내가 후계자!’라는 생각에 들떠 천지 분간도 못 하는 2황자와 비교되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나는 2황자가 더 주책을 부리기 전에 얼른 알테어를 끌고 관 앞으로 갔다.
관에 누운 1황자의 주위에는 이미 다른 조문객들이 놓고 간 꽃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위에 내가 가져온 꽃을 놓으며 속으로 빌었다.
‘죽은 뒤에도 평온하지 않기를.’
그가 영면에 들지 못하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저주까지 건네자 비로소 모든 일이 마무리됐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인데.”
죽은 자의 모습을 응시하는 내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알테어가 작게 속삭였다.
“그냥 이렇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허무하기도 하고…….”
1황자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복수를 이뤄낸 셈이지만, 그래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예상보다 통쾌하지는 않았다.
씁쓸하게 웃으며 알테어를 바라보자 내 생각을 정확하게 읽은 건지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감쌌다.
“글쎄.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자 알테어가 묘한 미소를 입에 건 채로 자리를 벗어나며 턱짓으로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장례식을 돕는 황궁의 시종들이었다.
그들은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은밀한 대화의 내용은…….
“1황자님은 어쩌다 죽은 거래요?”
“폐하께서 공식 발표도 안 하셨죠? 사절로 떠나는 길에 사고로 죽었다고만 하셨고.”
“보통은 원인도 전부 밝히잖아요? 구린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요.”
“그럼 구린 이유가 있다는 거네요?”
역시 소문을 좋아하는 황궁 시종들답게 죽은 1황자의 죽음을 두고 떠드는 중이었다.
그들의 말처럼 황제는 공식적으로 1황자의 사망 원인을 발표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사고사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함께 사절로 떠났던 자들은 그대로 사절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외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추측이 오가는 듯했다.
모두가 한마디씩 뜬소문을 속삭이는 와중에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친척이 그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누군가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주목했다.
“폐하께서 왜 공식 발표를 못 하셨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어휴. 저라도 자식이 그러다 죽었으면 말을 못 하지요. 함구하는 게 1황자의 체면을 지켜 주는 길이었을 겁니다.”
묘하게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이어 가는 사람의 얼굴이 매우 눈에 익었다.
‘……카인이잖아?’
물론 변장하긴 했지만 한동안 그의 비호를 받으며 가까이 지냈던 터라 나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사이 변장한 카인의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카인은 그에 못 이기는 척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입니다? 절대 비밀이에요?”
“당연하죠. 얼른 말해 보세요!”
“그게…… 볼일을 보다 죽었답니다.”
“볼일?”
“그러니까 그 큰 볼일 말입니다. 산길에서 급하게 신호가 와서 볼일을 보다가 뒤로 굴러떨어졌다는군요.”
“큰 볼일이라니…… 그…… 똥을 싸다가 죽었다고요?”
“너무 볼일에 집중하신 거지요.”
“푸흡.”
카인이 진지하고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자 누군가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큰 거’를 해결하다가 뒤로 굴러떨어져서 죽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알테어를 휙 돌아보자 그가 비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죽음마저 우습게 만들어야 진짜 복수가 완성되는 거 아니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믿어요?”
“이미 알잖아. 사람들이 흥미로운 소문에 얼마나 취약한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재밌는 이야길 들었다면서 사방으로 퍼다 나를걸? 그러다 보면 그게 진짜든 아니든 1황자의 죽음은 웃음거리가 되겠지.”
“확실히…… 이건 매우 흥미로운 소문이겠지만…….”
나는 열정적으로 1황자를 똥쟁이로 만들고 있는 카인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런 황당한 복수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웃음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무거운 복수도 이렇게 유쾌하게 해낼 수 있는 거구나.
당연한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였다는 무거운 마음이 가슴 속에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똥쟁이 1황자라니.
자리를 생각해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어깨를 떨자 알테어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열심히 속닥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지나쳐가는 사이 카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소문은 맡겨만 두라는 듯 씩 웃었다. 아주 든든했다.
그렇게 든든한 아군을 안에 두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바인 후작님과 에일스포드 남작님이시지요?”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얼굴이 눈에 익었다. 초상화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멜리사의 남편감이라며 오르카가 찾아왔던 그 남자다!
“난보르 남작가의……?”
“예. 신부를 찾아 주셨다는 말을 듣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불쑥 다가왔습니다.”
1황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 귀족들도 수도를 찾았다더니.
그 행렬에 이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초상화가 거짓은 아니었는지 생긴 것은 정말이지 괜찮았다.
“그런데 신부는 장례식에 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수도 사교계에서 완전히 찍힌 멜리사가 여길 올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지방 귀족인 남자는 멜리사의 사정은 자세히 모르는 듯했다.
“그 애는 저택에 있답니다.”
“아아. 그렇군요.”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붙잡더니 손등에 가볍게 제 입술을 눌렀다.
귀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건 자연스러운 인사지만, 이렇게 허락도 받지 않고 하는 건 실례였다.
하지만 그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순간 이게 실례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와. 과연 난봉꾼……!’
뒤늦게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깨달은 내가 속으로 감탄하자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부에서는 차남에게 예법을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지?”
“아. 후작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제가 긴장한 나머지 실례를. 죄송합니다.”
남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능글맞게 나를 칭찬하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하며, 다시 한번 자연스레 손등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손등에 입을 맞추기 전에 재빨리 손을 빼내려는데, 그보다 알테어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퍽!’
“억!”
찰진 타격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