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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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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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마.
2022.09.04.
분명 알테어는 가볍게 팔을 휘둘렀을 뿐인데 소리가 엄청났다.
남자가 당황한 듯 알테어를 쳐다보았고, 나 역시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러나 알테어는 상황에 맞지 않게 태연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뻐근해서 기지개를 켠다는 게 그만.”
“그 기지개가…… 제 얼굴에까지 닿았군요……?”
“생각보다 제 팔이 길었던 모양입니다.”
알테어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당당히 주장하며 산뜻하게 웃자 남자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뻐끔댔다.
“조문은 마치셨습니까? 그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바인 후작저로 가시죠. 그렇지 않아도 결혼을 빠르게 진행하고 싶었는데 잘되었군요. 신부도 만나 보시면 좋겠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결혼 이야기가 나오니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알테어의 제안을 사양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가문을 대표해서 조문을 온다면 남작이 직접 나서는 게 맞다.
굳이 차남을 보냈다는 건 수도에 가서 결혼 이야기까지 마무리하고 오라는 뜻이었을 테니 오히려 이런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제안을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사르르 웃는 미남의 얼굴이 썩 보기 좋았다.
뭐…… 이미 이 남자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내게는 가식적으로 느껴질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 남자가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는 숨겨 둔 아이를 당당히 내놓고 키우기 위해서였다.
아내의 개인 재산을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태려는 의도도 있었다.
결국 여자를 데려다 앉혀놓고 죽어라 일만 시키며 탈탈 털어 먹을 작정이라는 소리다.
‘그러니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구는 거겠지.’
숨겨진 사연을 전혀 모르는 멜리사라면 껌뻑 넘어갈 거다.
이 남자나 멜리사, 양쪽 모두 쓰레기라 멀쩡한 사람을 만난다면 상대가 불쌍하니 서로를 이어 주는 것이 사회에도 이득이 될 터.
참으로 뿌듯한 중매가 될 것 같았다.
***
예상대로 남자를 마주한 멜리사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절박한 상황에서 멋진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돌파구를 발견한 것에 푹 빠져 다른 문제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과연 멜리사 바인다운 단순함이었다.
덕분에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남자 쪽 영지에서 치르기로 했고, 그에 따른 비용도 그들이 모두 감당하겠다고 나서서 우리가 준비할 일은 많지 않았다.
멜리사는 부유한 남자의 가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남자 쪽 가문의 상황을 생각하면 약식으로 결혼식이 진행될 가능성이 컸다.
‘내가 알테어와 결혼하던 때와 상황이 비슷하네.’
나 역시 모든 것을 남자 쪽 영지에서 준비한다고 하여 빈 몸으로 바인 후작가를 떠났었지.
멜리사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었거나 약간이라도 영리했다면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한 걸 알아차릴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눈치나 영민함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남자가 자신이 영지로 돌아갈 때 멜리사를 데려가고 싶다며 눈에 띄게 조급하게 굴었는데도 말이다.
남자는 혹시라도 멜리사가 자신에 대한 소문을 알아차릴까 봐 그 전에 결판을 내고 싶은 눈치였다.
멜리사 역시 수도의 소문이 남자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싶은 입장이라 그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덕분에 그녀는 지금 부랴부랴 떠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가진 게 없으니 짐을 꾸릴 필요도 없었지만, 눈치를 살살 살피며 값이 될 만한 장신구나 보석을 몰래 챙기려는 듯했다.
물론 안나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이니 목적을 달성하긴 어렵겠지만 말이다.
“오르카 황자가 사람을 제대로 골라오긴 했더군.”
“맞아요. 생긴 건 멀쩡한데 속은 썩은 사람으로 잘 골라왔어요.”
사실 그건 멜리사도 마찬가지다.
겉모습만 보면 꽤 예쁜 외모라 남자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당신이 보기에도 괜찮았나?”
“네. 사람 눈이야 다 비슷하니까요.”
다른 사람 눈에도 멋진 남자라면 당연히 내게도 그렇다.
하지만 알테어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소 뚱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알테어가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손등을 스윽 문질렀다.
장례식장에서 남자와 마주쳤을 때 그가 내게 입을 맞춘 그 손이었다.
무언의 항의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서, 이 커다란 남자를 귀여워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테어는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다.
자신의 영지인 에일스포드를 위해서, 또 자신의 부하들을 위해서 어려운 일에도 기꺼이 나섰던 소설 속의 악당 공작 역시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니, 이건 원래 그의 성격일 거다.
“신경 쓰였어요?”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당신도 신경 쓰였을걸.”
“그거야 그렇겠지만…….”
당연히 그럴 거다. 난 알테어를 좋아하니까.
다른 여자가 그의 손을 붙잡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급격히 우울해진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이유는 알테어와 다를 거예요.”
“어떻게 다른데?”
“알테어는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다가가는 게 싫은 거겠지만, 나는 알테어에게 다른 여자가 다가가는 게 싫은 거니까요.”
“전혀 다르지 않은 거 같은데.”
“달라요. 완전히.”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니 알테어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토록 단호하게 알테어의 말을 반박하는 경우가 많이 없어서 더욱 의아한 듯했다.
“그래도 서로를 유일하게 생각한다는 결론은 똑같으니까요. 그럼 괜찮아요.”
“난 다른 여자에게 손을 내어 준 적이 없는데 뭐가 똑같다는 거지?”
