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혼자 망할 수는 없지. (132/170)


132화. 혼자 망할 수는 없지.
2022.09.07.


멜리사가 떠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오래 묵혀 왔던 문제를 이제야 속 시원하게 해결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1황자는 죽었고, 숙부는 발스테드에 갇혀 여생을 보낼 것이다.

멜리사도 먼 지방으로 떠나 다시는 수도에 발을 붙이지 못할 테니 내 악연은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개운하지 않아.’

아마도 일이 너무 쉽게 해결됐다는 사실 때문이겠지.

나는 평생 운이 좋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남들보다 몇 배는 어렵게 해결하는 게 익숙해서 일이 한 번에, 이토록 깔끔하게 해결됐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게 알테어 효과인가?’

소설 속의 악당 공작은 복잡한 문제도 매우 간단하게 해결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마음 한구석에 숨은 불안함을 알테어의 존재로 달래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바인 후작가의 정원은 한참 소란스러웠다.

도대체 고속 마차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질문 세례를 퍼부었더니, 알테어가 설명보다 보는 게 낫겠다며 아예 고속 마차를 가져온 것이다.

평범한 정원이라면 감히 고속 마차를 시험해 볼 생각도 못 해 봤겠지만 여긴 바인 후작가였다.

수도에서 오랜 자리를 지킨 명문가의 저택답게, 바인 후작저는 땅이 귀하기로 소문난 수도에서도 제법 큰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귀한 손님의 거대한 마차가 편하게 저택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길도 잘 닦여 있었고 말이다.

고속 마차는 저택 바로 앞에 세워져 있었다.

알테어가 말했던 것처럼 마차를 끄는 말은 없었고, 내가 상상했던 자동차의 모습과도 조금 달랐다.

머리 위를 가리는 지붕도 없이 오픈된 마차가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다소 허술하게도 느껴졌다.

그나마 자동차와 비슷한 점을 찾는다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앞뒤로 나뉘어 앞쪽에는 운전석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

물론 그것도 좌우로 방향 조절만 가능해 보여서 ‘이게 정말로 제대로 작동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구경꾼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의문에 가득 차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차를 살폈다.


“이게 혼자서 달린다고요? 말도 없는데?”

“영주님. 어디서 사기당하신 건 아니죠?”

블란과 카인이 의심에 가득 차 알테어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이런 반응인 걸 보면 가까운 기사들에게도 진행 상황을 공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떠들 시간에 몸으로 체험하면 되겠군.”

알테어는 두 사람의 의심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뒤 턱짓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두 기사는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알테어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마차에 올라탔다.

상관의 명령을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고속 마차 자체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 여기 커다란 마석이 박혀 있네요?”

운전석 쪽에 앉은 카인이 신기하다는 듯 마석을 툭 건드렸다.

대수롭지 않게 했을 것이 분명한 그 행동에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마차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억!”

“어억!”

두려움 없는 두 기사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고, 모여 있던 구경꾼들도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마차의 속도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느리잖아……?’

모두 이 좌절스러운 속도에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나와 완전히 달랐다.


“정말로 마차가 혼자 움직이잖아?”

“세상에 저렇게 빠르다니.”

마리와 안나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쑥덕댔다.

그들은 마차가 혼자 움직인다는 것에만 놀란 게 아니라, 속도가 매우 빠르다며 감탄하고 있었다.


“빠……른가?”

나도 모르게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자 마리와 안나가 당연하다며 수선을 떨어댔다.


“그럼요! 말이 걷는 것보다 빨라 보이는데요!”

“그, 그게 기준이라면 확실히 빠르긴 하겠지만…….”

나는 다소 얼떨떨해져서 마차를 쳐다보았다.

말을 타고 달려 속도감에는 익숙할 두 기사들도 제대로 조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속도를 내는 건 익숙하지 않은지 태연한 척을 하면서도 마차의 구조물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하긴. 이쪽 사람들에게는 마차가 혼자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놀랍겠지.’

완전히 새로운 발상이니 당연했다.

아마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향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단순히 사람이 오가는 문제가 아니라 물류를 꽉 잡게 될지도.’

그렇게만 된다면 알테어는 소설 속의 악당 공작보다 훨씬 부유해질 거다.

단순히 부유해지는 걸 넘어서서 큰 권력을 가지게 되겠지.

아마 알테어도 그 미래까지 생각하고 마석을 활용한 동력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일 테다.


“아직 개선할 점은 많지만, 연구자들 말로는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

가만히 마차를 지켜보고 있으니 알테어가 진행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원래 마차를 설계하던 장인들과 마석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모아 함께 연구시킨 결과라고 했다.


“아마…… 아이가 태어날 때쯤에는 활용할 수 있을 정도까지 다듬어져 있을 거야.”

마차를 바라보던 알테어의 시선이 내 배로 향했다.

몸의 선이 드러나지 않는 편안한 옷을 입었는데도 배가 부른 것이 보일 정도라 알테어가 무의식적으로 내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이 닿기도 전에 멈칫했다.

보는 눈이 많은데 내 배를 만지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래 바인 후작가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아직 이곳에는 에일스포드 출신의 사용인들뿐이어서, 나는 조금도 그들의 시선이 민망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다들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에일스포드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감이 생기곤 했다.

나는 멀어지려는 알테어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내 배 위에 올려놓았다.

알테어가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아서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기분 탓인지 움직이는 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가…….”

내 말에 알테어가 배 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을 잡아보려는 듯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신중한 그 모습에 마리와 안나가 작게 키득댔다.

걱정거리는 사라졌고, 날씨도 좋고,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으로 가득하니 이보다 평화로운 한때가 어디 있을까?

평온함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때 멀리서 잠시 잊고 있던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요! 저희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거 어떻게 멈추는 거죠? 네?!”

블란과 카인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니 그들은 아직도 큰길을 따라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열심히 운전석의 조작부를 만져보는 듯했지만 마차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알테어에게 어서 방법을 알려주라며 눈짓을 보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직 멈추는 건 개발이 안 됐어.”

“……네? 그럼 두 사람은 어떡해요?”

“마석을 작은 걸로 넣었으니까 오래 못 가. 곧 멈출 거야.”

연료가 바닥나길 기다리는 다소 원시적인 제동 방식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함께 구경하던 기사들이 블란과 카인을 향해 외쳤다.


“멈추는 방법은 없으니 그대로 가래!”

“연료가 떨어지면 그때 알아서 멈출 거라나 뭐라나!”

“뭐라고? 이 악덕 영주!”

놀릴 생각으로 가득 찬 기사들의 낄낄거림에 블란과 카인이 원망에 찬 목소리로 알테어를 매도했다.

기분 좋은 소란에 나 역시 키득대며 분위기를 즐기고 있으니 누군가가 심각한 얼굴로 알테어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대며 이야기를 전했다.

마차 구경을 하러 나오지 않았던 기사 중 하나였는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알테어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가셨다.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걱정스럽게 묻자 알테어가 너무 심각할 필요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발스테드에서 사람이 죽었다는군.”

“발스테드라면, 설마…….”

“그래. 당신 숙부가 죽었다고, 시신을 수습해 가겠냐고 연락이 왔어.”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놀라서 말문이 턱 막혔다.

언젠가 숙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죽을 줄은 몰랐다.

속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쨌든 그를 감옥에 가두고 죽음으로 몰아간 건 나였으니까.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챈 건지 알테어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가볍게 매만졌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었어. 말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잖아.”

“맞아요. 난 더 이상 착한 아이로 남느라 소중한 걸 잃긴 싫었거든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거운 각오가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음을 차분하게 정돈했다.


“숙부님은 제게 저희 부모님을 가문의 묘지에 모시는 대가를 받았어요. 전 부모님의 영면을 위해 귀한 장신구를 내다 팔아 숙부님께 돈을 줬지요.”

“……그랬지.”

“이번에는 반대가 되었는데, 저 역시 멜리사에게 물어야겠네요. 네 아버지를 가문의 묘지에 모시는 대가를 낼 수 있겠냐고요. 저는 멜리사의 결정에 따르겠어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리자 알테어가 슬쩍 웃으며 소식을 전한 기사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는군. 멜리사 바인에게 그렇게 전하도록 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이미 알 것 같지만.”

알테어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

발스테드에 갇힌 아바르 바인은 제 딸이 자신에게 주고 간 약병을 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망할 계집애. 여태까지 자길 먹여 살린 게 누군데!

귀한 걸 먹이고 입혔더니 이딴 식으로 혼자만 살겠다고 내빼?

아바르는 약병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벽에 내던질 듯 매서운 기세였다.

하지만 약병을 내던지기 직전에 뭘 생각한 건지 그의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분노로 씩씩대던 얼굴이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싸늘하게 차가워졌다.

아바르 바인은 약병을 손에 쥔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황을 역전시키기엔 너무 멀리 왔다.

예전의 것을 되찾을 수는 없을 거라는 절망이 비로소 현실이 되어 아바르의 몸을 덮쳤다.

어떻게든 상황을 헤쳐 나가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눈이 썩은 생선의 눈알처럼 흐리멍덩해졌다.


“이렇게 끝이라니. 내 화려한 삶이…… 전부…….”

허망하게 중얼대던 아바르의 공허한 눈동자가 손에 쥔 약병으로 향했다.


“죽음이라.”

발스테드는 죽어서만 나갈 수 있는 악명 높은 감옥.

딸은 제게 죽으라며 약병을 죽고 갔다.


“그럼 죽어야지.”

‘죽어서만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면, 죽어서 나가면 돼.’

나가면…… 그렇게 나가면…….

다시 제 것을 되찾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게 힘들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다.

대신 상대의 것을 망쳐 버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내가 가지지 못했다면 상대 역시 못 가지게 해야 하지 않겠어?

나만 망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아바르는 광기에 차서 킥킥대며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비열한 악당의 마지막은 끝까지 비열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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