알테어가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살짝 잡아당기더니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국의 예법은 엉터리야. 귀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게 인사라니. 헛소리지. 이것도 죄다 개정해 버려야 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농담으로 치부했겠지만 실제로 상속법을 뜯어고쳐 버린 알테어가 꺼낸 이야기라 나는 다소 걱정스러워 그를 말렸다.
“이상한 일에 기력 쓰지 말아요. 안 그래도 일이 많으면서.”
“이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 부인의 손을 지키는 중요한 일이지.”
알테어가 내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깊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정말로 이 어이없는 일을 해낼 방법을 찾아낼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멜리사의 결혼이 마무리되면 에일스포드로 돌아가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알테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나 혼자 돌아가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영주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이 동요할 거예요. 수도에서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알테어를 오래 붙잡아 둘 순 없어요. 이제 큰 문제는 다 해결됐으니 나머지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요.”
“내가 그러겠다고 할 거 같아?”
“아뇨. 그러니까 이렇게 따로 말하는 거죠.”
“알고 있다면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겠군. 당신 혼자 수도에 두고 나만 돌아갈 수는 없어.”
“하지만 벌써 에일스포드를 비운 지 오래되었어요. 알테어의 소중한 영지를 이렇게 방치하려고요?”
영지를 향한 알테어의 애정은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알테어를 붙잡아 두는 건 그에게도, 또 에일스포드에도 좋지 않았다.
알테어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당신과 에일스포드, 양쪽 모두를 보살필 방법을 고민 중이야. 꽤 진척도 되었고.”
“진척이 되었다고요?”
“그래. 상속법 개정을 준비하던 시점부터 고민하던 문제니까.”
그 시점이라면 내가 후작이 될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시기인데.
알테어는 그때부터 오늘의 문제를 예견하고 대비까지 하고 있었던 거다.
‘역시 유능한 악당 공작……!’
감탄하며 눈을 크게 뜨자 알테어가 픽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내 이마를 톡 두드렸다.
“당신은 당신 생각만 해. 이 작은 머리로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가는 금방 터져 버릴걸.”
“그러는 알테어 머리도 별로 안 큰데…….”
“당신보다야 크지.”
“치이…… 그럼 그 큰 머리로 생각한 방법이라는 게 뭔데요?”
“음. 일종의 고속 마차를 만드는 거야.”
‘고속 마차?’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알테어가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보통 마차는 말이 끌고 가지. 이 동력을 마석의 힘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고안 중이었어. 말은 달리다 지치기도 하고 끌어 올릴 수 있는 속도에도 한계가 있지만, 마석으로 끌어 낼 수 있는 동력에는 한계가 없으니까 훨씬 빠른 속도로 양쪽을 오갈 수 있겠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묘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일종의 자동차 같은 건가?’
마석이라는 연료로 달리는 마차.
외형이나 기능은 많이 다르겠지만, 확실히 개념이 자동차와 비슷했다.
‘듣기만 해도 개발이 엄청나게 어려울 것 같은데.’
알테어는 분명 ‘진척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건 마석 광산을 발견한 직후에 떠오른 방법이긴 한데, 복잡해서 손을 놓고 있다가 최근에 필요성이 느껴져서 말이야. 인력을 여럿 모아 발명하고 있으니 곧 시제품을 볼 수 있을 거야.”
알테어는 태평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태평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 엄청난 발명이잖아요!”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임신한 아내를 혼자 두고 떠나는 게 걱정되어 발명했다기엔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은가?
“필요하면 만드는 거지. 엄청나고 말고를 따질 필요가 있나?”
“하지만 연구비도 엄청나게 들었을 테고…….”
“지금 돈이 문제야?”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그럼 돈이 문제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외칠 만한 배부른 소리였다.
“게다가 개발이 잘 끝나면 연구비의 몇 배나 되는 돈을 회수할 수도 있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말이 끄는 마차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인 탈것이 있다면 부유한 귀족들이 금괴를 짊어지고 찾아와 ‘제발 그걸 나한테도 팔아 주십쇼!’라고 외칠 테지.
그럼 평범하게 마석을 파는 것의 몇 배나 되는 수익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소설 속의 악당 공작은 단순히 마석 광산을 발견해서 대부호가 된 게 아니었다.
발견한 마석 광산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큰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거다.
나는 새삼 알테어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 역시도.
그럴수록 더욱 아내의 역할을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나, 나도 힘낼게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지자 알테어가 의아하다는 듯한 눈빛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힘내도록 하지. 날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말고.”
***
멜리사는 우아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북부로 떠나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꿈 같은 결혼을 앞둔 멜리사는 잔뜩 들떠 있었다.
나디아가 에일스포드에서 데려왔다는 시녀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바람에 돈이 될 만한 걸 몰래 챙기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자신이 수도에서 악명이 자자한 빈털터리라는 걸 들키지 않고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게다가 남편이 될 사람은 어찌나 잘생기고 다정한지.
‘나디아 그 계집애가 시골 귀족에게 시집간 뒤에 떵떵거리며 수도로 돌아왔지?’
나디아가 한 일을 나라고 못 할까?
심지어 나디아가 시집간 영지는 가난했고, 자신이 시집갈 영지는 부유하니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흥. 내가 더 대단해질 수 있어.’
그럼 그때 나디아 저 계집애에게 당한 걸 돌려줄 수도 있을 거다.
멜리사는 대단한 자신감에 가득 차 머릿속으로 아름다운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